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97화 (97/363)

97화 재앙

“윤 사장은 뭐라고 하나?”

회장이 물었다.

대양중공업 부사장으로 있다가, 최근 물러난 회장의 셋째 아들 류근수를 대신해 사장에 오른 윤 사장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윤 사장이 파악한 것으로는 내년 상반기에 흑자 전환을 발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주 잔량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대양중공업 측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누적 적자를 한 번에 터트려 주가를 끌어내리고, 다음 분기에 다시 주가를 부양할 재료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기에 마음껏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이번에 적자로 발표한 대손충당금 등 회계상 손실로 잡아 놨던 비용을 원상복구시키며 일시에 흑자 전환을 하고, 그동안 잡아놓지 않았던 신규 수주 물량을 반영하는 것으로 충분히 주가를 부양시킬 수 있다.

“벌써 제일중공업과 다산중공업 측은 채권단과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슬슬 정부 지원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우리도 아마 5조 이상은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대로 하면 10조까지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참에 구조조정도 할 수 있으니 1년만 고생하면 된다고 합니다.”

조선업은 적지 않은 인원을 고용하는 국가적 산업이다. 때문에 업계에 위기가 닥치면 다방면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만일 빅3에 해당하는 조선소가 쓰러지면 엄청난 파급효과가 생기기 때문에 국책은행과 채권단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게는 공매도를 통해 뒷돈도 챙기고, 정부와 채권단의 지원도 넉넉히 받아 낼 기회였다.

이참에 비싼 월급을 받는 정규직을 잘라 내고, 새로 몇 개쯤의 파견업체를 세워 비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보너스쯤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적자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면, 좀처럼 하기 어려운 구조조정도 쉽게 해치울 수 있다.

물론 숙력된 정규직을 잘라 내면 다시 호황기가 왔을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예상 수익이 얼마나 된다고?”

“최소 1조 2,000억 원입니다.”

해외 투자기관을 통해 지니고 있던 주식을 모두 팔아치우고 추가로 공매도까지 해서 1조 9,000억 원을 챙겼고, 주가가 바닥에 다다르면 다시 그중 7,000억 원 정도를 사용해 공매도를 청산하고, 팔았던 지분을 복구할 생각이다.

“결국 그 강유진이라는 놈 때문에 수천억을 손해 보았다는 말이지?”

노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노기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적어도 4,000억입니다. 그동안 대양 그룹의 이미지 하락으로 인한 다른 피해는 전부 무시하고, 중공업만 그 정도입니다.”

류근일이 아까 말했던 금액을 다시 한번 꺼낸다. 그만큼 화가 나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 있는 누구도 사태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이미 본 손해뿐이다.

“어떻게든 해야지. 고얀 놈 같으니.”

노인은 당장이라도 유진을 씹어먹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당장 당면한 사태에서는 부자들 모두 한마음이었다.

“여하튼 마무리되면 5% 정도는 더 챙기도록 하거라.”

대양 그룹 전체의 순환출자 구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대양중공업 주식을 이 기회에 저렴한 가격에 매수해서, 그룹의 지배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 기회였다.

“그리고 이제 슬슬 우리도 지주회사 체계로 완전히 넘어가야지. 그동안 그 녀석 때문에 제대로 처리 못 한 게 너무 많아. 내가 숨이 넘어가기 전에는 완결을 지어야지.”

노인이 자신의 죽음을 거론하는 일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다.

“아직 정정하신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신경 쓰실 거 없이 백 세, 아니 이백 세도 거뜬하십니다.”

두 아들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그런 소리들 말거라. 지금도 이미······ 쿨럭!”

“아버지!”

노인의 기력이 확실히 떨어져 있음이 느껴졌다. 부친에게 다가가는 두 아들의 눈에는 묘한 욕망이 서려 있었다.

“회장님!”

그때, 조용히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이 회장을 불렀다.

“괜찮아. 나 안 죽어. 기침 한 번 했다고 어떻게 안 돼.”

노인이 허리를 펴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주가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어떻게?”

“갑자기 매수세가 살아나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24,0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리고는 매도 물량을 전부 받아먹고 있습니다.”

“어? 진짜네?”

류근일이 급히 스마트폰을 통해 주가를 확인해 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그걸 받아먹어? 웃기네.”

첫째도 둘째의 스마트폰을 넘겨보고 한마디 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긴장하지 않았다.

“어느 기관이라도 이쯤이 바닥이라 생각하고 대량 매수를 하고 있나 보지. 모니터 좀 켜 봐.”

첫째가 지시하자, 그들 뒤에 서 있던 다른 비서가 거실의 대형 모니터를 켜고 대양중공업 주식 창을 띄웠다.

“그러게. 손해 많이 보겠는데?”

두 형제는 오히려 수상한 매수 세력을 비웃을 뿐이다.

하지만 보고를 올린 오 비서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24,000원에 걸어 놓은 매수 잔량이 심상치 않습니다.”

“매수 잔량이 지금 얼마나 되는데?”

첫째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1,230만 주입니다.”

“뭐라고? 그게 말이 돼? 1,000만 주면 12%라는 말인데.”

“지금까지 바닥인 20,300원에서부터 시작해 현재가 24,000원 선까지 체결된 것만 520만 주가 넘습니다.”

“520만 주? 벌써 5%가 넘는다는 소리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24,000원에도 체결되는 물량은 없다. 다들 뭔가 있다 느꼈던지, 그 위쪽에서 조금씩 거래되고 있을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렇게 받치고 있는 건데?”

“수상한데…….”

이제 형제들도 슬슬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뒤에는 오히려 주가가 반등하기 시작했다.

24,100원 위쪽 매도 잔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매수가 그 위로 조금씩 매수 잔량이 늘어난다.

그러기를 잠시. 어느 순간 갑자기 호가가 치솟기 시작한다.

“26,300원?”

잠깐 사이에 2,000원이나 올랐다.

그 상태로 잠시 움직임이 멎나 싶다가 다시 치솟는다.

“27,000? 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대양중공업에 무슨 호재가 있어?”

사주 일가가 모르는 호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동안 비서실장과 또 한 명의 비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원인 파악은 아직 안 되고 있어?”

장남이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지금 파악 중입니다.”

“뭣들하고 있는 거야? 빨리빨리 알아 봐!”

사내들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는 사이, 주가는 벌써 30,000원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당황했다.

뭔지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조 원이 걸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지금 시장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이 회장에게 보고했다.

“무슨 소문?”

“강유진이 대양중공업을 인수하기 위해 주식 매입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세 부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또! 이 개놈이! 윽! 으윽!”

그리고 바로 뒤, 노인이 뒷골을 잡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쉬지 않고 터져 나온 불상사로 성치 않은 몸을 억지로 이끌고 자리한 상태였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임에도 강유진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일순 혈압이 몰린 탓이다.

“회장님!”

“아버지!”

“주치의! 빨리!”

삽시간에 회장 저택은 난리가 나 버렸다.

“주가는?”

그리고 그 와중에도 두 형제는 대양중공업 주가 상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부친의 일도 문제이지만, 정말 강유진이 공격을 해 온 것이라면 엄청난 재앙이 닥친 것이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되고, 아들들이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대기 중이던 주치의가 달려와 급하게 응급 처치를 하고, 한참 만에 노인은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됐어? 주가, 주가는? 어찌 되었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노인은 여전히 자신이 일군 그룹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기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류근일이 말을 더듬었다.

“괘안아. 그냥 말해. 아니지, 지금 몇 시야?”

“두 시입니다.”

“허어…….”

노인은 자신이 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주가는 어떻게 되었어?”

“33,000원을 넘어섰습니다.”

“기어이? ……그래. 강유진이 그 녀석의 짓이 맞는 거야?”

“네. 증권 쪽을 통해 알아보니 주문을 낸 것은 SS파트너스라고 합니다. 강유진 그놈의 짓이 맞습니다.”

“그럼 정말로 그 녀석이 중공업을 인수할 생각이란 말이야?”

그동안 주식시장은 쉴 새 없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SS파트너스에서 깔아놓은 특정 가격 아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았다.

이제 대양중공업 주식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세계 제일의 부자가 확실히 어떤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메신저로 배포되는 증권가 찌라시에는 온통 강유진이 대양중공업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증권가를 떠도는 이런 사설 정보의 위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늘 정보에 목이 말라 있었고, 뜬소문이라 해도 한 번 귀에 들어오면 혹시라도 기회를 놓칠까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당장 대양중공업 주식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집어 던지는 것을 멈추었다.

혹시라도 헐값에 팔았다가 대양 그룹과 강유진 사이에 정말 지분 경쟁이라도 벌어지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후를 지나면서 매도세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매수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너도나도 대양중공업을 줍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오르기 시작하자 매수세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고 결국 상한가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강유진이 월스트리트에서 얼마나 큰돈을 벌었는지, 또 그가 대양 그룹에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이제 시작이네. 내 이럴 줄 알았다.

- 안 팔기를 잘했네. 어제 떨어질 때 팔았으면 지금 눈물 흘리고 있을 듯.

- 내가 지금 눈물 흘리고 있음. 아, 진짜 하루만 기다려 볼 걸.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음. 지금 사면 최소 몇 배는 벌 수 있음.

- 오늘 상한가 갈듯.

- 당연하지. 강유진이 붙었는데.

- 그럼 대양중공업 10만 가는 거야?

- 가자!

- 20만! 20만까지!

- 아무리 그래도 대양중공업 적자 규모를 생각하면 그건 아닌 듯. 벌써 자본 잠식 단계라던데.

- 부실 규모가 너무 큼. 5조 적자를 생각해 봐.

- 강유진 재산이 1000조라더라. 그깟 5조 새발의 피지.

- 1000조는 낭설이라더라. 그래도 100조는 넘을 듯.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 여하튼 개꿀잼. 강유진이 대양 그룹을 인수하면 재미있을 듯.

- 대양 그룹말고 대양중공업. 강유진 아빠 회사 노린 게 대양중공업임. 대양중공업은 틀림없이 빼앗을 듯.

- 나 같으면 전부 빼앗는다.

그리고 강유진이 대양중공업을 인수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납득하고 있었다.

- 자기 기분 나쁘다고 남의 회사를 막 빼앗으면 되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 먼저 빼앗으려고 했던 게 누군데?

- 당연한 거 아님? 내걸 빼앗으려 했으면 당연히 힘 있으면 빼앗아 줘야 하는 거 아님?

- 그럼 애꿎은 대양중공업 직원들은?

- 더 좋음. 나 같으면 대양 그룹보다 강유진 회사 다니는 게 훨씬 나을 거 같음.

- 지난번에 강유진이 직원 전부한테 보너스로 테슬라 한 대씩 줬다고 하더라. 1억 원도 넘는데.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었지만, 대체로 강유진에게 호의적이고 대양 그룹에 대해서는 비난이 대다수였다.

지난 1년 동안 대양 그룹은 강유진과 관련한 일로 적지 않게 입방아에 오르내려 왔다.

- 나 대양중공업 다니는데 강유진 인수에 찬성.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 뒤숭숭했단 말임. 이제 직원 자를 차례라고. 강유진이 인수하면 그런 짓은 안 할 듯.

- 솔직히 주주 입장에서 대양중공업이 이번에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빼앗아 버리는 게 맞음. 5조 원을 숨기고 있다가 한 번에 터트리면 주주들은 어쩌란 말이야?

이미 이미지가 바닥을 기고 있던 대양 그룹에 대한 적대감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 우리 삼촌 하시던 회사도 대양중공업 갑질 때문에 망할 뻔함.

- 대양자동차 3차 벤더 회사 다니는데 그놈들 갑질 쩜. 졸라 재수 없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대양중공업을 비롯한 대양 그룹의 갑질이 하나씩 거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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