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03화 (103/363)

103화 블랙스완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장 시급한 것만 해도 무차입공매도에 해당하는 375만 주를 채워 넣어야 했다.

그걸 시장에서 사 오려면 시장가로 7,000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많은 양을 한 번에 매수할 방법도 없고, 매수가 시작되면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누군가에게서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지금 그나마 물량을 보유한 곳은 증권사들이지만, 그쪽도 개미들이 주식 대여를 거부하고 다른 증권으로 옮기겠다고 위협하는 통에 딱히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어떻게든 다른 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노력해 주십시오. 저희 회장님께서 공과가 확실하신 것은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제일 고역인 것은 비서실이다. 여기저기 그동안 만들어 놓은 줄을 이용해 보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대양중공업 주식을 가진 곳에 압력을 넣어 보려는 것이다.

“아니. 윤 보좌관. 자기가 그러면 안 되잖아. 지난번 의원님 선거 때 우리가 어떻게 해 드렸는지 기억 안 나?”

비서실장뿐 아니라 그룹의 비서들은 온종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금감위원장의 실언으로 여론이 나빠지며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정치권이나 행정부나 모두 대양 그룹과 연결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부이사관님. 이제 우리 다시는 안 볼 거 아니잖아요? 뒷일도 생각은 하셔야죠. 예, 그럼요. 당연히 해 드리고말고요.”

끝내 그들은 이런저런 대가를 약속하고서야 증권사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진짜 더럽네. 작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한번 눈도장이라도 찍어 볼까 연락해 오던 것들이.”

비서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대양 일가 장남이 툴툴거린다.

유진과 악연으로 얽힌 이후로 대양 그룹은 국민들의 비호감을 사며 정치권이나 행정부에 행사하던 영향력도 적지 않게 잃었다. 위기에 닥치니 달라진 위상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버지가 기력을 회복하셔야 일이 편한데.”

회장의 몸 상태가 직접 나설 형편이 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끄응, 어쩔 수 없지.”

두 아들에게 부친의 존재감은 딜레마와 같았다. 회장이 지닌 영향력은 필요하지만, 노인이 빨리 쓰러져 버려야 그룹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

“신세기증권에서 3만 7천 주 확보했습니다.”

가까스로 여기저기서 조금의 주식을 끌어올 수 있었지만, 정말 새발의 피다.

증권사들로서도 고객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양 그룹에 빌려줄 이유가 없다.

대양이 로비로 정치가의 압박을 끌어내고 나서야 겨우 몇 주를 던져 줄 뿐이었다.

다음날, 비서실장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실 직원과 여당 인사가 함께하는 회합을 가졌다.

본래 이런 중요한 일이라면 좀 더 무게 있는 인사가 나왔어야 하지만, 세간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실무진의 모임 선에서 절충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권에서 무척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금감원장에게 그런 요청을 한 것이 실수인 모양입니다.”

회합의 결과를 회장의 두 아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오 비서는 상당한 난감함을 표시했다.

그런 말을 요구한 사람은 바로 장남이지만, 그걸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까.

“당장 내일까지 시장에서 사 오든 뭘 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차입을 해결하라고 난리입니다. 청와대에서 불호령이 내려왔다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두 분도 아시지만, VIP가 노하면 우리도 버티기 힘듭니다. 공매도 문제로 끝날 게 아닙니다.”

평소라면 그렇게나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VIP의 노여움을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 시대가 온 지 2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대통령의 권한은 막대하다.

“별수 없습니다. 회장님과 사장님들 지분을 대주해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대양증권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계열사 주식은 여전히 안 될 겁니다. 슬쩍 운을 띄워보니 질색을 하더군요. 대주주가 공매도를 위해 주식을 빌려주면 배임 논란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 더는 막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여당과 청와대는 대양중공업 문제가 더 이상 정치권과 엮이기를 원치 않았다.

배임 문제가 터질 경우 대양은 다시 해결해 달라 읍소할 테고, 문제 해결을 위해 섣불리 나서면 정권에도 흠집이 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야권의 공격이 거센 형편에 그래선 곤란했다.

“공매도는 그렇다 쳐도 그걸 빼내면 강유진의 공격은 또 어떻게 막아?”

“우선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분노를 막는 게 우선입니다.”

여우를 쫓으려다 범을 만나게 된 형편이다. 물론 어느 쪽이 범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그리고 저쪽도 그리 충분한 물량을 손에 넣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주가가 너무 오른 게 그런 면에서는 다행입니다.”

“다행이기는 하지.”

대양중공업을 빼앗기는 것 또한 엄청난 재앙이다.

“대신 대양증권 허가 취소만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오늘도 당장 대양증권 허가를 취소하고 책임자를 기소하겠다며 난리를 치는 것을 간신히 무마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 일부터 마무리해야 합니다.”

“망신이네.”

“하. 어쩌다가…….”

두 형제는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사주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대양중공업 주식을 대차해서 무차입공매도의 결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대양증권을 위한 사주 일가의 헌신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걸 믿지는 않았다.

“당분간 금감원 쪽은 우리와 거리를 둘 것 같습니다. 금감원장 경질이 확정된 모양입니다.”

“곤란한데. 그나마 말이 통하던 사람인데.”

“어쩔 수 없습니다. 다음번 금감원장은 학계 출신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누가 될지 최대한 빨리 알아봐서 미리 접선을 해 봐야겠군.”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 쪽으로 너무 쏠려 있습니다. 분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뭔가 대책은 있고?”

“네. 오늘 오후에 하나쯤 터트릴 생각입니다.”

“그래. 알아서 해.”

- 오늘 기사 좀 수상하지 않음? 하필 이 시점에 연예인이 마약을 했다는 기사가 왜 남?

- 원래 그런 거 검찰이 쭉 관리하고 있다가, 이슈 덮을 게 생기면 터트리는 거임.

- 더럽네. 그럼 무차입공매도는 이제 묻히는 건가?

- 틀림없지. 벌써 포탈은 그걸로 도배되었는데.

- 약해지면 안 돼. 우리라도 끝까지 버텨야지. 영차!

- 영차는 무슨. 날 샜다.

- 영차! 난 죽어도 안 판다.

- 영차! 공매도 세력이 죽든 내가 죽든 끝까지 간다!

탑클래스 아이돌의 마약 복용 사건이 이슈를 집어삼켰다.

다음날은 야당의 지방 의원 하나가 여당 의원을 성추행으로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대양증권 관련 기사는 포탈의 메인에서 보이지 않는다. 검색으로 들어가야 간신히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세가 많이 약해졌다 해도, 대양 그룹의 언론 장악력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식 사이트를 중심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이번 사태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 어제 한 주, 오늘도 한 주 샀음. 매일 저축하는 기분으로 사고 있음.

- 일주일 전에 사서 벌써 세 배 올랐다. 백만 원까지만 가면 판다.

- 공매도 세력들 아주 죽을 맛이겠네.

대양중공업 주가는 이제 매일 상한가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매도 물량이 드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나오는 물량도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결국 두 주째가 지나기 전에 대양중공업 주가는 30만 원을 달성했다.

5조 원의 거대한 적자를 본 기업의 주가 총액이 30조 원에 달하는 기적을 보인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가격이 올라가는 거야?”

“슬슬 개미들도 지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한 번 매도 물량을 쏟아부으면 될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럴만한 물량이 없다. 공매도를 하기 위해 어디선가 추가로 빌려온다 해도, 기세가 꺾이지 않으면 손실이 늘어날 뿐이다.

두 형제가 그렇게 고민에 휩싸여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마진 콜? 어디야? 텔슨앤코? 얼마? 1,500억 원?”

주가가 올라갈수록 공매도 유지를 위한 증거금을 추가하라는 연락이 시도 때도 없이 왔다.

당장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강제 청산당하고, 그러면 다시 주가가 오르고, 다른 쪽 증거금이 늘어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증거금으로 납입한 것이 벌써 3조 원에 가깝다. 이제는 언제 주가가 떨어지나 하루하루 기대하는 방법뿐이다.

더군다나 대양증권을 이용 중이던 일반 투자자들이 다른 증권으로 떠나며 이전하는 대양중공업 주식에 대해서는 급하게 시장에서 사서 채워 넣어야 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가지고 있던 지분이 다시 그걸 위해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 * *

- 40만이다!

- 드디어 40조 회사가 되었구나. 부실 덩어리 회사가 40조라니 웃기네.

- 공매도 세력(이라고 쓰고 대0라고 읽는다.)의 손실은 이제 10조 원이 넘어서고 있네.

- 아직 확정은 아니니까 방심하면 안 됨.

- 아직도 숏스퀴즈 안 나오고 있는 걸 보면 버틸 만한 모양이지?

- 주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거지.

- 잘 버텨야 한다고. 그놈들 원하는 대로 떨어지게 둘 수 없어.

일반투자자들은 공매도 세력의 노림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공매도를 던진 쪽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해서든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버틸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길 천문학적인 손해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드디어 50만 원까지 왔어요.”

요안나가 즐거운 듯 말했다.

“그래, 이제 슬슬 시작해 보지.”

유진은 그동안 숨겨 두었던 자객에게 마음껏 날뛰도록 지시를 내렸다.

“알았어요.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본때를 보여 주자고요.”

“한 번에 치명타를 먹이면 안 되는 거 알지?”

“당연하지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자근자근 상처를 내 줘야지요.”

요안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냉혹한 미소는, 유진이 지난 삶에서 알고 있던 그 월스트리트의 마녀 모습 그대로였다. 역시 그녀는 이런 일에 아주 잘 어울린다.

“사장님. 급한 일입니다. 미국 쪽에서 리콜 요청이 들어왔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자신의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았을 때, 대양전자 류근일 사장은 막 점심을 먹고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참이었다.

“리콜? 얼마나?”

류근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공매도를 위해 빌려온 주식에 대해 반환 요청이 들어왔다는데 기분이 좋을 수야 없다. 또 엄한 비용이 나가게 생겼다.

“113만 주라고 합니다. ABTL 쪽 대차물량의 절반입니다.”

“뭐? 113만 주? 미친 거야?”

류근일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리콜의 요청이 처음은 아니다. 주식을 빌려준 사람이 마음을 바꾸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너무 많다. 100만 주를 당장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지금 주가가 얼마야?”

“조금 전에 52만 원을 넘었습니다. 113만 주면 5,800억 원입니다.”

“윽!”

류근일은 뒷목을 잡았다. 현재가로 5,800억 원이지, 100만 주를 매수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오를지 모를 터였다.

어쩌면 당장 60만 원을 넘어설 수도 있다. 아니. 지금 상황으로 보면 틀림없이 넘는다.

하지만 리콜 요청에 응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공매도를 하기 위해 대주한 주식은 소유자의 요청이 있을 때 반드시 2영업일 이내에 반환해야 한다.

“예탁결제원에 남은 물량이 있나?”

류근일이 희미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물어본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시장에서 구매해서 돌려주던가, 예탁결제원에 나와 있는 다른 주식으로 대체하면 된다. 물론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탁결제원의 물량은 이미 모두 끌어온 뒤였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비서실장은 사과부터 한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이 상황에 리콜이 말이 돼?”

공매도에 실패할 때의 가장 큰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개인이 공매도를 할 경우에는 60일에서 90일까지의 상환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대신 약정된 기간에는 중도 상환의 의무가 없다.

하지만 기관 투자자는 상환 기간이 1년 이상이며 상환 없이 연장도 가능하지만, 중간에 상환 요청이 들어오면 반드시 빌려 간 주식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개인 투자자들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관투자자들의 경우 대개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투자에 임하는 만큼, 그런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한국의 경우라면 2000년대 이후로 겨우 한 번, 그리고 해외에서도 몇 년에 한 번 정도 공매도로 커다란 실패를 보는 경우가 생길 뿐이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그렇게 마음놓고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내부 정보를 자신들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늘과 같이 대량의 중도상환 요청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리콜로 공매도 세력의 대량 손실이 발생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당연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하지 않은 일이라고 반드시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터지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후폭풍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해 엄청난 파급을 미치는 사태를 경제학에서는 블랙스완이라고 부른다.

90년대 후반 롱텀 캐피탈이 그렇게 오판을 하다가 천억 달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규모의 부채로 파산 선언을 해야 했던 것처럼.

만일 앞으로 몇 년 뒤에 미국의 공매도 세력이 개미들의 역습으로 파멸적인 최후를 맞이한 뒤였다면 아마 대양 그룹 측은 조금이라도 더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벌어진 이번 일은 모두에게 예상 밖의 사태였다.

“리콜 연기 요청이라도 해 봐!”

그 리콜 요청이 누구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기에 그렇게 무의미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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