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진정한 승자
“파운드화 상승합니다. 현재 1.52달러입니다.”
지브롤터 투표 결과는 바로 파운드화 시세에 반영이 되었다.
개표가 시작되기 전까지 파운드화는 평소보다 더 높은 파운드당 1.5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최근 여섯 달 내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만큼 경제 주체들이 브렉시트의 가결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개표가 시작되며 반대표가 우위로 드러나자 파운드화는 폭등을 시작했다.
오피스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파운드 하락입니다.”
하지만 개표가 진행되며 찬성과 반대가 엎치락뒤치락하자 파운드화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금세 최고치를 넘어섰다가, 금세 개표 이전으로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모두들 긴장된 얼굴로 뉴스에 보도되는 개표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그리고 가장 많은 자원이 투입된 파운드화가 반응이 제일 빠르다.
파운드화가 떨어지면 모두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한다.
“아! 다시 반대로 넘어섰네요.”
하지만 일이 예상처럼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잠시 찬성이 우위를 점하나 싶더니, 금세 반대가 50%를 넘어섰다.
폭락하던 파운드화가 다시 위로 솟구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러다 다시 찬성이 우위를 점하고, 다시 파운드화가 쭉쭉 떨어진다.
폭등과 폭락에 익숙한 월가의 딜러들이지만, 이날 이 순간처럼 정신없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투표 결과에 무려 1,000억 달러가 걸려 있으니, 사실상 이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1.64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예견하고 있어요.”
리서치 팀의 분석으로 개표 결과 브렉시트 부결로 나오면 파운드화는 완전하게 강세를 굳힐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경우 전일 대비 10% 상승이다.
이는 곧 대략 10배의 레버리지로 파운드 하락에 베팅한 유진의 수백억 달러가 휴짓조각이 된다는 의미였다.
“반대라면 이번 주 안으로 1.4달러까지 보고 있어요.”
영국 재무부는 브렉시트가 확정될 경우 최대 2년에 걸쳐 파운드화가 12%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하지만 리서치 팀의 예측은 한 달 내로 그 정도 충격이 올 것으로 보고 있었다.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이다.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는 직접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개표 결과는 수시로 업데이트되었고, 50%를 기준으로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다.
아마 지금 월스트리트의 투자기관 대부분이 유진의 오피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의 결과는 단순히 영국 경제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전 세계 모든 통화는 물론이고, 주식 시장에도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빠르게 대응해야만 한다.
지금도 각국 환율은 물론, 주식 시장도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 모든 상품에 투자한 유진의 오피스에서도 각 부서마다 자기가 맡은 상품의 현황을 지켜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도쿄와 서울 시장이 개장했어요.”
아시아의 주식 시장도 출렁거린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영국에 모여졌다.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고 있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브렉시트 찬성표가 약소하게나마 우위를 보였다.
모든 직원은 이제 여유를 되찾고 편한 자세로 뉴스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자정이 되면 퇴근할 수 있겠어요.”
투표 결과가 유럽연합 잔류로 나오면 모두가 달라붙어 손해를 줄이기 위해 모든 포지션을 청산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탈퇴로 굳어지면 소수만 남아 투표 결과에 따른 상황을 모니터링만 하면 될 것이다.
“파운드화 폭락하기 시작합니다.”
찬성표가 우위를 확보하면서 잠깐 사이에 2%나 빠졌다.
“1.44달러 돌파했습니다.”
순식간에 다시 4%까지 빠졌다.
몇 시간 사이에 환율이 이렇게나 빠지는 일은 전쟁 상황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물론 유진으로서는 아주 흡족한 결과였다.
파운드화에는 열 배의 레버리지로 수백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옵션과 보험, 스왑까지 고려하면 대략 20배에 가까운 레버리지이다.
“지금까지만 대략 176억 달러 이익이에요.”
요안나가 대충 계산을 해 보고 알려 주었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1% 하락할 때마다 유진의 자산은 수십억 달러가 늘어난다.
“아시아 주식 시장 폭락합니다. 닛케이 1.8%, 코스피 2.3% 하락입니다.”
여기에도 적지 않은 자금이 투입되어 있다. 물론 전부 숏포지션이다.
“엔화 폭등합니다.”
달러와 함께 준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는 파운드화와 엔화는 이번 사태에서 정반대의 행보를 보여 줬다.
파운드가 떨어지면, 엔화가 오른다.
“골드 상승세입니다.”
경제가 불안하면 언제나 금값이 폭등하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도 꽤 많은 자원이 들어가 있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거래되는 대부분의 상품에 유진의 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결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부 예측 대로군요.”
요안나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멋진 하루가 되겠어요. 역사상 하루 동안에 가장 큰 수익을 남긴 사람이 되시겠어요.”
“그런데 출출하지 않아?”
유진도 자기가 알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1,000억 달러를 날려 버린 세기의 멍청이가 되지는 않을 듯하다.
“슬슬 요리들이 올 때가 된 거 같아요.”
요안나의 말대로 야근을 대비해 바로 옆 플라자 호텔 연회팀에 주문해 놓은 요리들이 도착해서 사무실 한쪽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승리의 기색이 완연해져서 완전히 활기를 찾은 직원들은 테이블 앞에 하나씩 모여들어 원하는 음식을 챙겨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유진도 요안나와 함께 직원들 사이에 줄을 서서 요리를 접시에 담아 왔다.
“맥주가 없는 게 아쉽네.”
축하주가 필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오피스에서 술은 엄금이다. 앞날을 완벽하게 예측해 놓고 쓸데없는 실수 한 번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팻핑거로 거대한 투자회사나 은행이 망해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나 유진의 오피스는 그런 면에서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해 놓았다.
일정 금액 이상의 투자는 반드시 두세 단계의 결제를 거치게 되어 있다.
1초에 수백만 달러가 오가는 금융 투자 시장이라고 하지만, 유진의 투자는 대부분 결과를 정해 놓고 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은 없다.
유진의 지시대로 최대한 완벽하고 안전한 투자를 하는 쪽이 중요했다.
당연히 사내에서 알콜은 꿈도 못 꾼다.
월스트리트의 다른 투자기관처럼 헤로인을 복용하는 것도 금물이다.
아예 근로계약서에 향정신성의약품의 복용 금지가 명시되어 있다.
“맥주야 끝나고 마시면 되죠.”
요안나도 조금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규칙은 규칙이니까.
다들 탄산음료로 기분을 내며 뉴스와 각종 지수 현황판에 눈을 돌린다.
“파운드 1.4달러를 뚫었습니다.”
개표 결과가 찬성으로 모이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파운드화는 바닥을 모르고 내려앉는다.
“1.4달러?”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듯 모니터를 노려본다.
“1주일 안에 1.4달러라고 하더니…….”
시장의 반응은 예측보다 더 심했다.
아직 개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리서치 팀의 예측은 물론이고 영국 재무부의 예측을 까마득히 넘어선다.
“그래도 우리 리서치 팀이 낫네.”
리서치 팀은 1주일, 영국 재무부는 2년을 생각했었다.
“아직 바닥이 아닌 모양이에요. 계속 떨어져요.”
파운드화가 마치 폭포처럼 내리꽂고 있었다.
만일 유진과 반대로 투자를 했다면 아찔했을 순간이다.
“아무래도 이걸로 끝인 모양이에요.”
이 뒤로 브렉시트 반대표는 단 한 번도 찬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파운드화는 계속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각국 주식 시장은 날벼락을 맞았다.
“슬슬 끝이 보이네요.”
자정이 다가오면서 뉴스에서는 이대로 브렉시트 가결이 확실시된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아침이 되면 난리가 나겠네.”
“그렇겠네요. 솔직히 말해 정말로 이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물론 보스의 말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너무…….”
요안나는 영국 사람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뭐. 그게 모든 영국 사람의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까.”
브렉시트에 반대한 영국 국민도 48%가 넘는다. 그러니 사실상 브렉시트를 둔 여론은 거의 반반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만 1,00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이 발생했어요.”
영국인들의 선택에 대한 의문은 뒤로하고, 이날 가장 큰 승리자가 된 유진의 수익에 대해 계산을 마쳤다.
“이거…… 외부에는 알리면 안 되겠어요.”
요안나는 조금 겁이 난다는 표정을 한다.
“그렇지?”
유진도 비슷한 심정이다.
유진이 굉장한 수익을 올린 것이야 모두들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1,000억 달러의 수익이라는 것은 비밀로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피스 내에서도 모든 것을 총괄하는 요안나와 몇몇만이 결과를 공유했고, 비밀 유지에 대해 특별히 당부했다.
“자. 슬슬 마무리하지. 다들 피곤할 텐데, 퇴근할 사람들은 퇴근하자고.”
자정을 훌쩍 넘어서며 유진의 오피스는 정리를 시작했다.
모니터링을 위해 남아 있을 몇몇을 제외하고는 하나씩 마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나 같이 밝은 얼굴들이다.
유진이 큰 수익을 얻은 만큼, 그들도 적지 않은 성과급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각자의 연봉 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다들 쉽게 잠이 들지는 못하겠어요.”
“그러겠지. 플라자호텔에서 마무리하고, 거기서 잘 수 있게 하지.”
그냥 풀어두어도 각자 삼삼오오로 어딘가 술집으로 몰려갈 기세였다.
유진은 차라리 사무실 바로 옆의 플라자호텔에서 마음껏 즐기고, 편한 잠자리를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그렇게 마음껏 즐기고, 숙박을 하면 그만큼 플라자호텔의 매출이 는다.
플라자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유진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계획이다.
하지만 유진과 요안나를 비롯한 경영진은 그날 오피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다음날 뉴스에서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득표율 51.9%로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파운드화는 이틀 뒤에 1.24까지 떨어졌다. 고점 대비 대략 19%가량 하락한 수준이다.
유진은 어쩐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결과보다 더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겪었던 당시엔 대략 14% 정도 떨어진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유진은 어쩌면 그 차이가 자신의 개입 때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개입으로 인한 변화가 점점 더 가속될 것이다.
이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진의 영향력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유진이 알던 것과 조금씩 다르게 변화해 갈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로운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유진이 알고 있던 미래에 대한 기억들이 항상 그대로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을 가정해야 했다.
“파운드화에서만 600억 달러입니다.”
요안나가 활짝 웃는 얼굴로 보고했다.
“엔화에서는 180억 달러, 그리고 기타 통화에서 320억 달러입니다.”
통화 상품에서만 이 시점에서 1,00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주식 시장에서도 적지 않은 수익이 생겼다.
“나스닥은 5.4% 하락입니다. 다우존스는 3.8%, S&P는 4.3%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뉴욕증시도 피바다가 되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 증시들은 말할 것도 없다.
“주가는 바로 회복될 테니 정리에 들어가지.”
파운드화와 엔화 등 몇 개의 통화 상품만 두고 바로 정리를 지시했다.
이번 주가 하락은 어디까지나 영국인들의 선택이 의외라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충격에 불과했다.
- 유진 칸, 월스트리트를 넘어 전 세계 금융가를 폭격하다.
- 금융 관계자에 따르면 유진 칸은 이번 브렉시트 사태에서 수백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 브렉시트의 진정한 승자는 유진 칸.
그리고 미디어에서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 보도와 함께 유진에 관한 기사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 유진 칸, 1조 달러를 벌어들였다. 사실일까?
- 칸, 월스트리트를 전부 사 버릴 예정이다.
한국의 미디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의 황색언론들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기사를 쏘아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1조 달러는 너무한데? 소송이라도 걸어야 할까?”
유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런 타블로이드지의 기사를 믿지 않지만, 그래도 자극적인 제목이 붙어 있으면 우선 사 보기 마련이니까요. 소송해 봐야 소용도 없어요.”
“그래. 언론의 자유가 가장 중요한 나라였지.”
유진도 잘 알고 있다. 소송의 의미도 없고, 오히려 그런 타블로이드 독자들을 더욱 즐겁게 해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