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투자자의 자질
SS파트너스의 대양중공업 주식 매수 사실이 알려진 다음 날, 대양중공업 사주 일가는 다시 회장 자택에 모여 초조하게 주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날 상한가로 마감한 대양중공업 주가는 이날도 장이 시작되자마자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형제 중에 가장 성격이 급하고 거친 장남이 욕설을 내뱉는다.
“이럴 걸 알고 있었잖소. 처음부터 진 빼지 맙시다.”
동생 류근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조용히들 하거라.”
류 회장은 두 아들의 신경전을 두고 볼 여유가 없었다.
“어떻겠나?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
류 회장이 오경덕 비서실장을 보며 말했다.
“네. 다시 상한가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대책을 세워야겠구만.”
“강유진도 강유진이지만, 공매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공매도 상황이 어떠한가?”
“상당 부분은 대양증권을 통해 넣었습니다. 그쪽은 어떻게든 커버가 될 겁니다. 하지만 다른 쪽은 문제가 생길 경우 무마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쪽 정체를 감추고 넣은 거라, 압력을 넣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도 매도가가 여유가 있으니 조금 더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여전히 아쉬움이 남은 류근일이 말했다.
“공매도 평균단가가 45,000원 선입니다. 지금 가격에서 9,000원만 더 오르면 손해가 시작됩니다.”
“어떻게든 버티면 되지 않겠어? 며칠이야 상한가를 찍고, 난리를 쳐도, 결국은 떨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 며칠이 문제입니다. 상한가를 몇 번 찍으면 상당한 액수의 증거금을 추가로 요구해 올 것입니다. 증거금을 내놓지 않으면 청산에 들어갈 거고요.”
“설마 그렇게까지 오르려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성규 그 자식이 있었어야 하는데. 딴 건 몰라도 이런 거 하나는 참 똘똘했는데.”
장남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질 좀 마세요. 이 사단이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데. 쯧!”
류근일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우선 일부만이라도 처리하도록 하지.”
못마땅한 눈으로 두 아들을 바라보던 회장이 말했다.
둘 다 욕심이 너무 많아 문제였다. 이럴 때일수록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데, 둘 다 가진 것을 포기할 줄 모른다.
한창 성장 중인 기업이라면 오히려 장점이 되겠지만, 이제는 슬슬 수성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런 면에선 셋째 근수가 가장 나았다. 손자인 성규도 그렇고.
노인은 이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한번 구도를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서 발휘되는 법이다. 셋째는 적어도 자식이 그룹에 풍파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바로 인정하고 군말 없이 물러설 줄 알았다.
“그렇게 하시죠.”
“어쩔 수 없네요. 우선 두 곳 정도만 정리하겠습니다.”
류근일이 전화기를 들며 말했다.
“어, 난데. 삼환증권하고 유일증권 쪽 공매도 차근차근 정리해. 그래. 최대한 낮은 가격에 매수하는 거 잊지 말고.”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회장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자신의 몸이 전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사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1년 사이에 너무나 지쳐 버렸다. 그룹 계열사들의 실적은 최악이고, 안 좋은 일은 연이어 터져 버렸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막내는 미국에서 큰 사고를 쳐 버렸고, 손자들 중 제일 마음에 들던 녀석도 영 좋지 못한 일에 휘말려 버렸다.
게다가 그 와중에 셋째가 밀려나고 만 것은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룹을 물려받을 두 아들 녀석은 영 미덥지 않다.
“이런!”
노인이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첫째가 소리를 지른다.
노인도 지금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었다. 주가가 갑자기 튀어오른 것이다.
“우리 쪽 매수 물량 때문인 모양이네…… 하아, 자식들. 좀 살살 하라니까.”
“어쩔 수가 없네. 워낙 매도 물량이 없어서.”
공매도에서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수를 감행하게 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말라가는 물량을 짜내니 주가의 급등이 따르는 숏스퀴즈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이게 무슨 짓거리인지.”
두 아들이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영 진중하지가 못하다. 참을성도 없다.
류 회장의 눈에는 이제 아들들의 단점만이 들어온다.
“난 이제 피곤하니 들어가 보겠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하거라.”
억지로 기운을 내서 버텨보려 했지만, 이제는 더 여력이 없다. 어쩌면 두 아들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류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기운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비서실장이 재빠르게 부축했다.
“의사. 의사 불러.”
장남이 뒤에 서 있던 젊은 비서에게 지시했다.
“괜찮다. 가서 좀 누워 있으면 되겠지.”
노인은 비서실장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로 향했다.
“뭐 하고 있어? 그렇게 부주의하게 주문을 넣으면 어떻게 해? 제대로들 못해?”
둘째 아들은 그새 전화기를 들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비서실장의 말처럼 공매도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수익이 날아가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지시 때문인지, 매수가가 아래로 내려가며 주가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회장을 침실로 들여보내고 거실로 나오던 비서실장은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은 작은 이익이나 손실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회장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말이 무소용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 형제들이 경영자로서 그렇게까지 모자라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장이 대양 그룹을 키우는데 세 형제가 각자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니.
하지만 경영자의 자질과 투자자의 자질은 무척 다르다.
한국 같은 환경에서 성공적인 경영자는 넘치는 투지와 정치력 따위가 중요하지만, 투자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냉철한 눈과 자기 객관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
형제에게는 명백히 그런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주가는 다시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한다.
“어이쿠! 또 무슨 일이야? 또 너희 애들 짓이냐?”
장남이 동생에게 물었다.
“이 자식들이 진짜!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제대로들 안 해? 뭐? 주문 넣은 거 없다고? 아니. 그럼 지금까지 뭐 했어? 조금이라도 쌀 때 더 샀어야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류근일은 수화기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친이 자리를 뜨니, 눌러 두었던 성격이 나온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실장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한숨을 감춘다.
장남이건 차남이건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모시기에 너무 힘든 사람들이다.
그날 내내 류근일은 전화기를 들고 수시로 간섭을 하고, 지시를 내리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미 기세를 타 버린 주가를 어찌할 도리는 없다. 더군다나 청산을 위해 매수 주문을 내야 하는 입장이니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도 주가는 결국 다시 상한가를 찍어 버렸다.
* * *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다산 그룹 창업주의 고택에서 한때의 사내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허! 참 무섭군. 저 친구랑은 절대 적이 되면 안 되겠어.”
무섭다고 말하는 다산자동차 사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대양 입장이었다고 생각하면 아주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룹 회장의 3남이며 다산파이낸스 부사장인 김철호가 맞장구를 쳤다.
“생각해 보면 저 녀석은 지킬 게 없어. 가진 게 돈뿐이니, 어딜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고.”
“그나마 부친이 하는 작은 공업사가 있어도, 그걸 공격하면 어떻게 될지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군요.”
“대양은 이제 글렀어. 계속 저 친구한테 끌려다닐 운명이야.”
“방법이 없어요. 방법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결국은 그냥 방어만 하다가 끝나는 수밖에요.”
형제들은 대양 그룹에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사태를 그저 불구경하듯 즐기고 있었다.
대양과 다산은 아주 많은 분야에서 경쟁하고 있으니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수읽기 다 끝나고 시작하는 거 같지?”
“예. 틀림없어요. 지난번 우리 중국 공장 때도 그랬고, 이번 프리스케일 때도 그렇고요. 생각해 보면 우리한테 상하이에서 벌어진 일을 가르쳐 준 것도 전부 계획적이었어요.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냥 운이 좋았다고만은 할 수 없겠어요.”
“한두 번이야 운이지. 세 번, 네 번이 되면 그게 운인가? 먼젓번에 브렉시트에 천억 달러를 걸었다고 했을 때는 여기까지인가보다 했는데, 그날 뚜껑을 열고 나서 얼마나 소름이 끼쳤어?”
“확실히 앞을 내다보는 눈이 무섭습니다. 저런 사람은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됩니다.”
최근 유진과 가장 많은 만남을 가져 온 둘째 김수호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래서 프리스케일을 넘겨받기로 한 것은 어떻게 잘 마무리되었어?”
이날의 모임은 이 때문이다. 다산전자 부사장으로 있는 김수호가 협상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형제들을 모았다.
프리스케일 인수는 단지 전자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예. 오늘쯤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뭐, 그쪽에서도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니 16억 달러만 더 붙이기로 했습니다.”
유진은 89억 6천만 달러에 매입한 프리스케일을 116억 달러에 다산에 넘겼다.
겨우 몇 사람을 써서 거래에 나서게 하고, 몇 달 만에 26억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노이베르거 베르만에 꽤 많은 수수료와 기타 비용이 나가니 실질적으로는 20억 달러를 살짝 넘는 수익이다.
“수수료 빼면 거의 원가에 받은 셈입니다.”
다산 측에서는 유진이 프리스케일 인수에 얼마를 썼는지 알지 못한다.
“150억 정도로 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듣고 있던 장남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유진 그 친구가 위험한 짓은 싫다고 하더군요. 미국에서 일하다 보니 미국 사람 다 되었는지. 뭐, 어쩔 수 없지요.”
다산은 150억 달러에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고, 대신 유진이 요구하는 금액과의 차액을 7대3으로 나누어 리베이트 받기를 원했다.
실제 요구 금액이 120억 달러라면, 20억 달러 정도의 리베이트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어떠한 종류의 불법 자금도 공여할 수 없다고 단칼에 잘라 버렸다.
사소한 불법행위가 나중에 얼마나 위험한 결과로 돌아올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 말이 자기는 담이 작아서 위험한 행동은 못 하겠다더군요. 하하. 브렉시트 타결에 천억 달러를 베팅한 사람이 담이 작다면 대체 담이 컸으면 무슨 짓을 저질렀냐 물었더니, 레버리지를 풀로 당겨 1조 달러를 넣었을 거라더군요.”
“거참. 무서운 사람일세. 1조 달러를 그리 쉽게 말하다니…… 여하튼 아쉬운 일이네.”
한국의 대기업답게 다산 측은 큰 거래에서 으레 약간이나마 드러나지 않는 이익을 보거나, 혹은 반대로 이익을 상대에게 주는 것에 익숙했다.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산 건설을 필두로 다양한 해외 사업을 통해 덩치를 불려온 다산 그룹으로서는 그렇게 비자금을 만들고, 그런 비자금으로 새로 개척하려는 시장에 외부에 밝힐 수 없는 용도의 자금으로 쓰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특히 독재자가 집권하고 있는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하려면 그런 자금이 꼭 필요했다.
10억 달러짜리 사업을 수주하려면 10%의 리베이트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게 아니면 입찰해 봐야 무소용이다.
다산이 서구권 유수의 기업들을 물리치고 수많은 수주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물밑에서 벌어지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이 꽤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유럽 업체들은 그런 면에서 한국에 비해 훨씬 더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야 그런 일이 발각되어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한 번의 부도덕으로 경영진이 통째로 갈려 버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불법 비자금이 나름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여 왔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국의 대기업들이 커 오기 위해서 비자금을 만들어야 했던 것은 단지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억지로 변명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한테 펀드 하나 열어 주겠다고 합니다.”
“펀드? 그 잘나가는 펀드를? 허! 진짜야? 얼마나?”
장남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펴졌다.
“5억 달러가 최고라고 합니다.”
“아, 그 친구.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짜네. 5억 달러가 뭐야. 5억 달러가.”
“그래도 그 친구 수익률을 보면, 사실 5억 달러나 해 주는구나 싶더군요.”
“뭐…… 그렇기는 하지. 안정적으로 그런 수익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1년에 50%만 나도 그게 어딘가.”
“여하튼 호의가 맞는 것은 사실입니다.”
장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나이티드 엑셀런트 쪽에 여유 자금이 있으니 당장 넣으라 해야겠군.”
“그러고 보면 참 복덩이입니다. 그 친구를 알고 나서 이모저모로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그래. 그래도 마냥 믿고 있으면 안 돼.”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천지에 가족 말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네 형제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 깊은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