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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89화 (89/363)

89화 호의와 보답

“마치 선생님 같으시네요.”

한정아가 살짝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랬던가요? 조금 실례가 많았군요.”

“아뇨. 정말로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아무도 저한테 이렇게까지 말해 준 적은 없으니까요. 아버지나 오빠들도 원론적인 이야기만 해 줄 뿐이고, 회사 임원들이야 뭐…….”

회장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막내딸에게 쓴소리할 만큼 간 큰 임원 따위 있을 리 없다.

“어쩐지 회사에 다닐 때 제 후배들 생각이 나서 그랬나 봅니다.”

“유진 씨 후배로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옆에서 있는 것만으로 배울 게 만을 거 같아요.”

“가르쳐 드릴 건 없지만,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최대한 도와드리지요.”

“정말이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유진 씨한테 여쭤볼 거예요.”

“물론이죠. KF엔터 대표님께 조언할 기회가 있다면 오히려 영광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가네요. 그러면 저희 KF엔터와 협력 관계를 맺어 주실 거죠?”

금세 태도를 바꿔 사근사근하게 구는 것을 보면, 재벌 3세라고 마냥 철없이 자란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미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영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유진이 알기로 그녀는 꽤 능력 있는 경영자였다.

아니, 앞으로 그렇게 될 예정이다.

제일 그룹의 회장은 모두 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 아들, 딸, 아들, 딸.

당연히 첫째 아들이 그룹 최대 계열사인 전자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은 전자 다음으로 비중 높은 중공업을 맡고 있다.

막내딸인 KF엔터의 한정아는 그룹에서는 비주력 계열사에 해당하는 엔터 부분을 맡고 있다.

그리고 장녀는 패션과 광고 부분을 맡고 있는데, 막내인 한정아가 맡은 엔터와 마찬가지로 제일 그룹 내부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이 있지는 않다.

사람들은 현 회장이 물러난 다음에는 첫째가 전자와 금융을 물려받고, 둘째 아들이 중공업과 자동차를 가지고 분가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제일 그룹이라고 경영 분쟁의 소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지금의 회장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건강을 잃으면서부터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경영권을 둔 분쟁이 시작된다.

그 분쟁에는 두 형제뿐 아니라 대권의 자리에서 처음부터 밀려나 있던 두 딸, 그리고 지난 세대의 경영권 분쟁에서 패해 밀려나 있지만, 약간씩이나마 그룹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현 회장의 형제자매들도 끼어들어 난장판이 벌어진다.

결과적으로 분란의 승자가 되는 것은 경영 능력보다는 정치적으로 능수능란한 첫째가 된다.

그리고 거기서 나름 수완을 발휘하게 될 이 여자 또한 적지 않은 득을 보고, 첫째 다음으로 큰 지분을 얻어 낸다.

어찌 보면 막내로 그룹에서 가장 소외되기 쉬웠던 그녀가 전자와 중공업 다음으로 중요한 금융 계열사를 장악하고, 엔터와 기타 주요 계열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승리자는 그녀일지도 모른다.

“한정아 대표가 동의하신다면 동반자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좋아요. 그럼 각론에 대해서는 실무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도 좀 더 서로에 대해 알아보면 좋겠어요.”

한정아는 유진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그럴까요?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으시면 식사라도 같이하실까요?”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진 씨의 초대인데요.”

“맨해튼은 잘 알고 계시지요? 여기서 유학을 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기는 한데, 몇 년 만에 오는 거라서 이젠 조금 낯설어요. 유진 씨가 에스코트 해 주실 거죠?”

“물론이죠. 그럼 저녁 때 뵙도록 하지요.”

“그럼 호텔에 가서 조금 쉬어야겠어요. 사실 공항에 도착하고 여기로 바로 오느라 조금 피곤해요.”

그날 저녁 유진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언제고 꼭 저희 아버지 한 번 만나보세요. 아버지가 진짜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그렇게 하죠. 다음에 한국에 들어가면 꼭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제일 그룹 회장이 유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어쩐지 귀국하기가 싫네요. 유진 씨한테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은데 말이에요.”

“가르쳐 드릴 건 없지만, 언제고 오시면 시간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정말이죠? 아무래도 뉴욕에 자주 놀러와야 할까 봐요.”

한정아는 정말로 서운한 모습으로 작별을 고하고 한국으로 떠났다. 유진은 어쩐지 그녀를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KF엔터의 한정아가 돌아가고 나서 며칠 뒤, 또 다른 귀빈의 방문을 받았다.

“자네가 좀처럼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니, 얼굴을 보기 힘들구만.”

다산전자 김수호 사장이 거구의 몸을 안락한 소파에 묻으며 말했다.

“여기 일이 바빠서 말이지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지난 1년 동안도 참 엄청난 일들을 해냈더군. 이젠 기사에서 자네 이름을 볼 때마다 미리 놀랄 준비를 한단 말이야. 또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해서. 흐흐.”

“다산전자도 지난 1년 동안 꽤 선전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중국 공장을 확장할 생각이라면서요?”

“그래. 그쪽 정권에서 자꾸 그런 요구를 하고 있어서 말이야. 사실 확장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고. 중국 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계속 중국에 매달리기도 불안하고.”

김수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유진이 말을 꺼냈다.

“제 생각을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자네가 하는 말이라면 내 뭐든지 들을 생각이 있네. 솔직히 우리가 자네 덕을 본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중국 공장은 보류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앞을 보면 말이에요.”

“앞을 보면이라……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중국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미국과의 분쟁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지요. 이제 미국 국내에서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던 미중 분쟁은 틀림없이 거세게 타오를 겁니다.”

김수호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느낌은 받고 있네.”

“그리고 그런 분쟁의 시작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제 분쟁으로 시작될 겁니다. 미국은 중국 수출에 브레이크를 걸려 할 것이고, 아마도 첨단 산업이 그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번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분쟁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80년대 일본 반도체는 저평가된 환율을 무기로 전 세계 시장을 마구잡이로 집어삼켰고,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엔 미국 정부가 칼을 빼 들었고, 일본산 반도체에 대한 덤핑 제소와 더불어 일본 정부에도 다양한 압력을 넣었다.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관련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일본 반도체 업계는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의 영향으로 기회를 엿보던 한국의 반도체는 크게 성장했고,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미국이 아닌 한국의 제일전자와 다산전자였다.

당연히 다산전자 사장이 이 일을 모를 리 없다.

“음…… 그렇게까지 일이 흘러갈까?”

“그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새로운 미국 행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무언가 강한 액션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전쟁 같은 물리적 충돌을 획책할 이유는 없으니, 아마도 무역 분쟁이겠지요.”

“자네 말은 그러니 괜히 중간에 끼어들어 피를 볼 필요는 없다는 거로군.”

“네. 중국 정부에서 투자를 원한다면 그런 흉내야 보여 줄 수 있지만, 다음 행정부가 정해질 때까지는 최대한 지연을 시켜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가 한국 반도체 업체의 중국 투자에 제동을 거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언제고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흠…… 맞는 말이긴 하지. 고민은 좀 해 봐야겠군. 여하튼 자네는 만날 때마다 하나씩 큰 선물을 주는군.”

유진이 미국 정관계에 적지 않은 인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다산전자 사장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 그의 말이 단순한 조언으로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물이라기에는 그저 작은 우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아니야. 정말로 늘 도움만 받아 왔어. 이번엔 뭘로 보답을 해야 하나?”

유난히 호들갑스레 보답을 말하는 것은 유진의 말이 정말 그만큼 커다란 가치가 있다기 보다는, 그와 좀 더 돈돈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저희 부친 회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셨지 않습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유진도 상대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상대의 작은 도움을 부풀려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참. 그래서 이번에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기로 했다고?”

다산전자 사장이 뉴욕까지 날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네. 협상이 막바지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 인수하는 주체는 우리 쪽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대양에서 자네가 인수한다는 걸 알면 그걸 반기겠나?”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이 인수에 관련되어 있다면 필사적으로 반발을 했을 것이다.

물론 프리스케일 매각의 키를 쥔 쪽은 블랙스톤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만들었을 것이고, 인수를 완전히 방해하지는 못해도 시간을 끌 수는 있었을 것이다.

“지금 사모펀드인 노이베르거 베르만에서 협상 중입니다.”

“그쪽도 꽤 큰 사모펀드이지?”

“30년대에 창업한 전통 있는 사모펀드입니다.”

유진은 자신 대신 인수의 주체가 되어 줄 곳으로 미국 사모펀드 수위권에 있는 업체 중 가장 전통 있는 곳을 선택했다.

대양 그룹 쪽에서 눈치채기 어렵게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잘했군. 얼마에 인수하기로 했나?”

“100억 달러가 될 것 같습니다.”

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은 그보다 10억 달러 정도 싸게 손에 넣을 가능성이 있지만, 굳이 그것까지 말해 줄 이유는 없다.

“어떻습니까? 관심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지. 대양이 손에 넣으려던 프리스케일을 우리가 가져오면 그 노인네 혈압이 올라 쓰러질지도 몰라. 하하하!”

김수호 사장은 그 몸집에 어울리게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단지 쓸 만한 상품인지는 알아야겠어. 말레이시아 테러 여파가 이젠 해결된 건가?”

“완벽하게 해결되려면 아직도 적지 않은 투자가 필요할 겁니다. 적어도 40억 달러는 들어가겠지요. 블랙스톤에서 빨리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게 그 때문이지요. 다시 40억 달러를 투자하는 편보다 최대한 빨리 털어 버리는 편이 낫겠다 싶은 모양입니다.”

“흠. 40억 달러면 되려나?”

“우리 쪽 판단은 그렇습니다.”

“140억 달러라면 나쁘지 않지.”

본래 대양이 인수하려던 가격이 286억 달러였다. 시간과 공이 들어가도 140억 달러라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조건이다.

더군다나 자동차 산업과 반도체 산업을 병행하는 다산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기회였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그만한 여유가 없는데 말이야. 자네 회사와 공동 투자를 하건 우리가 전부 인수를 하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텐데, 내년까지는 여력이 없어. 이미 투자 계획이 잡힌 게 너무 많아서.”

“그거야 서로 합의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우선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말씀을 듣고 싶군요.”

“역시 진짜 부자는 다르군.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완전히 인수해서 시너지를 높이는 쪽이 좋지.”

“그떄도 말씀드렸지만 될 수 있으면 다산 쪽에 편의를 보아 드리고 싶군요. 단순히 채권도 괜찮고, BW도 괜찮습니다. CB도 나쁘지 않고요.”

“고맙군. 우리 쪽에서 부담이 많이 줄겠어.”

“상세 조건은 서로 합의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각각의 조건에 따라 가격도 이자도 바뀌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하지. 자네가 호의를 보여 주는데.”

다산 그룹도 유진이 프리스케일을 내놓는 것이 단순한 호의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대양 그룹을 궁지로 몰기 위해서였다.

하나 그렇다고 유진에게 선택지가 다산전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일 그룹 또한 전자와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산보다 제일 쪽이 오히려 대양에는 더 위협적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지만,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각자의 득실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후로 이어진 협상은 큰 막힘 없이 잘 이루어졌다.

서로의 목적이 상당 부분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럼 올해가 가기 전에 다산전자가 프리스케일을 완전히 인수한다는 것을 발표하지.”

프리스케일 인수는 다산전자는 물론이고 다산자동차 주가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대양 그룹에게는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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