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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82화 (82/363)

82화 ‘칸’ 월스트리트를 정복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트럼프는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유진에게 VIP 고객들의 자금을 이번 베팅에서 제외하라는 지시를 받은 요안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트럼프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해 왔었잖아요. 그리고 브렉시트가 가결되는 것이 트럼프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테고요.”

“지지하는 것과 이길 거라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니까. 더군다나 브렉시트가 통과될 거라는 것에 자신의 돈을 베팅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이고 말이지.”

“음. 하긴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트럼프가 그렇게 겁을 낸다니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위험한 도박이라…….”

유진은 요안나가 말하는 도박이 바로 대통령 선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박이라고 할 것까지 있나? 트럼프에게 이번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 일이야. 이기면 좋고, 져도 큰 상관 없는 게임이지.”

“어째서요? 적어도 1억 달러 이상을 쓰고,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수많은 안티를 생성하고 있는데요.”

“그게 바로 트럼프가 노리는 거야. 트럼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성이지. 그의 사업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파는 것에서 수익을 얻고 있어. 악평이든 좋은 평이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많이 오르내릴수록 트럼프의 이름값은 높아지는 거야.”

몇 번이나 트럼프를 만나 본 유진은 그 남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도 확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2년에 걸친 선거전을 통해 트럼프의 이름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억 달러로 그 정도의 유명세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8억 달러에 달하는 큰돈을 질 확률이 훨씬 높은 도박에 베팅하는 것은 전혀 이야기가 달라. 더군다나 초기 자금이 은행에서 진 빚이라면 말이지. 그 돈을 날려 버리면 트럼프는 궁지에 몰리게 될 거야. 어쩌면 대통령 선거를 걱정해야 할 만큼 말이야.”

“하기야…….”

“그리고 또 한 가지. 트럼프는 우리를 통해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써 4억 달러에 가까운 거금을 벌었어. 한데 이번 한 번의 도박으로 기껏 쌓아 올린 거액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기 어려웠을 거야. 사람들은 늘 이익보다 손해에 훨씬 더 민감한 법이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5억 달러가 8억 7,000만 달러가 되었는데, 겨우 하루짜리 투표의 결과로 제로가 될 수 있다면 아찔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요안나의 부친마저 이번 도박에서 빠지기로 결정했다.

“이길 확률이 겨우 1/3밖에 안 되는데 8억 달러를 걸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도박에 1,000억 달러라는 돈을 집어넣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강심장인 거예요?”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자료를 보아 왔을 뿐이지. 특히 빅데이터를 말이야.”

유진은 얼마 전 거액을 투자한 스노우플레이크 사의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빅데이터요?”

“응. 브렉시트에 관련된 단어를 중심으로 탈퇴와 잔류를 비교해 보면 탈퇴 쪽에 훨씬 더 무게 중심이 실려. 영국 국민들은 탈퇴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빅데이터가 대단히 유용한 분석 방법인 것은 알지만, 그걸로 그런 투표 결과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아직까지는 데이터 마이닝이 확실한 예측을 내놓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정확도가 있다고 생각해. 오히려 이런 선거 같은 것은 더욱 그렇다고 봐.”

“그래서 최근에 빅데이터 테크놀로지 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그렇게 늘었군요.”

유진은 캘리포니아의 VC를 통해 스노우플레이크는 물론이고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데이터브릭스 같은 빅데이터 기업들에 대한 전면적인 투자에 나섰다.

하나 같이 10년 내로 수천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자랑할 잠재력 있는 회사들이다.

“그럼 지금까지의 투자들이 전부 그런 빅데이터를 통한 분석 때문이라는 건가요?”

“정답이야. 난 빅데이터를 무척이나 신뢰하거든.”

“거짓말쟁이로군요. 보스한테 올라가는 보고서는 거의 제 손을 거치는데, 빅데이터 분석이 올라간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이라고요.”

요안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 역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려나?”

유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뭐예요? 대체? 절 갖고 노시는 거예요?”

“아니. 이번에 인터뷰가 잡혔잖아. 거기서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거든. 안 먹힐까?”

“아뇨. 먹힐 거예요. 나도 살짝 넘어갈 뻔했으니까요.”

이제 유진의 의도를 파악한 요안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그런 식으로 내용을 짜 봐야겠네.”

인터뷰에 사용할 단어들과 뉘앙스는 항상 모니카와 함께 충분한 합의를 거쳐 결정한다.

이제 유진은 충분히 영향력을 지닌 파워 피플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는 일은 어지간하면 삼가는 편이다.

“며칠 뒤의 영국 국민 투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제는 제법 친숙해진 포브스의 기자가 인터뷰어로 선택되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영국 국민들은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합니다.”

“현명한 선택이라면 역시 유럽연합에 잔류를 말하시는 거겠죠?”

“유럽연합 잔류만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하시는군요?”

유진이 오히려 반문했다.

“당연한 것 아닐까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 적지 않은 곤란을 격게 될 테니까요.”

“사실 곤란이라는 단어에는 상당한 논리의 비약이 있습니다. 유럽연합에 잔류를 선택한다 해도, 지금 영국 국민들이 겪고 있는 많은 난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유진은 의도적으로 한번 호흡을 조절한 뒤 말을 이었다.

“급격한 세계화로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리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함으로써 당분간의 곤경을 겪게 될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무조건 부정적인 영향만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브렉시트가 영국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그저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브렉시트를 결정했다고 어리석은 선택이라 비난하는 자체가 어리석다는 말이죠.”

유진은 최대한 정치적 논란을 피해갈 수 있는 수사를 사용했다.

브렉시트로 커다란 이익을 보게 될 사람은 유진 본인이다.

그런 유진이 브렉시트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진 칸은 투표 결과 브렉시트 찬성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한다는 말이지요?”

“적어도 빅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은 준비해 온 말로 브렉시트의 결과를 예측했다.

그날의 인터뷰에서는 유진이 브렉시트에 거액을 베팅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뒤를 이어 유진의 인터뷰를 보도한 다른 매체들은 하나같이 유진의 투자에 관해 기사를 실었다.

- 유진 칸, 브렉시트에 수백억 달러를 베팅했다.

유진이 거액의 베팅을 한 일은 여러 소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큰 액수를 베팅했는지는 완벽하게 대외비였다.

사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도 몇 안 된다.

미디어에서도 실제 금액의 몇분의 일 정도로 보도할 뿐이다.

만일 유진이 1,000억 달러를 베팅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레버리지까지 계산하면 대한민국 1년 GDP를 넘어설 정도의 엄청난 액수가 걸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파급은 지금에 비교할 바가 아닐 것이다.

유진도 그 정도의 파장까지는 원하지 않았기에, 미디어에서 보도하는 예상 액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백억 달러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고, 한국의 언론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거침없는 미국의 미디어들은 이때다 하고 마음껏 판매량을 늘려 줄 자극적인 문구로 유진의 이야기를 실었다.

- 유진 칸은 영국 국민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월스트리트의 난폭한 정복자 유진 칸, 이번에는 실패하나?

언제부터인가 유진을 부르는 이름은 ‘유진 강’에서 ‘유진 캉’으로, 그리고 다시 ‘유진 칸’으로 바뀌어 가다가 이제는 완전히 ‘칸’으로 결론이 내려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강’이나 ‘캉’이라는 발음보다 ‘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인 듯하다.

지금에 와서는 유진도 굳이 ‘칸’이 아니라 ‘강’이라 지적하지 않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칸’이 성이라기보다는 칭키즈칸의 칸처럼 들리기 때문에 동양인에게도 서양인에게도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질 거라는 이유였다.

- 천 년전 세계를 유린했던 정복자의 후예, 이제 다시 황금으로 세계를 유린한다.

심지어 유진의 모국인 한국과 칭기즈칸의 몽골을 구별도 하지 못하는 기자들은 아예 유진을 칭키즈칸의 후예라는 식으로 보도를 하기도 했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칸 씨가 된 거야? 더군다나 칭키스칸의 후예라니. 국적도 바뀐 거야?”

신문을 들여다보던 유성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러게. 몽골 사람들이 보면 화내겠다.”

“대체 두 분은 어쩌면 그렇게 긴장감이 하나도 없어요?”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어요. 걱정 안 돼요?”

“걱정해서 뭐 해요?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이젠 형의 투자에 조금의 의심도 없는 유성이 형처럼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어요. 물론 내가 보스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안나는 천억 달러짜리 베팅이 걸렸는데, 라는 말은 생략했다.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유진이 지시한 투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오피스의 직원들은 수백 곳에 달하는 금융기관과 다양한 상품의 계약을 맺었다.

옵션, 스왑, 보험, 그리고 이런저런 상품이 복합된 또 다른 파생까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유진으로서도 이번 이벤트에는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였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번처럼 대단한 이벤트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의 예측을 배신하는 결과가 이처럼 극적으로 나오는 일도 드물 것이다.

“베팅 사이트의 최종 예상은 2.6 대 7.4에요.”

요안나는 아침부터 전전긍긍이다.

딜러들은 지금 마지막으로 남은 현금을 다양한 선물 상품에 쏟아붓고 있었다.

이날 외환거래 물량은 평소에 비해 몇 배나 높았다.

유진뿐 아니라 수많은 투자기관이 이 기회에 한몫을 벌어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운드화에는 엄청난 돈이 몰려들고 있었다.

전날에 비해 대략 0.5% 포인트가 올라갔다는 것은, 투자자들이 대체로 파운드화의 강세를 예측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유진에게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액을 퍼부으며 숏 포지션을 잡아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

그건 바로 내일의 수익과 직결된다.

정신없이 바쁘게 포지션을 확보하고 있는 딜러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긴장한 표정들이다.

요안나처럼 유진의 안목을 믿고는 있지만, 상황은 너무나 불리해 보이기만 했다.

그나마 여론 조사 결과는 찬성과 반대가 아주 첨예하게 갈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 국민들의 상식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하루 뒤의 투표가 확실한 분수령이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국가들을 지배해 온 헤게모니는 이성과 지성에 대한 믿음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부터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상식에 의문을 표하고,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정치인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인의 상식이 무너지기까지 하루도 남지 않았다.

2016년 6월 23일 자정, 드디어 개표가 시작되었다.

뉴욕 시간으로는 오후 7시. 평소라면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지만, 오피스의 직원들은 전날보다도 훨씬 더 긴장한 표정으로 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최대한 빠르게 투자한 자산의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찬성으로 결과가 나도, 반대로 결과가 나도, 모두들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빠르면 새벽에 결과가 나올 거예요.”

“여기 시간으로는 자정쯤이 되겠네. 다들 저녁 먹고 잠시 쉬도록 하지. 다들 긴장 풀고.”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요?”

요안나가 반문했다.

“안 되려나? 난 한숨 자고 싶은데.”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요. 대체 지금 같은 상황에 잠이 와요?”

“내일 눈을 뜨고 나서 얼마나 벌어들였는지 확인할 생각을 하면 아주 꿀잠을 자겠는데?”

유진은 평소보다 더 여유를 보였다. 하지만 내심은 그도 꽤 긴장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걸린 액수가 크니 평정심을 찾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걸 감추려다 보니 오히려 실없는 농담이나 마구 던지고 있었다.

“보스도 사람이 맞는 모양이에요.”

요안나가 유진의 그런 태도에 숨겨진 감정을 알아차렸다.

그때였다.

“아아!”

사람들의 한숨 소리와 안타까운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지브롤터에서 벌써 결과가 나왔어요.”

모니카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스페인의 남쪽 끝, 아프리카 대륙과 좁은 해협으로 마주한 지브롤터는 서울에서 가장 좁은 면적인 중구보다도 작은 크기이지만,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벌써 300년째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다.

당연히 그곳 사람들 또한 영국 국민이라 브렉시트 투표에 참여했다.

“인구가 3만 명밖에 안 되니 빠르게 끝났어요. 그리고…… 그쪽 결과는 압도적으로 유럽연합 잔류에 표를 던졌어요.”

모니카가 쓴웃음을 지며 말했다.

“그쪽은 어차피 처음부터 잔류였어요. 영국 본토가 아니라 스페인에 붙어 있으니, 잔류가 훨씬 유리해요.”

요안나가 애써 침착한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들려온 소식이 그런 것이라 결코 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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