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미국 제일의 부자가 나 같은 평범한 노인네와 상의라니, 그거 무척 궁금하고 겁부터 나네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여장부인 발레리 바이든 오웬스는 입으로는 겁이 난다고 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다. 그저 평범한 주부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굉장한 여장부이며, 또한 왕성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민주당 계열 미디어 컨설팅 회사인 조 슬레이드 화이트 컴퍼니의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자선 단체인 Ministry of Caring의 이사직 또한 겸임하고 있다.
물론 그녀가 지닌 가장 커다란 자산은 미국의 부통령인 조 바이든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단순한 여동생으로서가 아니라, 조 바이든 정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로 발레리 바이든은 평생 오빠의 곁에서 그를 지지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 왔다.
바이든도 후일 대통령 수락 연설에서 그녀를 언급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의지해 온 것을 감추지 않을 정도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바이든 가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보 바이든 씨에게 일어난 일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고마워요. 오빠가 들으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거예요.”
수십 년을 미국 정치계에 몸담아 온 여장부답게 발레리 바이든은 그다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사의를 표했다.
“보 바이든 씨는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아마도 미국 정치계에 있어서 큰 손실일 듯합니다.”
지난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보 바이든은 민주당의 거물인 바이든 부통령의 장남이며, 이라크전 참전 용사 출신에 변호사 시험을 통과해 델라웨어 법무장관을 지내던 사람으로 이력으로든, 학벌로든, 배경으로든 충분히 정치적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부친의 뒤를 이어 언젠가는 대통령에 도전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유진 일행이 와 있는 델라웨어가 바이든의 정치적 기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당사자인 가족분들의 슬픔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저 또한 진심으로 보 바이든 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든 가족 여러분께 작은 제안을 하려 여사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어떤 제안이신가요?”
“돌아가신 보 바이든 씨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재단을 하나 만들었으면 합니다. 원인이 되었던 교모세포종의 치료를 위한 연구에 출연하기 위한 것입니다.”
“으음…….”
“재단 출연금은 제 쪽에서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대략 1억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돈이지만 뇌종양 중에서도 특히 치료가 어려운 교모세포종 치료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면 바이든 가족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덤덤하게 뱉는 유진의 말에 발레리 바이든이 살짝 놀라며 반응했다.
“1억 달러나 되는 돈을 많지 않다고 표현하시는 걸 보면, 과연 세계 제일의 부자답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에 운이 따라 자산을 불리기는 했지만, 세계 제일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진짜 부자들이 잔뜩 있지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라, 돈을 어떻게 제대로 쓰는지가 진짜 부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라 생각합니다.”
“멋진 분이시군요.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 바이든 가족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네요.”
재미있게도 좀 더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은 유진의 성을 제대로 발음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칸으로 발음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진 강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만일 지난해나 올해 초였다면 이해가 쉬웠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조가 부통령 자리에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더군다나 조의 나이로 보아 설마 다음 대에 대통령 선거에 나설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고요.”
예순아홉의 도날드 트럼프보다 많은 일흔셋의 바이든 부통령은 만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들었었다.
다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해도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은 여든에서 한 살이 빠질 뿐이다.
어느 누구라도 그런 고령에 바이든이 대통령의 자리를 제대로 이어 갈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나이이다.
지난해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기 전까지 바이든에 대한 지지는 상당히 높았다. 내외부에서 바이든에게 선거에 출마할 것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장남인 보 바이든을 뇌종양으로 잃고 더 이상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이번 선거에 바이든이 나왔다면 트럼프와 현격한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인이 된 보 씨에 대한 애석함의 표현 정도로 보아 주십시오.”
“세상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의 죽음에 1억 달러의 거금을 내놓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그의 부친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물론 유진도 그녀를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말을 더듬던 오빠를 끊임없이 격려해 그걸 고치도록 돕고, 상원의원 선거에 나선 오빠가 교통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도 그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며 바이든이 정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다.
그 뒤로도 바이든의 정치 일생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조 바이든이 선거에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70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5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정치에 몸을 담아 온 사람이 만만할 리 없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지금의 시련에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계실 만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겨 주시면 되겠군요. 물론 그렇다고 재단 설립이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뇨. 특별한 목적이 있다 해도 상관없어요. 그 재단은 틀림없이 조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발레리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오히려 유진보다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 각 지역의 정치인들은 쉴 새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을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1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를 말하는 후원자가 찾아오는 일은 어지간한 거물에게도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모든 정치인들은 후원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건 곧 신뢰라는 말과도 같았다.
만일 누군가에게 후원을 받고 그만한 대가를 내주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에게서도 후원을 받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 정치인들의 대가는 꽤 후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10만 달러 정도의 후원을 받는다면, 그가 책임 있는 자리에 올랐을 때 수백만 달러나 수천만 달러의 사업이 대가로 건네어지기 마련이다.
어차피 정치인 자신의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자리에 있을 때 두둑하게 인심을 쓰는 것이다.
발레리는 유진에게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런 의도가 부도덕하다 여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조가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것에 아주 좋은 일이고요.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남는군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충실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유진은 트럼프의 충실한 친구라고 알고 있어요. 한데 어째서 민주당 부통령, 그것도 과연 미래가 있는지조차 불투명한 조에게 그런 큰 액수를 내미는 거죠?”
유진이 예상하던 질문이다. 이미 트럼프는 그동안 쉬지 않고 유진과의 친분을 과시해 왔다.
지난 1년 동안 유진의 행보는 엄청난 이슈를 만들어 왔고, 이제는 그야말로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트럼프는 유진과의 친분이 자신의 명성에 도움이 된다 생각했기에 수시로 유진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은 결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좋은 이방인, 좋은 유색인, 좋은 이민자.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유진의 명성을 이용해 온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유진을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도널드와는 좋은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고 전 바이든 가문과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마치 새로운 코크 형제가 되고 싶은 모양이군요.”
발레리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카길과 함께 미국 비상장 기업의 선두를 다투는 코크 인더스트리를 소유하고 있는 코크 형제는 공화당을 지원하는 큰손으로 선거 때마다 엄청난 돈을 뿌리고, 극렬보수 단체인 티파티의 돈줄 노릇을 하고 있다.
두 형제의 자산 규모는 각각 400억 달러 수준으로, 형제의 자산을 합하면 빌게이츠를 넘어설 정도이다.
실질적으로 미국 제일의 부자 가문인 월튼 가문에 이어 두 번째 가는 부자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상장 회사가 아닌 비상장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정치적 후원의 규모 또한 다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단지 코크 형제보다 훨씬 더 돈이 많고, 훨씬 더 광범위하게 친구를 사귀려 한다는 점이 다르겠어요.”
발레리뿐 아니라 유진에게 후원을 받는 정관계의 인사들 모두가 유진의 후원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나같이 시대를 풍미하는 인물들이었으니, 그걸 모를 리 없다.
유진 또한 그걸 감출 생각은 없다. 사실 감출 방법도 없다.
다행히 미국은 다양한 통로의 로비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나라이다.
“코크 형제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전 어디까지나 친구들에게 호의를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코크 형제들처럼 특정한 정치적 정책을 요구하거나, 특정 사업에 대한 지원 따위를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액수가 너무 크면 받는 사람으로서는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겠어요. 차라리 명백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편하겠군요.”
“그저 이방인이 이 나라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았어요.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여하튼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로군요. 솔직히 유진이 만나자고 했을 때, 난 수십만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나왔어요. 한데 1억 달러라니. 진심으로 교모세포종 치료의 발전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유진의 진의야 어쨌든, 발레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제가 나온다면 꼭 보의 이름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조도 좋아할 겁니다. 그리고 친구의 호의는 항상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당장 달려올 수는 없어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벌써 든든해지네요.”
발레리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코크 형제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인가요?”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안나가 물었다.
“딱히 무슨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적어도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정도의 친구들은 많이 만들 생각이지.”
“발레리가 말했듯이 아무도 그걸 믿지 않을 거예요.”
요안나는 자신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물론 유진도 그 말을 믿고 있지는 않다.
“그럼 다음에는 오바마인가요?”
유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요안나는 이제 유진이 노리고 있는 다음 대상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조 바이든과 달리 오바마는 다음번이라는 미래도 없다.
하지만 유진은 당연히 오바마가 퇴임한 뒤에 그에게 적지 않은 후원을 할 생각이다.
물론 그다음 대통령도, 그리고 그다음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동량에게 후원하는 것만큼이나, 자리에서 물러나는 권력자에 대한 후원은 큰 의미가 있다.
다음번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신의 퇴임 이후에 유진에게 받게 될 후원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딱히 미국의 대통령이나 부통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퇴임한 법무부 장관과 CIA 국장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유진은 지금 추진 중인 경제 정보 센터에 앞으로 퇴임할 모든 CIA 국장들에게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다.
“부통령에게 1억 달러라면, 대통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가 되겠군요?”
“그럴 생각이야.”
유진이 알기로 오바마가 퇴임 이후 설립하는 재단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의 후원금이 쇄도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1억 달러를 한 번에 내놓을 정도이다.
그러니 유진은 그보다 몇 배는 내놓아야 상대도 감명을 받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매번 그런 규모의 지출이라면 어지간한 부자라도 부담스러울 거예요. 물론 보스에게야 새 발의 피겠지만요.”
“매번 그 정도로 나간다면, 나도 쉬지 않고 벌어들여야겠지.”
“지금 보유한 자산으로 미국 국채를 사도 이자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예요.”
“흠. 미국 국채라…… 요즘 금리가 어떻게 되지?”
“10년물로 1.5% 수준이에요.”
“그럼 당분간 그쪽도 신경을 써야겠군.”
유진이라고 모든 금융 상품에 대한 기억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때로 놓치고 있는 것도 있다.
요안나와 대화를 하다 보니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채 금리가 꽤 올라가는 것이 기억났다. 이쪽에도 제법 나쁘지 않은 수익이 날 것이다.
“그리고 아까 발레리와 대화를 하시는 동안 모니카에게 메시지가 왔어요. 트럼프가 보스와 미팅을 원한다더군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럴 테지. 지금쯤이면 꽤 지쳐 있을 테니까.”
“그럼 시간을 잡으라고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뉴욕에 돌아가면 시간을 낸다고 하지. 음…… 차를 돌리도록 하지. 온 김에 플로리다에서 며칠 지내다가 갈까?”
유진은 트럼프가 대선 행보에서 지금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누구에게서라도 북돋음을 받기 원할 것이다.
“알았어요. 플로리다도 나쁘지 않죠.”
요안나가 웃으며 인터폰으로 운전수에게 차를 돌리라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