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씽크탱크
마침 이 행사에는 또 한 명의 대상이 참석해 있었다.
“반갑습니다. 월리 아데예모 씨.”
국가 경제 위원회 부국장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 흑인에게 유진이 먼저 인사를 청했다.
“오! 반갑습니다. 미스터 트릴리언!”
그가 싱긋 웃으며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1조는 과장입니다. 미스터 아데예모.”
“과장이라고는 해도, 그 절반만으로도 사람들이 기겁할 일이지요. 유진 캉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도박에 성공한 남자로 기록될 겁니다.”
“아직 제 도박은 끝난 게 아닌데요.”
“설마 미국이라도 사들일 생각은 아니겠지요?”
“미국을 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한 커다란 유산을 남기고 싶군요.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 멈추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기념비적인 유산을요.”
유진이 농담을 받으며 포부를 드러냈다.
“멋진 계획이로군요. 빌도 중년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고 있지요. 유진 캉이라면 더 젊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겠군요.”
“유진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면 나도 월리라고 불러 주세요. 이 월리는 아주 찾기 쉽답니다.”
유진에 대해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지 월리는 가벼운 조크를 덧붙였다.
유진과 월리는 잠시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오바마의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군요. 월리의 계획에 대해 질문을 던져 봐도 될까요?”
“흐음…… 갑자기 불쑥 들어오시는군요.”
월리가 살짝 당황했다.
“사실은 월리에게 아주 깊은 관심이 있어서 말이지요. 이번에 우리가 리서치 센터를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유진은 지금의 조직과는 별개로 싱크탱크 역할을 할 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각 분야의 석학들과 정계의 중요 인사들을 초빙해 고액의 연봉을 제공하고, 그들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세계 경제의 흐름과 미래 예측을 하는 연구 기관이 될 것이다.
당장 연구원으로 확충하기로 한 규모만 천 명대에 달한다.
유진이 거느린 기관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큰 규모가 될 것이다.
“일종의 싱크탱크로군요.”
월리는 곧바로 유진의 의도를 알아챘다.
미국은 수많은 기업과 언론사, 그리고 정치인들에 의해 조직된 수천에 달하는 싱크탱크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며, 때로는 정책적인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 내보내 정치와 언론을 주도한다.
유진 정도의 자산가가 싱크탱크를 만드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산관리 회사인 블랙록도 블랙록 인베스트먼트 인스티튜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외부 인사를 수시로 영입한다.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싱크탱크의 운영을 맡아 줄 분도 초빙하지 못했고요.”
“설마 그런 자리를 제게 제안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월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매력적인 웃음을 보였다.
“왜 아니겠습니까? 연구소는 아직 준비 중이니, 한번 천천히 생각해 주시면 좋겠군요.”
“음…… 난 유진이 트럼프와 친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꺼려진다는 의미였다.
“물론 트럼프 씨와는 좋은 비지니스 파트너이죠. 하지만 연구소는 어디까지나 연구원들과 연구 책임자의 의사에 의해 운영될 겁니다. 난 어디까지나 재정적인 부분만을 책임지게 되고요.”
“그 연구소가 유진이 말한 많은 사람을 위한 유산이 되는 건가요?”
“아마 그 유산 중 일부가 되겠죠.”
유진의 말에 아데예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힐러리가 백악관을 차지한다면 난 여기 계속 머무르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30대에 불과한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의 말로는 어찌 보면 광오한 말이지만, 그렇게 틀리지 않은 소리였다.
월리 아데예모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그리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주 강력한 권한을 지닌 사람이다.
재무부 장관 수석 고문 겸 비서실장을 거쳐 국제 시장 및 개발을 위한 재무부 차관보, 그리고 국가안보 보좌관까지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여러 민주당 중진들의 애정을 듬뿍 받아오는 사람이기도 하다.
유진이 알기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블랙록에 영입되어 레리 핑크 회장의 비서실장과 선임 고문으로 지내다가 다시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백악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겨우 마흔도 되지 않는 나이에 미국 재무부 차관이라는 요직을 차지하면서 말이다.
그의 명석함은 백악관은 물론이고, 민주당 많은 인사들이 인정하고 있다.
백악관의 다음 주인 자리를 노리는 힐러리가 그에게 이미 어떤 제의를 했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블랙록이 아데예모를 스카웃하는 이유도 유진과 비슷한 목적에서였다. 언제고 민주당 정권이 오면 중요하게 쓰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건, 아데예모 씨를 탐내지 않을 리 없지요. 하지만…… 제 친구는 아닐 것 같군요.”
트럼프가 아니라 다른 어떤 공화당 인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꼭 친 민주당 인사가 아니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기보다는 자기 아들, 딸, 사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로 유진의 친구가 이긴다면, 나도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습니다.”
“꼭 그래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유진은 아데예모를 어떻게든 영입할 생각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충분한 재정적 지원과 미래에 대한 보장만 있다면, 결국은 미국의 그 누구라도 영입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보며 느낀 유진의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좀 더 과감하게 영입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렇게 백악관에서 블랙록으로, 다시 블랙록에서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은 더 있다.
“참! 브라이언 디즈 씨에게도 한 번 제 제안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디즈도요?”
아데예모가 살짝 놀란다.
브라이언 크리스토퍼 디즈는 월리 아데예모와 함께 백악관의 대표적인 젊은 파워로 불리는 사람이다.
세금, 금융 규제, 주택, 청정에너지, 제조 및 자동차 산업에 대한 백악관의 정책 개발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 기후와 에너지 담당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파리 기후 협상을 담당했고, 대통령의 가장 큰 권한이라 할 수 있는 대법관 선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이다.
그 또한 트럼프 정부하에서는 아데예모와 함께 블랙록에 영입되었다가 다음 정부에서는 대통령 경제정책보좌관 겸 국가경제위원회의 국장이라는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나도 브라이언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기후 위기에 대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고 브라이언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 보고 싶다고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유진은 브라이언도 가능하다면 영입할 생각이다.
“확실히 친구인 트럼프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니고 계신 모양이군요.”
월리는 유진이 굳이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
“점점 유진에게 관심이 생기네요.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유진은 어쩐지 아데예모를 손에 넣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유진이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에릭의 승낙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틀림없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저보다 우리 집사람이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유진은 에릭 홀더 부부를 위해 맨해튼에 고급 주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고급 콘도를 구매할 생각이야.”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유진은 리츠(REITs) 팀에게 부동산 매입을 지시했다.
“콘도요?”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 위해 새로 구성된 리츠 팀은 우선은 뉴욕의 대형 빌딩 매입에 대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경제 연구 센터에 영입할 사람들에게 제공할 곳 말이야.”
에릭 부부뿐 아니라, 워싱턴에 뿌리를 둔 정계 유력 인사들을 데려오려면 우선 마땅한 주거지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 뉴욕의 고가 주택을 사놓기에는 지금이 제격이다.
“알겠습니다. 고급 콘도라면 역시 이 주변으로 알아보는 게 좋겠지요?”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 모으는 게 좋겠지. 보안이나 경호 따위를 생각하면 말이야.”
“가능하다면 건물이 통째로 나와 있는 것을 확보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고 나니, 이번에는 보안부서가 신경이 쓰인다.
아무래도 보안 회사를 하나 인수하거나, 지금 유진을 돕고 있는 경호원들의 회사인 아카데미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쪽을 고민해 봐야 할 듯싶었다.
“이번 투자 결과에 대해 조금씩 비난 여론이 나오고 있어요.”
모든 일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금융투자 수익에 대해 그리 비판의 여론이 나오는 편은 아니지만, 모기지로 유발된 세계금융 위기 이후로는 월스트리트의 과도한 이익에 대해 불만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주로 민주당 쪽 목소리에서 그런 경향이 커요. 아무래도 보스와 트럼프의 관계 때문이겠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돈을 벌면 누군가는 배가 아프기 마련이니까.”
이번 일의 경우는 딱히 유진을 비난할 만한 명분은 없다. 사태를 일으킨 것은 영국의 국민들이고, 유진은 그저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베팅을 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부 언론들은 유진의 성공을 악마화해서, 트럼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1조 달러 기사가 문제였어요.”
상징적인 문제였다. 그저 큰돈을 벌어들였다는 말과 1조 달러라는 단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 군데서 1조 달러를 말하니, 여기저기서 1조 달러를 부르짖는다.
정말로 1조 달러를 벌어들였다면 모를까, 그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벌어들인 유진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뉴욕데일리뉴스였지?”
뉴욕포스트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인 뉴욕데일리뉴스는 주로 뉴욕 명사들의 가십이나 자극적인 보도를 다루는데, 때때로 지나치게 선정적인 기사로 문제를 일으키고는 한다.
이번에도 유진에 관련된 기사로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이루었다고 했다.
“네. 항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항의라…… 그거 의미 없겠지?”
“물론 그렇지요.”
요안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는데?”
“다른 방법이요?”
요안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가 결정되며 전 세계 증시가 일제히 폭락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2조 3,000억 달러의 주가가 증발했다고 알려졌는데, 한국 돈으로는 3,000조 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한국 증시도 이 여파를 피해갈 수 없어, 코스피는 장중 1,900선이 붕괴되었고, 코스닥은 사이드카가 발동되었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의 시가 총액만 무려 60조 원이 증발했습니다.]
강남 고속터미널 승강장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승차할 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주가 하락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일은 아니다.
[한편, 미국에서 활동 중인 투자자 강유진 씨는 미리부터 브렉시트 찬성 결과에 거액을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욕데일리뉴스에 따르면 이번 투자로 약 1조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한 무리의 장년 남자들이 그걸 보다가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게 운으로 될 일이야? 하루에 천조를 벌었다는데.”
“천조가 말이 돼?”
“안 될 건 또 어디 있어. 미국 신문사에서 보도했다잖아.”
“미국 신문이라고 다 진짜래?”
“그럼 미국 신문이 한국 신문처럼 거짓 보도나 하고 그러는 줄 알아? 미국이 얼마나 무서운 나라인데. 오보 한 번 내면 소송으로 아주 회사가 망한다고.”
“한국 언론도 그래야 돼. 지들 마음대로 기사 내고 책임도 안 지는 꼴을 보라고.”
사람들은 어느새 한국의 언론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비판의 근거는 그다지 정합하지 않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한국 언론에 대한 반감은 상당했다.
그러는 사이, 뉴스는 새로운 꼭지로 바뀌었다.
이번에도 유진에 대한 보도였다.
[새로운 소식에 따르면 강유진 씨는 뉴욕데일리뉴스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미국 최초의 타블로이드 일간지인 뉴욕데일리뉴스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기도 했었지만, 인터넷 시대로 넘어오며 판매 부수와 광고 수입이 악화되어 신문사의 매각을 추진해 왔었다고 합니다. 이에 세계 제일의 거부로 알려진 한국인 강유진 씨가 전통의 뉴욕데일리뉴스를 인수해서 다시 예전과 같은 영광의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고 합니다.]
다소 뜬금없는 소식에 뉴스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화면에 나오는 유진의 사진을 노려보는 한 여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조용하게 뉴스를 보던 여자는 유진의 기사가 끝나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를 타기 위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 여자 뒤를 검은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뒤따라 가는 것에는 누구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뉴욕데일리뉴스를 인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꽤 능력 있는 기자들이 모여 있는 것 같더라고.”
유진은 결코 보복을 위해 뉴욕데일리뉴스를 인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황색언론이라고 해도 능력이 있는 것은 맞지요. 며칠 만에 보스가 1조 달러 사나이로 완전히 굳어져 버렸으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언론이 몇 개쯤 있어야겠어.”
유진에게 필요한 언론이란 정확한 내용을 심층 취재해서 진실을 밝혀 주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보단 원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번 일로 포브스지나,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신문사보다 타블로이드지가 훨씬 더 파급력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뉴욕데일리뉴스 인수는 충분한 값어치를 할 것이라 믿었다.
세계의 뉴스는 모두 뉴욕에서 시작되고, 뉴욕에서 가장 선정적인 신문을 손에 넣으면 여론전을 펼치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도 매물로 나오는 신문사나 방송사는 전부 손에 넣도록 하지.”
“뉴스 그룹이라도 만드실 생각이신가요?”
“뉴스 그룹 하나 정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물론 그렇기는 하지요. 여러모로 말이에요.”
요안나도 바로 납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