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인의 장벽
7월에 들어서며 브렉시트로 타격을 받았던 각국의 증시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바닥을 모르고 횡보하고 있는 파운드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통화들도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브렉시트에 대한 유진의 투자가 거의 마무리되어 갔다.
“통화 시장에서 모두 1,671억 달러의 수익, 그리고 주식 시장과 기타 상품에서 1,482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요안나가 뿌듯한 얼굴로 보고했다.
“그럼 총 3,153억 달러인가?”
세간에 알려진 1조 달러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익이다. 하지만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에 얻어 낸 수익으로는 기록적인 액수였다.
이제 4,0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새로운 투자를 위해 준비되었다.
“파운드화 선물에 넣어 둔 100억 달러를 제외하고는 전부 엑시트했습니다. 그리고 지시하신 대로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AMD 주식 매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분간은 대단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2020년대 초까지 꾸준하게 올라 줄 IT 대장주들에 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당분간 가장 수익이 좋을 넷플릭스 주식은 이미 넘칠 만큼 보유하고 있었고, 테슬라는 아직 적기가 오지 않았다.
유진은 일정 부분만을 남겨 두고는 가용 자원 대부분을 주식에 넣도록 지시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다른 금융기관을 이용해 레버리지를 받아 투자를 진행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투자하는 금액은 투입 금액을 훌쩍 넘어선다.
이번에는 약 세 배에 해당하는 레버리지를 사용했다.
한데 그러자니 투자 액수가 너무 커서 IT 대장주만으로는 전부 소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스닥, 다우존스, 그리고 S&P 500에도 남은 자금을 투입하도록 해야 했다.
“1조 달러라는 말이 이젠 거짓이 아니게 됐어요. 관리자산으로 보면 1조 달러가 넘어가요.”
금융기관에서 관리 중인 자산(펀드)은 자본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AUM(Asset Under Management)으로 계산된다.
요안나의 말대로 유진 오피스의 관리자산은 1조 달러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자산이 아닌 실질 자산이 1조 달러를 넘어설 날도 그리 멀지는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여기에 역사적인 붐이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온 암호화폐는 포함되지 않았다.
“연구 센터 설립에 박차를 가해야겠어.”
외부적으로 알려질 싱크탱크 설립 목적은 세계의 석학들을 모아, 인류의 미래에 이바지할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진의 막대한 부를 지키기 위해서라 보아야 한다.
좀 더 많은 파워를 지닌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싱크탱크만 한 것이 없다.
현재 다양한 통로를 이용해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인사들도 가리지 않고 접촉하는 중이다.
거기에는 아직 정계에 입문하지 않은 변호사들과 각 주의 검사장 출신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정계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런 법률가 출신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영입해서 연구 센터에 자리를 만들어 주고,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한편으로는 유진의 투자에 참여할 기회를 제시한다.
고용된 사람들과 일종의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정관계의 고위 인사들에게 그들이 현직에서 물러날 때 유진의 연구 센터에서 엄청난 액수의 보수를 받으며 다음 임기까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직 관료나 정치인들도 각자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유진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들이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이익에도 문제가 되는 셈이다.
전직 장관급에는 최하 100만 달러에서 최고 1,000만 달러까지의 연봉을 고려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다른 기관에 종사하며 받을 수 있는 액수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이다.
유진이 지불하는 액수가 크면 클수록 유진의 경제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참여할 사람들이 유진에게 도움이 되거나, 혹은 적어도 해를 끼칠 생각이 나지 않게 되리라는 기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은 1년 예산으로 5억 달러를 생각하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최하 10억 달러에서 그 이상도 상관없고.”
하지만 유진이 지닌 자산에 비하면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한 해에 겨우 10억 달러 수준의 자금으로 유진을 보호해 줄 경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거저나 다름없다.
“일개 싱크탱크에 투입되기에는 상당한 액수로군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씽크탱크로 알려진 브루킹스 연구소의 1년 예산이 1억 달러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수 계열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헤리티지 재단 역시 그보다 조금 더 적은 예산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진이 출범시키기로 한 연구소의 예산은 미국 상위 10대 연구소의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오히려 많은 정도였다.
더군다나 더욱 큰 매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욱 확실해지는 유진의 투자에 끼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FI 펀드의 규모가 FO 펀드의 규모보다 커지겠군요.”
FO 펀드는 현재 진행 중인, 트럼프와 영국 여왕 등 각국의 정상을 위한 펀드이고, FI 펀드는 유진의 오피스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앞으로 설립될 연구 센터에 몸을 담은 사람들이 투자할 수 있는 펀드이다.
사실 다른 헤지펀드나 자산운용사에서 외부 자금을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익을 올리기 위한 것이지만, 유진의 경우는 반대로 자신이 얻을 수익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는 투자라기보다는 혜택에 가깝고, 당연히 내부적으로 마련한 등급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액수가 제한되어 있다. 여러모로 일반적인 금융회사와는 정반대의 시스템이다.
“FI 펀드의 규모와 FO 펀드 모두 최대 100억 달러 수준으로 제한할 생각이야.”
물론 유진은 자신의 이익을 마구 나누어 줄 생각은 아니다. 그가 투자하는 액수의 아주 일부분만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신 윌리엄의 자산운용사에도 조금은 문호를 개방하도록 하지.”
윌리엄의 자산운용사도 일반 투자기관에 비하면 말도 안 될 정도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단지 유진의 투자를 따라오며 유진의 투자 수익을 확고하게 해줄 뿐인데도 그렇다.
그렇게 유진의 경제 공동체, 즉 유진의 금융 제국의 탄탄한 기반이 되어 줄 인의 장벽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업무의 일환으로 전 법무부 장관인 에릭의 소개를 통해 또 다른 거물 인사를 만났다.
“브레넌 씨를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나야말로 반갑소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난 서슴지 않고 유진 강을 첫손가락에 올릴 겁니다.”
매처럼 날카로운 코가 인상적인 장년의 백인 사내가 매서운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다고는 하지만 결코 호의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눈이었다.
“에릭에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투자 정보 센터를 만들고 있다지요?”
브레넌은 다른 인사들과 달리 구차한 잡담 따윈 건너뛰고 바로 안건을 거론했다.
“우리 회사에서 운용하는 자산의 규모가 커진 만큼, 다양한 정보를 획득해야 할 필요를 느껴서요.”
“유진 강의 투자 실적을 보면 구태여 그런 게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야 늘 운이 따라주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다른 모든 일이 그러하듯, 투자에도 될 수 있다면 정확한 정보가 많을수록 도움이 되지요. LTCM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에요.”
“하긴, 그렇기는 하지요. 롱텀캐피탈이 러시아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브레넌이 유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기 적합한 사람을 찾다 보니, 모두 파네타 씨를 추천하더군요.”
존 오웬 브레넌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CIA를 총괄해온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국장 자리를 맡게 된 다른 역대 CIA 국장들과 달리 브레넌은 CIA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며 근동 및 남아시아 분석가, 사우디아라비아 기지 국장, 국립 대테러 센터 소장으로 일해 온 진짜 전문가 출신이다.
그러니 정보 계통에서는 가장 파워 있고, 가장 경험 많은 인사이다.
“솔직히 말해 난 유진 강이 어떤 목적으로 그런 기관을 만들려는지 알 수 없어요.”
“아마도 내가 아직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물론이오. 유진 강이 미국에 도움이 될 사람인지, 아니면 반대인지 알고 싶어 이 자리에 나올 것을 승낙한 것이오.”
유진이 알기로 이 남자는 진짜 애국자였다.
“아직은 시민이 되지 못했지만, 조만간 미국의 시민으로 책임을 다할 겁니다. 미국과 세계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거고요.”
“물론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는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 번 옆에서 지켜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헤이든 씨에게 새로운 정보 센터의 전권을 맡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결코 어떤 식으로든 불법적인 요구를 할 생각은 없고, 정보를 획득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정략적인 요구를 할 생각도 없습니다. 아마 내가 무언가 비애국적인 행위를 저지른다면 그걸 가장 먼저 알게 되는 사람은 브레넌 씨가 될 겁니다.”
유진은 애국자인 브레넌에게는 그에 걸맞은 조건을 내걸었다.
“만일 당신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내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소.”
생각보다 쉽게 브레넌은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직 경제적인 조건은 언급도 하기 전의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에릭을 통해 어느 정도의 언질은 받았을 것이다.
마침 얼마 전 CIA 국장 자리에서 물러난 브레넌에게 유진의 제안은 무척 매력적일 것이다.
그렇게 유진은 투자 이외의 분야에서 자신을 돕고, 또 지켜 줄 두 가지 기관의 설립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 뉴스 봤어?
새벽부터 걸려온 전화에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받아보니, 세종 홍보의 철우가 황급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뉴스? 무슨 뉴스?”
“그 여자 말이야. 습격을 당했나 봐.”
철우는 명확하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유진은 바로 누굴 지칭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
“어제저녁이라더군.”
“상태는?”
유진은 언뜻 그녀의 자작극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물어보았다.
“조금 심각한 모양이야. 배와 옆구리를 찔렸는데, 중태라고 하네.”
단순한 자작극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유진으로서는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어쩌면 거짓 보도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계획이 어그러진 것일 수도 있다.
과거로 돌아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기에, 유진은 이제 될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상관하지도, 아예 생각하지도 않으려 했었다.
새로운 삶을 단순히 지난번 삶의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번 법정에서 그녀의 몰염치함을 온 세상에 알린 것으로 유진은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대양과의 일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유진이 그리고 있는 미래를 위한 디딤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그녀와의 악연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이걸로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범인은?”
“아직 검거하지 못한 모양이야.”
“누굴지 짐작도 못 하고 있고?”
“어. 그런 모양이야.”
“대양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 질문은 철우에게 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한 질문에 가까웠다.
그녀에게 원한이 있을 사람이라면 역시 그 녀석들밖에 없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철우가 여전히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