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영웅과 교황
“꽤 지쳐 보이는군요.”
트럼프 타워의 펜트하우스에서 만난 트럼프의 얼굴은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피로해 보였다.
“조금 귀찮은 놈들 때문에 그래. 약간 피곤하기는 하지만 괜찮아.”
유진은 트럼프가 지금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공화당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공화당 극우 유권자들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당내 유력인사들에게는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더군다나 그 스스로가 일으킨 많은 설화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벼랑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8월에 들어와서는 아주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7월 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키즈르와 가잘라 칸이라는 무슬림 부부가 나와 미국 헌법 책자를 꺼내 들고 ‘법 앞의 평등한 보호’라는 구절을 거론하며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공약에 대해 비판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남편인 칸이 말을 하는 동안 조용히 옆을 지키고 있던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남편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냐며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그런 비난을 퍼부은 사람은 이라크전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숨진 무슬림인 후마윤 칸 대위의 부모였다.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후마윤 칸은 기지에 접근하는 수상한 차량을 발견하자, 동료들을 피난시키고 차량을 막았다.
후마윤 칸의 저지에 의해 기지로 들어가지 못한 차량은 그대로 폭발해 버렸고, 후마윤 칸은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폭사했다.
그 덕분에 입구 옆 식당에 있던 수백 명에 달하는 미군은 자리를 피해 참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은 전사자에 대한 예의를 그 무엇보다 존중하는 나라이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전사자의 유해를 찾으려 애를 쓰고, 참전 용사에 대해서는 최선의 대우를 해 주려는 문화가 있다.
평범한 전사자도 아니고 수백에 달하는 동료들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전쟁 영웅인 후마윤 칸의 부모에 대한 비아냥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가잘라 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들을 잃고 실어증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 내부에서까지 트럼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불타올랐다.
여기서 트럼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다시 불을 질렀다.
“무슬림에 대한 입국 금지는 어디까지나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키즈르 칸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발언으로 재차 설화를 일으킨 트럼프는 그 뒤로도 자신의 발언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오고 있었다.
유진은 트럼프의 설화와 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사전에 짜여진 대로 소양이 부족하고, 세상에 화가 나 있는 일부 계층을 자극하기 위한 쇼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럼프 자신이 그러한 설화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수를 인정하는 행위는 트럼프의 자기 부정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하면 화를 내고, 지적한 사람에 대해 온갖 비난을 퍼부어야 만족하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굉장한 모욕으로 간주한다.
더군다나 뒤끝이 길어,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그 상대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을 되풀이한다.
유진은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한국의 직장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골치 아픈 상사들 말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일말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트럼프의 대응은 결국 더욱 큰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이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뉴스에서는 벌써 대선에서 힐러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크다고 보도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무리 파이팅이 넘치는 트럼프라 해도, 이렇게 끝도 없이 시달리다 보면 피로할 수밖에 없다.
“후마윤 건은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어차피 도널드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결집시킬 뿐이니까.”
하지만 유진은 아직 세상 사람들이 분노한 저소득 백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정을 아직 이해하지 못함을 잘 안다.
그들은 참전 영웅에 대한 모욕보다, 더 이상 유색인이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사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것에 신경 쓸 바에야 러스트 벨트를 더욱 열심히 공략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도널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지요.”
유진은 트럼프 진영의 전략을 지지하고 격려해 주었다. 딱히 트럼프를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전략이야말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최선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사과하고, 발언을 취소하는 따위의 유약한 모습 보이는 것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어차피 날 지지하지도 않을 놈들이나 난리를 피우지, 날 좋아하는 친구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야.”
트럼프는 유진의 말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측근들까지도 다른 것은 몰라도 후마윤 칸의 부모에 대해 비아냥거린 것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서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만큼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트럼프의 캠프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능성이 높은 길을 찾아내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이번 트럼프의 행위가 굉장한 실책이라 판단한 이상 캠프의 분위기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뭔가 반전의 기회가 필요해.”
유진의 격려가 약간의 도움은 되었지만, 트럼프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트럼프를 지지해 오던 퇴역 군인들도 지지를 취소하겠다는 성명을 낼 정도이다.
“소란은 소란으로 잠재워야죠.”
“흠…….”
트럼프가 무슨 말인지 묻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힐러리가 IS(이슬람국가)에 무기를 팔았다는 증거가 나오면 어떨까요?”
유진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거 재미있군. 아주 난리가 나겠어. 그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지. 흐흐.”
도널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아니면 교황이라도 지지 선언을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 늙은이가? 허! 요즘 들어본 농담 중에서 가장 웃기는 소리로군.”
이번에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혀를 찼다.
“듣자 하니 공화당원 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들이 도널드를 가장 지지한다고 하더군요.”
미국의 카톨릭 신도들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당연히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 무척 높은 편이다.
더군다나 카톨릭 신도들의 교황에 대한 신뢰는 상당하다.
만일 유진의 말처럼 교황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라도 한다면 카톨릭 교도들이 트럼프를 찍어 줄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할 리는 만무하다.
더군다나 이해 초 교황은 트럼프에 대해 기독교인답지 않다며 비난한 적이 있다.
평소 트럼프가 이민자에 대해 비난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지지 않고 종교 지지자가 개인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볼썽사납다며 바로 반박했다.
또 폭스 뉴스와의 회견에서는 교황은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라며 다시 한번 어깃장을 놓았고, 교황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animal politicus)로 규정했다. 그가 나를 정치적이라고 말했으니 내가 최소한 사람인 것은 맞겠군’이라는 말로 다시 대응했다.
그러니 트럼프가 유진의 말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 늙은이는 입을 열지 않는 편이 더 도움 돼.”
“만일에 말입니다. 하하. 물론 프란치스코가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요.”
“흠…….”
트럼프가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 자네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고. 뭔가 이유가 있겠군?”
“아. 그냥 농담으로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은 트럼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농담이라, 농담.”
하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유진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난 도널드의 승리를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나만 믿어요. 내 예측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군. 아! 물론 자네가 항상 옳다는 말은 아니야.”
“하하. 정치적으로는 도움을 드릴 게 없지만, 그래도 기쁜 소식은 전해 드려야겠군요. 최근 트럼프 씨의 자신이 다시 3억 달러 정도 늘었습니다.”
“3억 달러? 겨우 석 달 사이에 말인가? 그동안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도널드의 펀드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유세를 다니느라 힘이 드는 것 같아, 힘을 내시라는 의미에서요. 우리가 관리하는 펀드 중에 도널드의 펀드 수익률이 가장 좋은 편이에요.”
“그거 반가운 소리로군.”
트럼프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 아시아가 드디어 순조롭게 런칭했습니다. 이방카 씨도 곧 중국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아 고맙군. 역시 자네를 만나니 기운이 나는군. 하하.”
정말로 그걸로 기운이 났는지, 트럼프는 한동안 유세 기간 있었던 일화를 신이 나서 떠들었다.
대개는 자신에 대한 자랑이고, 자신의 정적들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유진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시간을 보냈다.
트럼프는 허풍쟁이에다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적인 성격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만큼 자기 말을 경청해 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니, 세상에 그처럼 속마음을 마구 드러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애초에 그는 완벽한 속물이었고,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없다.
어쩌면 그러한 트럼프의 모습이 항상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존의 정치인들과 대비되어 수많은 미국인이 그에게 열광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힐러리보다 더 적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힐러리보다 훨씬 더 많은 열광적인 지지자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유진은 이 시점의 미국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과연 잘못되기만 한 선택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이 시점의 미국에는 트럼프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가 아주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럼프와 만나고 며칠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자네가 한 건가?”
트럼프가 대뜸 물어 왔다.
“무얼 말입니까?”
“폴리티칼 인사이더에 올라간 기사 말일세.”
“폴리티칼 인사이더라는 매체도 있습니까?”
유진이 짐짓 모르는 체한다.
“나참.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트럼프가 투덜대었다.
“여하튼 자네 말이 맞았네. 사과를 하는 것보다 힐러리한테 한 방 먹이는 쪽이 옳았어. 흐흐흐.”
트럼프가 신이 나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