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여론의 행방
“노이베르거 베르만 쪽에서 프리스케일 인수에 합의를 보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산전자 사장과 의견을 나누고 며칠 만에 바로 원하던 소식이 들어왔다.
“최종 합의 금액은 89억 6천만 달러입니다. 노이베르거 베르만이 꽤 힘을 쓴 모양입니다.”
물론 그쪽에서 얻어갈 수수료 때문이지만, 어찌 됐든 유진에게는 흡족한 결과였다.
“잘됐네. 그럼 다산전자와 협상에 들어가도록 주문하지.”
어디까지나 이번 일의 주체는 유진이 아닌 사모펀드 노이베르거 베르만이다.
노이베르거 베르만이 블랙스톤으로부터 프리스케일을 사서, 다시 다산전자에 넘기는 식이 될 것이다.
유진은 다산이 프리스케일을 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하고, 그 대가로 다산전자에 대한 채권과 전환사채를 받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유진이 대략 140억 달러 정도를 내놓고, 다산전자에 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금리를 양보하고 CB와 BW를 최대한 확보하는 쪽으로 해. 다산 쪽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140억 달러나 되는 부채는 대기업인 다산전자에도 큰 부담이 된다.
당연히 금리 부담을 낮추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전환사채를 원할 것이고, 그건 그만큼 유진이 다산전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진으로서도 다시 다산전자의 회사채를 담보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니, 크게 자금이 묶일 부담은 없다.
“그리고 추가로 다산전자 주식 매집에도 힘쓰고. 다산자동차도 물론이고.”
대양 그룹을 제치고 프리스케일을 인수한다는 소식이 발표되면 다산 그룹 계열사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이 올 것은 확정적이나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몇 년 안으로 국내 양대 반도체 생산 기업인 다산전자와 제일전자의 주가가 미국의 IT 대장주들에 못지않게 상승할 것을 알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이번에도 블랙록을 통해서 할까요?”
다산 그룹 계열사 주식에 대한 매집은 월스트리트의 다른 투자 기관을 통한 간접적인 매입이 될 것이다.
“아니. 다른 루트를 알아보도록 하지. 믿을 만한 곳 서너 곳으로 추려서 진행해.”
블랙록에서 느닷없이 다산 그룹 주식에 대한 매수를 시작하면 상대가 경각심을 가질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블랙록과 유진의 관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유진과 다산이 밀월관계에 있다 해도, 유진이 자사주를 잔뜩 들고 있다면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 뉴스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연락 기다릴게.
모니카와 다산 그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국의 철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유진은 바로 TV를 켜고 한국 뉴스 채널로 돌렸다.
[한모 씨를 습격했던 범인이 자수해 왔습니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는 것에 압박을 느껴 왔던 범인은 이날 오전 동부 경찰서에 자수 의사를 밝히고, 오후에 스스로 출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평소 미국의 저명한 투자자인 강모 씨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그가 한모 씨로부터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한 것에 분노를 표시해 왔다고 합니다.]
“이거 곤란하게 된 거 맞죠?”
이제 제법 한국말에 익숙해진 요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글쎄. 딱히 그럴 것까지야.”
하지만 유진은 그다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물론 유진에게 유리한 상황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어. 나야. 그래. 확실한 거야?”
- 지금 확인 중이야. 적어도 범인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맞는 모양이야.
“대책은?”
- 뭐. 우선은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봐야겠지만, 꼭 나쁘지만은 않아. 어쨌든 대양 그룹이 다시 논란에 서게 된 상황이니까.
논란에 서게 된 것은 이번에는 유진 쪽이지만, 활용하기 나름이다.
“그래. 신경 안 쓸 테니, 그쪽에서 처리해 줘.”
- 알았어. 문제가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 * *
“프리스케일을 그렇게라도 처분하게 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미국 쪽에서 거기 들어가는 금융비용 때문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됐었는데. 그룹 사정도 좋지 않은데, 그 비용까지 나가는 건 조금 아까운 게 아니란 말이지.”
다시 한번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 대양 그룹 회장의 장남과 차남은 대양 그룹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크게 기력이 약해진 회장은 요사이 가족 간의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룹의 중요한 문제는 거의 형제들이 직접 처리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셋째인 류근수 대양중공업 사장도 함께해야 했을 자리였다.
하지만 회장 비서실장으로부터 셋째가 당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라는 언질을 받은 참이라, 두 형제는 잘되었다며 셋째에게 중공업 사장에서 물러나도록 압박해 오던 참이었다.
“흠…… 이건 잘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장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요? 여론이 이제 대양 그룹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녀석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어 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게 되려나? 녀석하고 범인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밝혀진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아요? 그렇게 몰고 가면 그만이지.”
그는 여론의 행방이란 실제로는 대중에 의해 자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한 대로 이끌어 내는 것이라 믿고 있기에 적당한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몰아갈 수 있다 믿고 있었다.
“그래. 여하튼 다행이로군. 적어도 우리 대양에 대한 의심은 거둬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근수가 이 뉴스를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는데요.”
둘째 류근일은 다음 달에 중공업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한 셋째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지. 지금까지 그룹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데.”
장남도 그건 꺼림칙하다.
“다시 한번 근수한테 못을 박아야겠어요.”
“그렇게 하지. 내가 아버님께 다시 말씀을 드려 보지.”
두 형제에게 셋째의 중공업 사장 사퇴는 단순히 이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뿐 아니라, 크게는 대양 그룹 차기 수장 자리를 둔 형제간의 경쟁에서 탈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솔직하게 맞는 말이지. 그 여자 너무 뻔뻔하잖아? 결혼할 사람을 그렇게 배신하고 집안까지 망치려 한 거 아냐?
- 무슨 소리야? 그 여자도 억지로 성적 피해를 입어서 강제로 그렇게 했다잖아? 여자가 무슨 죄가 있는데?
갑자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막 남녀 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 죄가 없기는 왜 없어? 적어도 결혼할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지.
- 죄는 그 여자를 성폭행하고 협박한 남자한테 있지.
인터넷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갈라져 험악한 표현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양 그룹이었다.
유진이야 어찌 보든 피해자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고, 전 약혼녀 쪽은 억지로라도 옹호할 여지가 있었지만, 대양 그룹의 행위는 그 누구에게도 조금도 옹호 받을 여지가 없었다.
대양 그룹 홍보실에서 인터넷 여론을 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조금의 효과도 보지 못했다.
범인이 잡히는 바람에 그나마 잠잠해지던 비난 여론이 다시 불길처럼 일어나며 대양 그룹의 주가는 다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보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논평을 부탁하는 한국 언론들의 요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미국 쪽 홍보 담당자인 모니카와 한국의 세종홍보를 통해 수많은 요청이 들어왔다.
“논평 같은 거 낼 생각 없으니까 무시해.”
양쪽 모두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괜히 논란의 중심에 설 이유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다음 달에 예정된 다산전자의 프리스케일 인수를 앞당기도록 하지.”
유진은 차라리 이 사태를 대양 그룹을 압박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다산전자 측에서도 유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대양 그룹의 침몰은 다산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인텔 쪽과는 이야기가 잘 되고 있어?”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유진은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더 신경을 쓰기로 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어요. 적당한 가격이라면 ASML 지분을 넘기겠다는군요.”
ASML은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제작기업으로, 특히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공급업체로 성장하게 될 회사이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시장 점유율이 90%에 달할 기술을 가진 회사이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기술력은 인정받았으나 양산 단계에서 활용될지는 검증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2012년 ASML은 제일전자와 인텔, 그리고 TSMC에 자사 지분 25%를 내놓았다. EUV 노광장비 연구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충하기 위해서였다.
또 장비의 주요 고객이 될 3사에 자사의 지분을 내놓는 것으로 향후 개발이 완료되면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려는 방안이기도 했다.
당시 인텔은 ASML 주식의 15%를, TSMC는 5%를, 그리고 제일전자는 3%를 확보했다.
이때 들어온 자금은 7나노 공정에 핵심이 될 EUV 노광장비 개발에 사용되었고, 최근 개발된 장비는 이제 막 제일전자에 한 대가 팔려나간 것이 전부다.
미래의 가치는 무궁하다고 보이지만, 해당 장비를 사용해 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업체가 세 곳뿐이고, 또 그 업체들마저 아직 생산에 필요한 기술이 완료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제일전자 측에서는 2년 뒤쯤 7나노 공정의 생산을 시작할 예정에 있었고, 14나노 공정까지 최첨단 기술을 가장 먼저 선보였던 인텔의 경우 미세공정 전환 속도를 늦추면서 ASML의 최신 장비 도입이 언제나 가능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적당한 가격이 어느 정도지?”
지난 4년 동안 ASML의 주가는 약 80%가량 오른 상태다.
“적어도 50% 프리미엄은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협상을 통해 최대한 낮춰 보려 하고 있어요.”
인텔로서는 당장 자신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향후 5년 뒤 ASML의 주가가 얼마나 오를지 알게 되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것이다.
인텔이 이러한 전략을 취하는 것은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AMD가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인텔로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되는 설계 비용을 대는 것이나 대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장비의 구매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전자 쪽도 적당한 시기에 자금 회수를 하려는 모양이더군요.”
이미 TSMC는 지난해에 ASML의 지분을 전량 매각해 버렸다.
3년 동안 약 60%에 달하는 수익을 얻었으니 만족할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은 마찬가지다.
제일전자 또한 비슷한 사정이다. 7,000억 원에 매수한 3% 중 일부를 팔아 수익을 내려 한다고 한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항상 앞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알게해 주는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들 당사자가 ASML의 주요 고객이니 수요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유진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기 아까웠다.
“프리미엄은 얼마가 되든 상관없어. 달라는 대로 주고 전부 넘겨받아.”
“알겠습니다. 제일전자 쪽은 어떻게 할까요?”
“그쪽도 마찬가지야. 최대한 달라는 대로 주고 전부 매입해.”
유진은 시중에 나와 있는 ASML 주식은 전부 매집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요안나로부터 의외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제일전자에서 ASML 지분 매각에 관련해서 보스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군요.”
“제일전자에서? 누가? 사장이?”
“아니요. 제일전자 부사장이 한 번 방문하겠다는군요.”
“흐음…….”
제일전자 부사장은 얼마 전 만남을 가졌던 KF엔터 대표의 오빠이자 제일 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유진은 어째서 이런 일로 자신을 보자고 한 건지 궁금해졌다.
“알았어. 그러면 한 번 시간을 잡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만나지 못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