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휴민트
그러는 사이 대양중공업 주가는 70만 원을 넘어섰다. 이때 즈음에 와서는 확실하게 우상향을 하지만 결코 폭등은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되니 슬슬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비자금을 갉아먹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동시에 개미들에게 주식을 내던지지 않도록 안심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했고, 물론 요안나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냈다.
- 아! 틀림없이 숏스퀴즈는 나오는데, 또 폭등은 오지 않네요.
- 그러게 말이에요. 한 번 터져 줄 때도 됐는데.
- 아직 공매도 물량이 충분하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 다들 겁먹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지요. 영차!
- 영차!
그리고 딱히 어떤 선동을 할 필요도 없이 개미들은 대량 매도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를 북돋우기 위해 쉴 새 없이 게시글을 올리고 있었다.
* * *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비서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류 회장의 장남인 대양자동차 사장 류근호가 부친의 비서실장에게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지금으로서는 당장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폭락을 유도하기 충분한 물량도 아직 모이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사태를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7조 원이야! 7조 원! 어떻게 할 거냐고!”
류근호는 쉬지 않고 고함을 버럭버럭 질렀다. 평소라면 부친의 심복에게 이렇게까지 막 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입은 손실이 워낙 천문학적이다 보니 이성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근 일주일 동안 하루에 적게는 수천억 원, 많게는 1조 원이 넘는 손실이 발생해 오고 있으니 제정신이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회사의 비용이나 손실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고스란히 일가족의 비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무릇 대기업 사주의 비자금이란 위기의 상황에서 상황을 반전시킬 최후의 수단이거나, 혹은 그룹이 무너져도 아무 걱정 없이 후사를 기약할 수 있는 종잣돈으로 쓰일 중요한 자산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룹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비자금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자산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다.
비서실장의 말처럼 어찌할 도리도 없다. 무차입공매도가 외부에 드러나며 그걸 해결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빌어온 주식 때문에 엄청난 거액이 증거금으로 묶여 있어서 중도에 포기할 도리조차 없다.
대양 그룹의 두 형제는 장이 열리는 시간에는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장이 끝나면 그날 본 손해액을 보고받고 분노에 치를 떨며 술을 퍼마시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1조 원짜리 청구서를 보고서도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알콜의 기운에 정신을 맡기고 잠시라도 현실을 잊어 보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 이 사태의 뒷처리를 맡은 비서실장과 몇몇 측근들이 대책 마련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애초에 파생에 물리고 빠져나갈 방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날고 기는 월가의 펀드들이 한 방에 나가떨어질 이유가 없다.
아직 술이 덜 깬 눈으로 장남이 비서실장을 향해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사이, 차남 류근일은 반쯤 죽은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가는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주가가 떨어질 이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시장은 명백하게 그들의 적이었다.
* * *
“대양 그룹 회장 비서실장인 오경덕은 20년 동안 회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필해 온 사람입니다. 대양 그룹 회장은 오경덕을 위시로 한 몇몇 측근들을 위주로 대양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회장 비서실과 감사실을 통해 다른 모든 계열사를 통제하고 있어서, 계열사 사장들도 비서실장인 오경덕에 비한다면 훨씬 더 적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존이 대양 그룹의 현 상황과 주요 인물들에 관한 브리핑을 늘어놓았다.
“오경덕은 대양 그룹에 입사한 이래로 가장 빠르게 승진해 선대 대양 그룹 비서실장이었던 유석준의 후임으로 인정받아 이미 20년 전부터 대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이제 막 부사장에 부임한 회장의 둘째 아들이나 셋째 아들에 비해서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980년 CIA에 들어가 25년,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토안보보좌관으로 4년, CIA 국장으로 4년을 보낸 존 오웬 브레넌은 이제 유진의 의뢰로 아메리카 비즈니스 센터, 통칭 ABC라는 평이한 이름을 지닌 경제 관련 정보 수집 기관을 설립했다.
유진이 1년 예산이 5억 달러에 달하는 ABC에 처음 맡긴 임무는 대양 그룹에 대한 보다 면밀한 정보 파악과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해외에 챙겨둔 비자금 규모였다.
존 브레넌은 주로 중동에 대해 정통한 인사이지만, 오랜 기간을 CIA에서 근무해 왔던 만큼 아주 풍부한 인재 풀을 가지고 있었다.
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에서 정보를 수집할 브랜치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선은 CIA 출신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통해 유진이 요구한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주력하고 있었다.
약간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기분이 들었지만, 앞으로의 제대로 된 정보 제공 기관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이 지닌 미래에 대한 정보의 정확도는 점점 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유진 자신의 개입 때문에 결국 그리될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나비 효과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유진이 지닌 부는 단순히 한 지역 경제를 넘어서서 지구적인 파급력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지닌 정보 중 의미가 있는 것은 아마도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 정도만 남을 터이다.
그때가 되면 이제 유진 혼자만이 알고 있던 지식을 토대로 한 투자는 위험천만한 짓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유진의 지식을 보완해 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 존 브레넌에게 정보 수집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을 설립하도록 하고, 따로 설립 중인 싱크탱크에 경제학자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학술적인 분석을 내놓게 할 생각이다.
그렇게 두 방향에서 모인 서로 다른 정보들을 규합하고, 유진이 지닌 미래에 대한 정보가 합쳐지면 아마도 꽤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양 그룹 내부적으로는 크게 세 아들의 파벌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룹의 실세였던 비서실장의 파벌 또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번 그룹 회장을 결정하는 후계 구도에서도 비서실장이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회장의 심복으로 오랜 시간을 일해 오며 적지 않은 불법 행위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이니 포섭하는 것은 어려울 듯싶습니다. 현재 비서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제반 사항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존 브레넌은 유진이 원한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외부에는 완벽하게 감추어져 있는 대양 그룹 회장의 와병 상황까지도 어떻게 한 것인지 알아내어 보고했다.
대양 그룹 회장이 노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싶은 상대가 바로 그 회장인데, 이미 그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버렸다니 흥이 덜하다.
하지만 지난 삶에서 대양 그룹 회장이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앞으로도 두어 해 뒤의 일이었는데, 그 시기가 빨리 돌아오게 된 게 어쩌면 이번 일의 여파 때문이라 생각하니 나름 납득은 할 수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어떤가요?”
“대양자동차 류근호 사장은 최근 거의 술에 취해 산다고 합니다. 대양전자 류근일 사장도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위험할 정도인가요?”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형제간에 언쟁이 오가고, 비서실장과 꽤 심한 다툼이 끊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특히 장남의 경우 전형적인 책임 회피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듯합니다.”
도대체 존 브레넌이 어디에서 그렇게 세밀한 정보를 얻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진은 굳이 그 출처를 묻지 않았다.
브레넌에게 유진이 요구한 것은 합법적인 선에서의 정보 수집과 분석 활동이었다. 그가 알아서 선을 지키며 지시를 이행하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존이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있는 동안 미국의 적들에 대한 고문에 아주 깊은 관련이 있었고, 또한 마찬가지로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드론을 사용해 미국에 해악을 입힐 수 있는 대상자들에 대한 제거 작전 따위를 입안해 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지만, 그건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정도인가요?”
유진은 그 스스로가 처벌을 내릴 때까지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준비해 놓은 시나리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닌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꽤 난처한 것만은 사실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유진은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최측근 외에는 사주 일가가 이번 대양중공업 공매도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양 그룹의 임직원들은 사주 일가가 관련이 있을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인지 자동차와 전자, 그리고 중공업뿐 아니라 전사적으로 사기 저하가 심합니다.”
“그렇겠지요.”
“특히 보스가 대양 그룹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기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인 모양입니다. 신입사원은 물론이고, 경력직 임직원들도 이직할 기회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대양이라는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있다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좀 더 제대로 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한 휴민트 확보에 신경을 쓰겠습니다.”
“이제 기존 대차 물량은 전부 처리했어요. 이제 공매도 사태 이후에 빌려준 물량만 남았어요.”
존이 돌아간 뒤에 요안나에게 반가운 보고를 받았다.
이제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비자금에 이어, 대양 그룹 본진에 대한 다음 단계의 공략에 들어서게 되었다.
공매도 사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다시 추가로 주식을 빌려준 이유는 대양증권의 보증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만일 사태가 그렇게까지 커지지 않았다면, 대양 그룹에서 대양증권의 보증을 들어주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언론들이 공매도 세력과 대양증권의 책임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했고, 정치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대양증권은 무차입공매도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보증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언제고 사태가 진정되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하루에 얼마씩 차근차근 중도상환을 요구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번 대양중공업 공매도 사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대양중공업이 아닌 대양증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양증권이 그들의 목줄을 물어뜯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유세 중간 휴식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온다는군요. 저녁에 시간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네요.”
모니카에게서 트럼프의 전언을 들었다.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만나도록 하지.”
지난번에는 플로리다로 간다는 핑계로 만남을 피했다. 하지만 이제는 적당한 시간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