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거래와 제안
“82억 달러에 인텔이 가진 지분을 전량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요안나는 유진이 요구한 금액보다 조금 낮은 금액으로 인텔의 ASML지분 인수에 성공했다.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이번 거래로 인텔은 4년 만에 2.5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으니 주주들이 반길 것은 당연하고, 경영진 또한 당분간 주주들의 간섭없이 안정적인 경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진으로서는 겨우 80억 달러로 향후 4년 안에 적어도 다섯 배 이상 성장할 기업의 지분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지분 가치의 상승으로 얻게 될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에서 슈퍼 갑의 위치에 서게 될 ASML을 손에 넣을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캐피탈 월드 지분 1.6%도 넘겨받기로 했어요.”
인텔에서만 ASML 지분을 매수하는 것은 아니다.
ASML의 지분은 다양한 투자회사에 나누어져 있었고, 요안나는 그런 투자회사들과 접촉해서 적절한 가격을 제시해 조금씩 모으고 있었다.
“HN인더스트리 지분 7%도 매수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주문해 놓았던 몇몇 기업 지분 매수도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더욱 놀랍군요. 강 대표님 잘생긴 건 알고 있었지만 실물이 훨씬 낫네요.”
처음 만난 제일전자 부사장은 대뜸 유진의 외모부터 칭찬한다.
“그렇게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남자에게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난처해 유진은 이마에 땀이 날 듯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정아가 유진 씨 칭찬을 워낙 많이 해서 말이에요. 머리도 아주 스마트한데, 외모는 더하다고 몇 번을 말하던지 말이에요. 하하, 정말 우리 정아가 반할 만하겠어요.”
“한정아 씨한테는 저도 무척 감탄했습니다.”
자기 여동생을 끌어들여 말하니 조금 어색하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렇게 당황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참, 어때요? 우리 정아? 아주 이쁘죠?”
“물론이죠. 굉장히 능력 있는 경영자셨습니다. 앞으로가 아주 기대되는 분이셨죠.”
“아니. 그거 말고요. 여자로 어떠냐고요. 두 사람 다 한창 좋을 나이 아니에요.”
“하긴 그렇군요.”
“내가 너무 나갔나? 실례였다면 미안해요. 사실 정아가 내 동생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있다보니 어떨 때는 딸처럼 느껴져서 말이에요.”
제일 그룹 회장의 장남인 한정훈과 막내인 정아는 무려 16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괜찮습니다. 정아 씨와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솔직히 유진은 이 남자가 정말로 자신과 한정아 사이에 어떤 연애 감정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유진은 그가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경영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정치력은 대단한 사람이다.
부친에게 제일 그룹을 물려받기 위해 벌써 20년이 넘게 경영 수업을 받아오는 동안 한정훈은 적지 않은 사업에 발을 들였다.
후계자로서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실적을 만들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한정훈이 투자한 수많은 사업은 거의 실패로 돌아갔고, 그동안의 손해는 대개 그룹 계열사들이 나누어 책임을 져 왔다.
그에 비해 차남은 그리 대단한 성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규모의 사업과 투자를 몇 번은 성공시켜 왔다.
이 시점에서 제일 그룹의 후계 구도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지금 유진의 앞에 있는 이 남자이다.
단지 부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후일 밝혀지기로는 부친은 오히려 차남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초대 회장에게 물려받은 제일 그룹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일구어 낸 현 회장으로서는 그룹의 경쟁력을 위해서 능력 있는 아들에게 물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 한정훈이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정치력 때문이다.
다른 가족들의 지지를 얻어 내고, 제일 그룹 주력 기업인 제일전자 경영진의 지지도 얻어 냈다.
그리고 회장이 되어서도 그 특유의 정치력으로 사업상으로는 몇 번의 삽질을 하면서도 경영진들을 확실하게 손아귀에 넣고 안정적인 경영을 이어 갔다.
그의 결정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경영진이 갈려 나갔지만, 한정훈은 늘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참! ASML 지분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했죠?”
“네. 제일전자에서도 3% 정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해 주시면 과하지만 않다면 인수 의사가 있습니다.”
“ASML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인텔 지분도 넘겨받기로 하셨다더군요.”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완전히 인수하실 생각인가요? 다른 곳과도 접촉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정훈이 ASML의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ASML의 신 장비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ASML 장비를 구매한 것이 제일전자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는 ASML이 단순히 장비를 납품하는 을을 넘어서 반도체 산업계의 지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인수는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이라서요. 적정한 수준의 지분을 보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입니다.”
물론 유진이 생각하는 적정한 수준은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제일전자 부사장을 만나기 전까지 확보한 ASML의 지분은 인텔의 15%를 비롯해 모두 21%에 달한다.
그리고 제일전자의 지분을 포함해 앞으로 최소 지금 가진 정도만큼은 모을 생각이다.
ASML의 확실한 지배주주가 되는 것이 유진의 목표였다.
“ASML 지분을 넘겨 드리는 거야 아무 문제도 없지요. 가격도 서로 의사만 맞으면 크게 상관없지 않겠어요?”
유진은 어쩐지 상대가 꽤 능글맞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것은 가격이 아니라 다른 건데요.”
“뭘 원하시나요?”
“프리스케일을 손에 넣으셨다고 들었어요.”
한 부사장의 말에 유진은 살짝 놀랐다.
제일 그룹의 정보력이 한국 제일이라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어디에서 흘러나갔을까? 유진은 자신의 오피스는 아닐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노이베르거 베르만도 아니다.
제일 그룹이 맨해튼에까지 그런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하나뿐이다.
“그거 우리한테 넘겨 줄 수 있어요? 가격은 충분하게 쳐 드리죠.”
한 부사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프리스케일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곳이 꼭 다산전자뿐인 것은 아닐 터다.
반도체 기업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제일전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확실히 제일과 프리스케일이 시너지는 크겠군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미 프리스케일의 주인은 정해졌는데요.”
“벌써 다산과 계약이 끝났습니까?”
한 부사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생각했던 것처럼 정보의 출처는 다산 쪽인 모양이다.
유진의 오피스에서 프리스케일을 다산에 넘기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핵심 몇몇뿐이다.
노이베르거 베르만을 통해 프리스케일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산 쪽은 규모가 꽤 큰 곳이니 의외의 곳에서 허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의 끝나 가는 단계입니다. 이미 김 사장님과 이야기가 끝났으니까요.”
“우리가 좀 더 얹어 줘도 안 되겠어요?”
한정훈이 도통 파악하기 어려운 웃음을 지으며 물어 온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삼키는 성격은 못 돼서 말이지요.”
“저런. 사업을 크게 하시는 분이라 신의가 있으시네요. 그럼 내 더는 채근하지 않을게요.”
유진은 어쩐지 한 부사장이 프리스케일을 거론한 것이 진심으로 관심이 있어서는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유진 자신이었다면 프리스케일을 얻어 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과감한 베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부사장은 프리스케일보다는 다른 기업의 인수를 훨씬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네. ASML을 싸게 드리고 프리스케일을 받아오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한 부사장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저도 아쉽군요. 그럴 수 있었다면 아주 좋은 거래가 되었을 텐데요.”
“뭐, 어쩔 수 없지. 그래요. 그럼 ASML 지분은 넘겨 드리리다. 대신 우리 앞으로는 좀 친하게 지내요.”
한 부사장은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아마도 프리스케일 건을 거론하는 것으로 유진에게 빚을 지운다는 모습을 만들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받으면 제가 또 미안하네요. 그럼 차라리 HN인더스트리 지분을 넘겨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유진도 준비했던 것이 있다.
“HN인더스트리? 그걸 가지고 계셨어요?”
한 부사장은 지금까지의 여유 있던 모습을 어디론가 던져 버리고, 고개를 숙이며 물어 왔다.
“제일전자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HN인더스트리의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한 부사장은 지금 세계적인 음향 업체인 HN인더스트리 인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그게 알려지는 것은 앞으로 몇 달 뒤의 일이다.
“하. 이거 들켰네요. 그거 완전히 비밀 프로젝트인데.”
한 부사장은 너털웃음으로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
정말 최대한의 비밀을 유지하며 추진한 인수로, 11월에 발표가 나기까지는 HN인더스트리 주주 중에서도 제일 측의 제안을 받지 못한 주주들은 전혀 모를 만큼 조심스럽게 진행하던 일이었다.
“못 당하겠네요. 그러니까 그 짧은 시간 안에 세계 제일 부자가 되는 거였어요.”
제일 그룹 못지않게 유진도 아주 넉넉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부사장은 유진의 칭찬을 하면서도 꽤 긴장한 모양이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혹시 우리 제일 그룹에 관심이 많으신 건 아니지요?”
“한국 제일의 그룹이고, 세계적인 기업인데 관심이 없으면 투자자로서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투자자로서 말고 말이에요. 솔직히 강 대표 무서워요. 괜히 강 대표한테 밉보였다가 대양 꼴 나면 큰일인데.”
“하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투자자로서만 보고 있습니다. 대양처럼 척을 지는 것은…… 솔직히 하나면 충분하죠.”
유진은 일부러 슬쩍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한국에서 유진이 상대할 곳은 오직 대양 그룹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다행이네요, 그거. 그런데 HN인더스트리 지분을 얼마나 갖고 계신 거예요?”
“대략 11% 정도 됩니다.”
주로 월스트리트의 투자 기관에서 조금씩 가지고 있던 지분과 주식시장을 통해 매집한 주식이다.
“어? 벌써 그렇게 많아요? 대단하네. 우리가 확보한 것보다 많잖아요?”
“인수한 지 얼마 안 되니 크게 이문은 붙이지 않고 넘겨 드리겠습니다.”
유진도 나름 호의를 보여 준다.
이제 서로 간에 빚은 없다.
“HN인더스트리를 인수하게 되면 제일전자의 사업 분야 확충에 꽤 도움이 되겠더군요. 저도 슬슬 제일전자에 투자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강 대표가 제일전자에 투자하시면 우리도 좋지요. 하하.”
정말로 좋아서인지 어떤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다.
솔직히 말해 유진은 제일전자의 HN인더스트리 인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생각만큼 큰 시너지는 보이지 못할 테니까.
한 부사장의 기업 인수 사례들을 알고 있는 유진으로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인수할 때에는 다양한 언론을 통해 굉장한 비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실지로는 그다지 성공적인 시너지를 내지 못한다. 경영에 있어서는 부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
단지 수성 면에 있어서는 그럭저럭 나쁘지만은 않은 성과를 보이니 다행이라 할까?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물론이죠.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긴히 상의드릴 게 있는데요.”
“뭔가요? 말씀만 하세요.”
“혹시 대양자동차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예?”
한 부사장은 조금 전 HN인더스트리 지분에 대해 말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