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94화 (94/363)

94화 이끌림

“플로리다에는 와 본 적 있어?”

예정에 없던 여행을 결정하고 나서야 요안나에게 물어본다.

“한 번도 없어요.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에 갈 시간이면 차라리 집에 한 번 다녀오고 말죠.”

“요안나는 다 좋은데, 삶을 즐길 줄 모르는 거 같아.”

여유가 생긴 유진이 놀리듯 말했다.

“즐길 줄 모르다니요. 제가 얼마나 즐겁게 살고 있는데요.”

“투자할 회사를 분석하고, 통계 자료를 계산하는 거 말이지?”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자산을 확인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고요.”

잠시 잊고 있었다. 요안나는 월스트리트의 얼음 공주라 불리던, 투자의 귀재가 될 여자였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보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자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여자다.

자신이 즐기는 일에 재능이 있는 것만큼 축복받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요안나는 그런 축복을 받은 여자였다.

“보스가 오히려 이상해요. 투자를 결정할 때 말고는 오히려 그다지 투자에 관심도 없는 것 같고, 계산하는 것도 귀찮아 하잖아요?”

“굳이 내가 일일이 분석하고 계산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걸 하라고 요안나를 고용한 거 아냐?”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보스의 판단이 항상 옳아요. 뭔가 불공평해요.”

“요안나가 불공평에 대해 말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녀야말로 불공평함의 극에 있는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였고, 심지어 돈을 버는 것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재능까지 가지고 있다.

“불공평한 것은 불공평한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보스처럼 앞을 내다보는 판단력은 따라갈 수 없을 테니까요.”

요안나가 볼멘소리를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한 번 인생을 살아보고, 다시 한번 지나온 시간을 걸어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불공평함의 끝에 서 있다 할 수 있으니.

“운전은 한 시간마다 휴식하며 가기로 하지.”

유진이 말을 돌렸다.

운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 일행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플로리다까지는 열 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했다.

“그렇게 전할게요.”

요안나가 경호 팀장에게 지시를 내렸고, 다시 유진이 탄 차를 앞뒤에서 호위하며 달리는 차량들에게도 지시가 내려갔다.

소수의 인원이라고 해도, 경호원만 열 명이 넘는다. 지금도 모두 다섯 대의 차량이 일렬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이애미의 원 호텔에 여유가 있다고 합니다. 예약해 놓았으니 그리고 가면 됩니다.”

애틀랜틱시티에서 헤어진 모니카가 지시를 받고 호텔을 잡아놓았다.

“꽤 먼 거리이니 편하게 쉬면서 가지. 피곤하면 자도 괜찮고.”

“아뇨. 할 일 있어요. 보스나 쉬어요.”

요안나는 벌써 랩탑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려는 모양이다.

유진은 잠시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허리를 뒤로하고 몸을 편히 뉘었다.

그날 밤늦게서야 일행은 마이애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애틀랜틱시티에서 비행기로 날아온 다른 일행들이 이미 각자의 방에 투숙해 잠이 들어 있었다.

유진 일행은 굳이 그네들을 깨우지 않고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부터 유진 일행은 마이애미 비치에서 진짜 휴가를 즐겼다.

트럼프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먼 거리를 내려왔지만, 기왕 내려왔으니 즐기기로 했다.

“마이애미도 꽤 멋진 곳이네.”

뉴욕과 달리 한없이 늘어지는 여유가 좋았다.

“다들 몸매들이 좋군.”

항상 조신한 옷을 입고 있던 여자 스태프들이 비키니를 걸치고 바닷가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던 유진이 한국말로 말했다.

“그러네요. 모니카가 저렇게 글래머러스할 줄 몰랐어요.”

하지만 옆에 있던 요안나는 어느새 한국어를 제법 잘 알아들었다.

“요안나도 멋진데.”

그녀 또한 비키니를 입고 나와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어김없이 랩탑이 들려 있다.

“이따가 선크림이나 발라 주세요.”

요안나는 파라솔 아래 놓인 선베드에 걸터앉아 랩탑을 켜고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바닷가에서까지 일이라니.”

“명백하게 근무 시간이니까요.”

요안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스태프들이 바닷가에서 뛰어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유진과 함께하는 한 휴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들도 여전히 근무시간이지만, 딱히 시킬 일이 없을 뿐이다.

“여름 휴가에는 어딜 갈 생각이야? 오랜만에 네덜란드에?”

“아뇨. 그냥 집에서 쉬면서 잠이나 자려고요.”

“꼭 일본 만화에 나오는 건어물녀 같군.”

“그게 뭔가요? 거너물녀?”

처음 들어보는 한국말에 그녀가 호기심을 보인다.

“아니. 그런 게 있나 보더라고.”

유진은 딱히 설명해 주기 어려워 말을 흐리고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놀고 있는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마이애미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사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잔뜩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다음날은 모니카가 어디에선가 섭외한 개인 해변이 있는 저택에서 머물렀다. 일행들은 호텔 앞 해변에서보다 훨씬 더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그날 저녁 유진은 마이애미의 유력자 몇몇을 저택에 초대했다. 기왕 내려온 것, 그냥 보내기는 아까웠던 듯했다.

급작스럽게 초대를 받은 마이애미의 명사들이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찾아왔다.

미국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부호와의 만남을 놓치기 싫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도시로군요. 마이애미는.”

의례적인 인사였다.

“곳곳에 아름다운 곳이 가득하답니다. 마음에 드시면 별장을 하나 사놓는 게 어떠세요? 그렇게 별장을 사 놓으면 다시 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지요.”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마이애미의 이름난 부호가 웃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겠군요. 한 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정말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하나 소개시켜 드리지요. 마침 제 친구가 자택을 내놓았는데, 팔기 정말 아까운 집이거든요. 참 공을 들여 지은 집인데 말이에요.”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어째서 내놓았나요?”

“위자료 때문이죠. 호호.”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러게요. 미스터 칸도 조심해야 해요. 미국 여자들은 정말 위험하다고요.”

“충고 감사합니다. 깊이 새겨야 하겠군요.”

유진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잠깐의 방심으로 재산의 절반을 빼앗길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답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하긴, 위자료를 꼭 남자가 지불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부자들은 결혼 전에 혼전 계약서(Prenup)를 작성한다고 하지만, 결혼이라는 로맨틱한 행사에 그런 조건을 걸지 않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다음날 유진은 어제의 여 부호가 소개해 준 집을 구경하고 바로 질러 버렸다.

사우스 비치의 작은 섬에 위치한 저택은 프라이버시를 유지하기도 좋아 보였고, 꽤 넓은 프라이빗 비치와 커다란 풀을 갖춘 멋진 저택이었다.

그녀의 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 5,000만 달러라는 가격이 오히려 저렴해 보일 정도였다.

유진은 그걸로도 모자라 리츠 팀을 불러 몇 채의 건물을 더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딱히 마이애미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을 예측해서는 아니다.

그저 이 여유 있는 도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돈만 벌다 보면 때로 소비 욕구가 들기도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옷이나 값비싼 장신구 혹은 자동차 따위로 그런 욕구를 해소하겠지만, 유진의 경우라면 조금 단위가 달라야 해소될 듯했다.

그렇게 휴가인지 부동산 쇼핑인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마이애미의 명사들과의 인맥을 쌓으며 일주일을 보내고 맨해튼으로 돌아갔다.

“뉴욕 시어터 워크샵에서 공연 중인 하데스타운 예약 좀 부탁해.”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니카에게 뮤지컬 공연 티켓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브로드웨이가 아닌 주로 실험적인 뮤지컬을 공연하는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이다.

그리스 신화 중 가장 애절한 로맨스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데스타운이요? 그거 요즘 평이 꽤 좋던데. 같이 가도 될까요?”

뮤지컬에 관심 많은 요안나가 함께 가기를 요청해 왔다.

“아니. 이번엔 혼자 가고 싶어. 다음번에 같이 가도록 하지.”

“흐음? 아하!”

요안나가 묘한 웃음으로 유진의 거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뮤지컬 공연은 딱 기대했던 대로였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했다 해서 딱히 놀랍지도, 감명 깊지도 않았다.

그래도 하데스 역을 맡은 패트릭 페이지의 중후한 목소리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 뮤지컬이 꽤 호평을 받는다는 사실도, 그리고 재즈와 대공황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것이 미국인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름 재즈를 즐겨듣는 유진에게 딱히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유진이 여전히 이방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저 취향 차이일지도 모른다.

공연이 끝나고 유진은 진행 요원의 안내로 백스테이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오셨네요.”

뮤지컬에서는 그렇게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유진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빛나던 여배우가 다가와 반가움을 표시했다.

“멋진 공연이었어요. 노래도 아주 좋았고요.”

유진은 준비해 온 장미꽃을 내놓으며 그렇게 칭찬했다.

그는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약간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죠? 저도 이 작품이 너무 좋아요. 비록 맡은 역할이 그렇게 드러나지는 않지만요.”

헐리우드의 무명 배우였던 에밀리 서머즈는 유진의 추천으로 브로드웨이에서 명성 높은 제작자 린마누엘 미란다에게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유진이 뮤지컬의 가장 큰 투자자였으니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린은 자신의 뮤지컬에 빈 배역이 없다며 다른 뮤지컬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녀는 이번에 새로 공연하게 된 이 하데스타운에서 작지만 빛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랬나요? 난 공연 내내 페이트만 보고 있었는걸요?”

에밀리는 극의 네 주인공인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페르세포네, 그리고 하데스의 주변에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외적으로 표현해 주는 운명의 세 여신 중 한 명을 연기하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노래들의 코러스를 맡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짓말은 아니네요.”

에밀리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나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유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에밀리는 사람의 거짓말을 쉽게 눈치채는 여자였다. 아니, 어쩌면 유진이 거짓말을 할 때만 그랬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당신을 보느라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어요. 아! 패트릭 페이지의 노래는 멋있었어요. 패트릭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공연을 감상할 이유는 충분하겠더군요.”

“그렇죠? 아주 굉장한 배우예요. 여러모로 배울 게 많은 사람이죠. 그리고 또…….”

유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에밀리가 재잘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아주 묘한 기분이 든다.

유진의 기억 속 과거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었다.

그러니까 유진이 알고 있는 에밀리는 지금보다 서너 살 많은 미래의 에밀리이다.

그렇다면 지금 유진 앞에 앉아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는 에밀리는 미래의 그녀인가? 아니면 과거의 그녀인가?

시간을 거슬러 와 다시 한번 살아가며 과거의 인연을 만나는 것은 남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감상을 느끼게 한다.

유진은 에밀리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음악, 그리고 침대에 있을 때 어떤 장난에 반응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유진에 대해서도, 그리고 유진이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가진 감정과 기억의 간극에서 비롯된 미묘한 차이 때문에 유진은 이 순간의 느낌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이애미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요?”

“뉴스에서 봤어요. 마이애미에서 가장 큰 호텔을 구매했다고 하더군요. 유진은 굉장히 유명해서 어디서든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마이애미는 멋진 곳이겠죠?”

“네.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 없는 말들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둘은 입을 닫은 채 서로를 마냥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우리 겨우 두 번밖에 만난 적 없잖아요?”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에밀리였다.

유진이 답해 주어야 했다.

“호감이 있어서죠. 물론.”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정말요?”

에밀리가 밝게 웃었다.

“사실은 나도 유진이 좋아요.”

그녀는 항상 유진에게 솔직했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이렇게 너무 달라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에밀리와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유진은 깨달았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에밀리는 그가 알고 있던 미래의 에밀리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앞으로 서로 알아가도록 하죠.”

유진이 좋아하는 에밀리는 현재의 에밀리였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저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그것이 없다 해도 유진은 그녀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좋아요. 그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물론이죠.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유진은 그녀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남겼다.

여전히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를 두 번 다른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하지만 딱히 걱정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다시 사랑할 수도 있고, 어쩌면 언젠가처럼 헤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벌써 두려움에 떨며 새로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