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속수무책
“이제 시장은 강유진이 대양중공업 인수에 나섰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상한가까지 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SS파트너스의 매수 물량이 아직 24,000원에 머물고 있어서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오경덕 비서실장이 류 회장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정말 인수가 목적이라면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대양중공업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쪽에서 가진 지분이 겨우 31%밖에 안 됩니다. 국민연금 보유분 7.3%를 더해도 38%입니다.”
여느 대기업들이 그러하듯 국민연금에서 투자한 액수는 늘 사주의 입장에 선다는 가정을 한다. 사실 그래 왔던 것도 틀리지 않고.
그러니 한국 대기업은 자기가 보유한 지분 외에 국민연금 지분까지 우호지분으로 상정해 두었다.
물론 거기에 대한 대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정권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정부 여당의 정책에 협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강유진이 매수한 양이 오늘 10%도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을 하는 건 너무 성급한 거 아냐?”
장남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른 통로로 확보해 놓은 지분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강유진이 월스트리트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그러니까 이미 충분하게 지분을 확보한 뒤에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합니다.”
“설마 40%가 넘게 가지고 있을라고…….”
둘째 류근일이 자신 없이 말했다.
“지금은 상대가 무한에 가까운 자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무한이라니, 그쪽이 허풍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100조 원 이상의 현금 동원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빌어먹을!”
장남이 다시 한번 분통을 터트렸다.
“으음······.”
“강유진으로서는 20%를 매집하는데 1조 원을 쓴다 해도 그다지 대단한 비용이 아니지만, 대양중공업이 넘어가면 다른 계열사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순환출자의 가장 큰 문제가 그것이다. 중간에 큰 놈 하나만 쓰러져도 줄줄이 쓰러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도 울며 겨자 먹기로 매수를 해야 한다?”
“네. 그게 제일 안전합니다. 중공업이 넘어가면 자동차가, 그리고 자동차가 넘어가면 상사까지 위험해집니다.”
대양 그룹은 몇 개의 순환구조로 서로가 서로의 지분을 물고 있다.
대양중공업은 대양자동차의 지분을, 그리고 대양자동차는 대양상사의 지분을, 대양상사는 대양중공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식이다.
또 다른 순환출자 구조에서는 대양전자와 금융계열이 돌고 돌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 그 녀석이 지금 돈으로 눌러 보겠다는 말이지? 이 나를 말이야?”
류 회장이 아흔이 넘은 노인의 눈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너희 생각에는 어떠냐?”
“벌써 꽤 많이 올랐습니다. 지금에 와서 매수에 들어가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장남이 먼저 말했다.
사실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가격을 맞추지 못하면 그동안 누적되어 온 비자금 손실을 회복할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이번 일의 목적은 1조 원이 훌쩍 넘는 이면 수입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그 계획이 전부 무너진다.
“그 녀석도 24,000원 이상으로는 매입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덤벼들면 멈춰 있던 주가가 급상승할 겁니다. 매도 물량도 그리 많지 않고요.”
류근일이 동의하고 나섰다.
사실 대양 그룹측이 매수에 나선다면 그렇지 않아도 상승세인 주가가 얼마까지 오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칫해서 놈에게 중공업을 빼앗기면······ 중공업이 보유한 자동차 지분도 문제이지만 분식회계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다시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그에 회장과 아들들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양중공업은 그동안 적지 않은 손실을 감추기 위해 위법한 일도 서슴지 않아 왔다.
“얼마가 들어갈지 모릅니다. 우리까지 매수에 합류하면 그렇지 않아도 상승세인데······.”
“그냥 두고 볼 수만도 없습니다.”
“어차피 이 상태라면 저쪽도 더 이상의 매수는 힘들 겁니다.”
“맞아요. 차라리 확 올라 버리면 그쪽에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공매도가 문제입니다. 매도한 가격 이상으로 올라가면 증거금이 부족해지고, 청산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지만, 위험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누구도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한가입니다!”
그때, 갑자기 비서실장이 소리쳤다.
유독 그만이 대화를 계속하면서도 모니터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뭐라고?”
노인이 거칠게 되물었다. 물론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벌써?”
“맙소사!”
세 부자가 대책을 논의하는 사이, 갑자기 상승세가 확 몰아쳤다.
잠시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너도나도 매수에 올라탔고, 심지어 대양중공업 사태를 주시하던 외인들도 매수 대열에 합류했다.
“큰일이야······.”
첫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지?”
류근일이 초조한 표정으로 비서실장이 틀어놓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당장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비서실장이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매수에 들어가도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유진은 다릅니다. 녀석은 몇조쯤은 우습게 쓸 수 있습니다.”
전날 하한가까지 내려서서 2조 8,000억 원이던 대양중공업 시가 총액은 어느새 3조 6,000억 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일이 며칠만 반복되면 얼마나 큰 재앙이 될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아무리 그놈이라고 해도 이렇게 상승세가 계속되면 절대로 원하는 만큼 주식을 사들일 수 없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류근일이 말했다.
“그건 그렇지. 매도가 완전히 실종인데, 무슨 수로 물량을 확보해?”
“강유진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분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냉철한 사람은 그나마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오경덕 비서실장이었다.
“으음······.”
워낙 사태가 다급하게 흘러가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류근일이 신음성을 뱉었다.
* * *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13시간의 시차로 아직 새벽인 뉴욕에서는 요안나와 유진이 밤잠을 설치며 현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앙이 떨어진 것 같은 대양 그룹 회장 자택과 달리, 이들은 안락의자에 편하게 등을 눕히고 앉아 음료수 잔을 손에 들고 스낵을 집어 먹으며 야구 경기라도 보는 양 편하게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생각대로 주가가 계속 오르겠어요. 여기서 한 두어 번 더 상한가를 치면 엄청 재미있겠어요.”
그럴 경우 6만 원이 훌쩍 넘어서게 된다.
“저쪽으로선 공매도가 문제겠지요? 이대로 간다면 엄청난 손해를 볼 게 빤하니 말이에요.”
무설탕 콜라를 마시면서 요안나가 말했다.
“공매도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언제고 다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니까.”
“언제고요? 한국은 만기에 상환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요안나도 이제는 한국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지만, 모든 세세한 상황까지 아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는 달라서 빌려준 곳에서 반환 요청을 하지 않는다면 무제한으로 상환을 연장할 수 있어. 그러니까 공매도를 해 놓고 주가가 오르면 언제고 떨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있지. 이자 부담만 하면 그만이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반환 요청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
“어? 그러면 공매도의 위험 부담이 없잖아요?”
미국의 경우에는 공매도를 위해 주식을 빌릴 때 반드시 상환 만기 기간을 정하고, 계약된 기간 안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어. 위험도 없고, 처벌도 없어.”
또 미국의 경우는 무차입 공매도를 하거나, 공매도에 대해 결제불이행을 할 경우 500만 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20년 이하의 징역을 내린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대개 과태료 부과 정도로 끝난다.
“그러면 공매도를 하라고 떠미는 꼴이네요.”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그래서 공매도로 손해를 보는 일이 좀처럼 없어. 그런데 또 그런 룰은 기관과 외국인에게만 적용돼. 개인투자자에게는 상환 기간 60일이라는 다른 룰을 적용하지.”
심지어 그나마도 신용약정 체결에, 대차매도 등록 등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 한다.
“뭐예요? 그게? 그럼 외국인들과 기관만 공매도로 돈을 벌라는 말이잖아요?”
“말로는 개인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지.”
더군다나 공매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공매도 공시제도는 이달 처음 시행되었다. 그전까지는 개인은 누가 얼마나 공매도를 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나 참. 그러면 주가가 저렇게 올라도 그냥 버티면 그만이라는 말인가요?”
커다란 모니터에 떠 있는 대양중공업 주가를 보며 요안나가 말했다.
한국에서는 앞으로 몇 년 뒤에 벌어질 게임스탑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없다.
게임스탑 사태에서 공매도에 큰돈을 베팅한 몇몇 헤지펀드가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고, 파산까지 이르게 된 까닭은 미국에서는 만기일까지 반드시 주식을 보유해야 하기에 급하게라도 주식을 사들여야 했고, 결국 숏스퀴즈를 불러일으키며 주가가 더욱 상승하는 악순환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상황에서는 대주 이자가 무려 80%까지 올라가며 공매도 세력을 더욱 압박했다.
하지만 요안나의 말처럼 한국에서라면 버티면 그만이다.
물론 주가가 올라가면서 높아지는 증거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반대매매로 청산을 당하는 것은 똑같지만, 그래도 증거금을 내며 버티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주식을 대차해 준 기관에서도 수수료만 받으면 그만이라며 굳이 회수를 종용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주식을 대여해 준 곳은 아마 상당 부분이 대양증권이나 다른 그룹계열사일 거야. 어쩌면 대양증권 쪽을 이용해 무차입 공매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무차입 공매도는 엄연히 불법행위이지만, 증권사의 시스템을 통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로군요. 중범죄로 감옥에 갈 만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어요.”
“또 급한 경우라면 국민연금도 있으니까.”
국민연금이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공매도 세력에게 빌려준다는 사실은 그동안 수차례 비난받아 왔다.
하지만 여태까지도 수수료 수입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국민연금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빌려줘서 주가를 낮추는 일에 한몫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그 짓을 그만두는 것은 앞으로 몇 년 뒤의 일이다.
더군다나 만일 유진과 대양 그룹 사이에 지분 싸움이 벌어지면 주저하지 않고 대양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야.”
물론 그런 모든 변수를 전부 상정하고 있기에 유진은 아주 느긋했다.
* * *
대양중공업 사태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들고 있던 주식을 내놓으려 하는 사람은 없고, 사려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그동안 강유진의 투자 성공을 보며 부러워만 하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한 몫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한 발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았다.
마치 이번 기회가 강유진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행운을 나누어 받을 기회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역대급의 적자를 발표하고도 다음 날부터 오히려 연일 상한가를 찍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말았다.
상한가의 행렬은 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이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대양중공업 주가는 사태가 시작되기 전보다 270%나 올랐다.
물론 그동안 거래량은 거의 실종 상태였다. 간간이 수익을 내기 위해 내놓는 물량은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사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계 제일의 부호 강유진이 개입한 일이니만큼, 아주 큼직한 일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는 대양 그룹 측에서도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