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방문
“회장님께서 제일자동차에 대해 아주 애정이 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느 대기업이 그러하듯 제일 그룹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문어발처럼 손을 뻗고 있다. 그리고 제일 그룹은 진출해 있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항상 최고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유독 자동차만은 그렇지 못했다.
한 번도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다산과 그 뒤를 추격하는 대양에 밀려 간신히 3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번 시작했으면 기필코 1등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제일 그룹 회장에게 제일자동차는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다.
“애정이야 모두가 갖고 있지요. 제일의 일원이라면 말이에요.”
딱히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유진은 알고 있다.
“언젠가는 제일자동차가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일 그룹에서는 제일자동차를 대양자동차와 비견될 만한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투자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 기업 중에서는 가장 업력이 짧고, 그만큼 기술 확보가 충분치 않으니 여러모로 힘겨웠다.
특히 인구 5천만에 불과한 나라에 4개나 되는 자동차 회사가 경쟁하는 것은 꽤 낭비가 많은 일이다.
“지금이야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언제고 제일자동차도 당당하게 제일답다는 말을 들을 거예요.”
한정훈 부사장은 아직 제일자동차가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유진이 겪었던 미래에서 이 사내는 제일 그룹을 손에 넣은 후 제일자동차를 정리해 버린다.
딱히 자동차에 큰 애정도 없는 터라 그룹에 부담만 주는 사업을 계속 이어갈 마음이 없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에 들어간 제일자동차를 넘겨받은 것은 대양자동차였다.
“대양자동차에 관심이 있냐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 봐도 되겠어요?”
한정훈 부사장은 지금까지와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가 자동차 산업에 큰 애정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이건 다른 의미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다.
다름 아닌 후계 구도의 확정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한정훈은 유진의 말에서 굉장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대양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제일자동차는 다산자동차와도 겨루어 볼 만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부친이 얼마나 기꺼워할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내지 못했던 성과를 한 번에 만회할 기회였다.
“대양 그룹과 우리 가족 사이의 일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언제고 대양에게 받은 것을 돌려줄 생각이지요.”
유진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그가 대양에 원한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대양자동차를 인수하는 것으로, 강 대표 부친의 회사를 빼앗으려 했던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거란 말이로군요. 좋아요. 싸움을 걸어온 상대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일이야 앞으로를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지요.”
한정훈 부사장은 여느 사람들보다 유진의 의도를 잘 이해했다.
“대양자동차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선 자동차부터 고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양자동차를 인수한다고 해도, 내가 그걸 경영하기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군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문제라서요. 게다가 제일과 대양자동차의 합병은 상당히 시너지가 있을 것 같더군요.”
물론 제일자동차가 아니라 다산자동차라 해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쪽이 시너지 면에서는 더욱 클 것이다.
하나 유진은 다산자동차가 대양자동차를 합병하면 사실상 독점에 가까워질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유진이 원하는 그림과는 다르다.
“그렇기는 하죠. 강 대표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에 투자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더 이득 아니겠어요? 1년 동안에 벌어들인 수익만으로 대양 그룹을 인수하고도 남을 정도인데, 자동차 하나에 신경 쓰기에는 시간이 아깝죠.”
한 부사장이 웃으며 유진을 띄워 주려 했다.
“어떻습니까? 제일 그룹이 대양자동차 인수에 관심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유진은 거물의 아첨에 가까운 찬사는 슬쩍 무시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문제는 내가 판단할 사항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언제 한 회장님을 만나 뵙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할 듯하군요.”
“하지만 관심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우선 정말로 대양자동차를 대양 그룹에서 빼앗을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기는 하지요.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회장 일가의 대양자동차에 대한 지배 구도는 아주 확고한 편이니까요.”
한국의 여느 대기업처럼 대양 그룹 또한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 구조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또 지금처럼 취약한 시기도 따로 없을 겁니다.”
“대양 그룹 전체가 꽤 힘겨운 시기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뭐, 절반쯤은 강 대표 때문이지만. 하하.”
“그리고 14년부터 시작된 유가 하락 때문에 대양중공업이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솔직히 제일중공업도 그리 좋지는 않아요. 유가가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우선 버티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지경이죠.”
“몇 년 전부터 대양 그룹이 대양중공업의 지분을 확고하게 하려고 한동안 수주 물량을 줄인 것도 알고 계실 테죠?”
“그렇다고 들었어요. 중공업 주가를 떨어트려 지분을 늘리려는 모양이더군요.”
한정훈 부사장은 조금 찔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가가 하락기에 들어가면 지분을 매집하는 것은 대양 그룹만의 꼼수가 아니다.
심지어 때로는 일부러 자사 주가를 떨구기도 한다. 주로 상속세를 낮추기 위해 그런 짓들을 많이 벌였다.
실상 이런 부도덕한 행위에서 자유로운 재벌 그룹은 한국에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당장 한정훈 부사장과 그의 형제, 자매도 마찬가지의 꼼수로 지금까지 적지 않은 제일 그룹 계열사 지분을 확보해 왔다.
“이번에 대양중공업에서 실적발표를 하면 그 충격의 여파가 꽤 클 겁니다.”
“혹시 대양중공업을 매개로 대양자동차를 노리고 있는 건가요?”
사주 일가가 그리 많지 않은 지분으로 그룹 계열사를 좌우할 수 있는 비결인 순환출자의 가장 큰 약점이 그런 것이다.
순환출자의 한 축이 무너지면,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제일에서도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진이 제일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의 절반 정도는 그것 때문이다.
다산 그룹이 대양 그룹 순환출자의 핵심 계열사인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을 가지고 있다가 대양그룹 형제간의 분쟁에서 그걸 사용해 적지 않은 이득을 챙긴 것처럼, 제일 또한 틀림없이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었다.
두 재벌 가문 모두 탐욕스러운 것은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까.
“글쎄요.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다지 많지 않은 걸로 알아요.”
한정훈 부사장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가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양인터내셔널과 대양중공업 두 곳을 공략할 생각입니다.”
제일을 끌어들일 의도이니 굳이 숨길 생각도 없다.
그리고 유진의 그런 행위로 더 큰 득을 보는 쪽은 오히려 제일이 될 것이다.
“흠. 지분 싸움으로 끝나지는 않을 텐데요. 특히 국민 정서상 그렇게 다른 그룹의 기업을 빼앗는 것이 쉽게 용납되지 않아요.”
한국은 적대적 인수합병이 쉽지 않은 나라이다. 한정훈 부사장은 국민 정서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업의 정서 때문이라 해야 한다.
인터넷 등을 통해 시민들 개개의 의견이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론 형성의 주가 되는 것은 대형 언론사들이다.
그리고 그런 언론사들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건설회사의 자회사거나, 혹은 복잡한 혼맥으로 얽혀 있는 준 대기업에 가깝다.
당연히 대기업 계열사를 적대적 인수합병하는 것에 발작하듯 반응하고, 그것이 마치 국민들의 의사인 듯 오도한다.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다면 다를 수도 있지요.”
한정훈 부사장이 국민을 거론했으니, 유진 또한 국민을 핑계 삼는다.
“뭔가 묘안이 있다는 말이로군요. 하하, 강 대표의 수완이야 워낙 뛰어나시니 말할 필요도 없겠군요.”
“어쨌든 제 의사는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제일 그룹…… 아니, 한 부사장님과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야 이를 말이겠어요. 나도 강 대표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이루 말할 것도 없지요. 좋아요. 내 가서 한 번 조율해 볼게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유진은 한정훈 부사장에게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제안을 던졌고, 그가 어떻게 해서든 부친의 승낙을 받아 내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7월로 들어서며 미국은 얼마 앞으로 다가온 대선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었다.
양당의 후보인 힐러리와 트럼프 모두 상당히 난처한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다.
힐러리는 이메일 스캔들로 도덕성을 의심받고 있었고, 트럼프는 그 특유의 말실수로 수많은 사람에게 비난받는 상황이다.
7월 중순 들어 공화당은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열었는데, 공화당의 거물급 인사는 거의 참석을 거부했다.
자기 당의 후보인데도 보이콧을 하겠다는 것은 트럼프가 전통적인 공화당원들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행보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힐러리 또한 민주당의 좌파들에게 매서운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러모로 특이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유진은 일부 측근들과 함께 뉴요커들이 휴양지로 많이 놀러 가는 애틀랜틱시티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
일행은 한때 트럼프가 운영했던 트럼프 타지마할에 묵으며 며칠 동안 카지노와 유흥을 즐겼다.
트럼프 타지마할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라의 댄서들이 등장하는 카지노 스트립클럽을 연 곳으로 유명하다.
물론 유진 일행은 굳이 그걸 즐길 생각은 없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다, 유진은 몇몇 사람들만 대동하고 한 시간가량 떨어진 델라웨어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월밍턴으로 향했다.
“델라웨어에는 처음이시죠?”
차를 타고 가며 요안나가 물었다.
“뉴욕 아래쪽으로는 거의 내려와 본 적 없으니까.”
지난번 삶에서는 몇 번 정도 와 볼 일이 있었다.
월밍턴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 아니지만,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곳이다.
인구가 7만 명도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시에 등기된 회사는 무려 80만 곳에 달한다.
인구 한 명당 무려 10곳이 넘는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는 델라웨어가 미국에서 사실상 조세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주이기 때문이다.
델라웨어주에는 부가세도 없고, 법인세도 10%가 되지 않는다. 더불어 델라웨어 외부인이 소유한 주식은 델라웨어에서 세금을 물지 않는다.
이런 여러 가지 혜택 때문에 미국 500대 기업 중 절반이 넘는 기업들이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물론 이곳에 등기만 해놓는 것으로 세법상의 혜택을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유진이 월밍턴을 찾은 것은 이곳에 등기상 회사를 설립하려는 이유는 아니었다.
유진 일행은 월밍턴의 한 한적한 카페테리아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를 만났다.
“반갑습니다. 오웬스 여사.”
“안녕하세요. 항상 뉴스에서 보던 분을 직접 뵈니 기쁘네요. 발레리 바이든 오웬스에요.”
70이 가까운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활발한 인상의 여자가 모습만큼이나 큰 동작으로 유진에게 인사를 해 왔다.
“정정하신 모습을 뵐 수 있어서 기쁘군요. 최근 많이 편찮으시다 들었습니다.”
“괜찮아요. 나이가 들면 다들 그렇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세계적인 유명인사께서 어쩐 일로 날 만나자고 하셨나요?”
“몇 가지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