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라이터
두 형제는 부친을 두고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거실에 앉은 형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노인네, 이번에는 못 일어나겠지?”
장남 류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힘들지 않겠어요? 나이도 나이고, 충격이 보통이 아닐 텐데.”
“후우…… 충격은 어디 그 노인네뿐이냐? 나도 지금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말이야.”
“이대로 가 버리면 그건 또 그거대로 걱정인데…….”
“그러게 말이다. 아직 제대로 정리도 안 됐고, 지금 상속 비용 마련할 방법도 없고.”
“하. 미치겠네.”
두 형제는 지금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손실은 하루하루 늘어나고 있다. 더군다나 큰 문제는 대체 어디쯤에서 손실을 마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친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이번 공매도에 동원된 몇몇 펀드는 돌아오는 리콜 요청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불보증을 선 대양증권에게 책임이 넘어간다.
최악의 경우에는 대양증권까지 쓰러질 가능성이 있다.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두 형제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IMF 때에도 이처럼 힘이 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적어도 정치권을 통해 금융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너무 다르다. 우선 손해를 보는 공매도 세력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다.
만일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지원은커녕 당장 쇠고랑을 차야 할 것이다.
거액을 잃어 낙심한 형제가 그렇게 한동안 푸념을 하고 있는데, 부친의 비서실장이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 늦었습니다.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래, 어떻게 됐어?”
류근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모은 주식이 100만 주입니다. 이제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오경덕 비서실장이 두 형제에게 물었다.
그동안 공매도를 위해 빌린 주식의 리콜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 주식을 매수하는 와중에, 조금씩 긁어모은 황금 같은 100만 주다.
“이걸로 될 거 같아?”
둘째 류근일이 물었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폭락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유일한 희망은 대양중공업의 주가가 어느 순간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뿐이다.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미 주가는 실제 가치에 비해 수십 배가 될 정도로 올라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가치에 비해 너무 높이 오른 가격은 언제라도 톡 건드리기만 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상식이다.
그걸 위해서는 어떤 트리거가 필요했다. 한 번에 대량의 주식을 던지면, 지금까지 버티던 개미들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같이 던질 것이다.
문제는 그 트리거가 100만 주로 충분하냐는 것이다. 만일 이걸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9,000억 원이나 들여 모은 주식을 허무하게 날리는 셈이다. 물론 어느 정도 회수할 수야 있지만, 또다시 들어올지 모르는 리콜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아깝기 그지없다.
“제길. 어쩔 수 없지. 던져.”
류근호가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누적된 손해로 거의 이성을 잃을 만큼 위태로운 정신상태였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기업을 운영해 오던 경영자답게, 통 큰 결정을 내릴 줄 알았다.
“내일 장이 시작하자마자 던지도록 하지.”
류근일도 형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 사장님들, 오늘 하루라도 편하게 쉬십시오. 내일이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겁니다.”
사실 절반 정도는 스스로도 그리 믿지 않았지만, 오경덕은 열흘이 훌쩍 넘게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하는 류근일과 매일 술에 취해 버티는 류근호를 위해 위로 섞인 장담을 했다.
“그래. 오늘은 사우나라도 하고 푹 쉬어야겠어.”
류근호는 오늘 하루는 술을 피할 생각인 모양이다.
“나도 오늘은 오 실장 말처럼 푹 쉬어야겠어. 고생 많았어.”
류근일도 웬일로 비서실장을 격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비서실장이 거실을 나서는 두 형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회장의 두 아들이 먼저 나가고, 잠시 뒤에 비서실장도 뒤를 따랐다.
주방에서 일하는 여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 잔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들고 온 쟁반에 컵을 전부 올린 여인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아줌마!”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엄마야!”
깜짝 놀란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몸을 돌려 보니, 비서실장을 따라다니는 젊은 비서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뭡니까?”
“뭐. 뭘 말씀이세요?”
여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방금 전에 주머니에 챙겨 넣은 거 말이에요. 그게 뭐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뭐냐니까요.”
사내가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왜, 왜 그러는데요?”
여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사내가 다시 성큼성큼 다가서며 여인의 몸에 손을 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만둬요!”
여인이 다시 뒤로 물러서며 앙칼지게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사내의 손은 이미 여자의 팔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그녀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흠. 이건 라이터네?”
여인의 주머니에는 오직 라이터 하나뿐이다.
“그, 그래요. 라이터예요.”
“근데 이걸 왜 주머니에 챙겼어요?”
“거, 거실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그런 거예요. 내놔요. 거실에 있던 물품들은 전부 제가 관리하니까요.”
여자가 손을 뻗어 남자 손에 있던 라이터를 채 가려 했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눈빛이 왜 그래요?”
사내가 라이터를 든 손을 홱 위로 치켜들며 여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내놓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때 비서실장이 다시 거실로 들어오며 둘 사이의 실랑이를 보고 물었다.
“이 사람이 내가 거실 치우는 걸 방해하잖아요. 실장님이 뭐라고 좀 해 주세요.”
여자가 먼저 고했다.
“수상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말했다.
“뭔가?”
비서실장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글쎄요. 그냥 라이터 같은데, 이 아줌마 이걸 볼 때 눈빛이 아주 날카로웠거든요. 꼭 무슨 임무라도 수행하는 것 같더라고요.”
“흠. 뭐, 거실을 치우는 것도 임무라면 임무겠지. 그거 돌려드리고 나오게. 오늘은 바빠.”
하지만 비서실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젊은 사내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명령을 따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군요.”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여인에게 사과하고, 들고 있던 라이터를 그녀가 들고 있던 쟁반 위에 올려둔 사내는 바로 실장을 따라 거실을 나섰다.
“휴우…….”
두 남자가 거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크게 한숨을 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그러고도 진정이 안 되는지, 여자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잠시 후, 한동안 그렇게 쪼그려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거실을 마저 치우고 쟁반을 챙겨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가지고 온 쟁반을 내려놓고, 다른 여자들에게 비서실장과 그 젊은 비서에 대해 물었다.
“조금 전에 나가시던데? 그 류 비서라고 했나? 새로 온 젊은 사람 말이야. 굉장히 잘생기지 않았어?”
“그러게 말이야. 무슨 영화배우 해도 되겠더라.”
“근데 난 조금 무섭더라. 다른 사람을 볼 때면 웃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때는 눈빛이 서늘해.”
“좀 그런 것도 있지. 그러니까 더 괜찮지 않아?”
여자들은 어느새 얼마 전 새로 들어온 비서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거실을 치운 여인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주방 한쪽의 문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가 직원들이 사용하는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문을 닫고 가지고 온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네. 저 못하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흑!”
말을 하던 그녀가 급기야 눈물을 터트렸다.
“네. 흑! 아뇨. 들키지는 않았는데. 흐윽! 거의 들킬 뻔했다고요. 안 해요. 안 할래요. 흑!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다음에 뵈어도 모르는 척할래요. 흑!”
흐느끼며 전화를 하던 그녀가 자기 할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계속 흐느끼던 여인은 한참 만에야 눈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우…… 진짜 못 할 짓이야.”
뭔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녀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엄마야!”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던 아까의 그 사내를 본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에 누구랑 통화한 겁니까?”
사내가 물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여인이 다급히 부정했다.
“좋게 말로 끝냅시다.”
사내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매는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어.”
그리고 그의 뒤에서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데려가자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위에서 누가 내려오기 전에 후딱 가자고.”
젊은 새 비서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재촉을 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정말로 큰일이 났음을 알아차렸다.
아까는 1층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보처럼 아래로 내려오는 바람에 큰일이 나게 생겼다.
“마, 말씀드릴게요.”
여자가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우리 가서 얘기합시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회장님 비서실장이 항상 데리고 다니던 덩치 좋은 비서였다. 어쩐지 능글능글하고, 무섭게 생긴 남자이다.
“아, 안 돼요! 말씀드릴게요. 여기서. 흑!”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온다. 어디를 가자는 건지 몰라도, 결코 좋은 곳이 아닐 것은 명백하다.
“허, 허 서방님이에요. 흑!”
겁에 질린 여자가 결국 실토했다.
“허 서방? 비켜 봐.”
뒤에 서 있던 덩치 좋은 사내가 젊은 새 비서관의 몸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허 서방이면 미국에 있는 허 사장님 말하는 거지?”
사내가 여인의 팔을 거칠게 잡으며 물었다.
“윤 차장님. 가서 말씀 나누지요.”
그때, 젊은 비서가 제지했다.
“응? 아, 그래. 내가 흥분했네. 갑시다, 아줌마. 가서 우리 자세하게 이야기 좀 나눠 봅시다.”
“아, 안 가요. 절대 못 가요. 흑! 여기서. 그냥 여기서 말씀드릴게요. 흐윽!”
“하. 말로는 안 되겠네. 야! 끌고 가자.”
덩치 좋은 윤 차장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젊은 비서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의 몸 뒤로 가서 그녀를 들어 올렸다.
힘이 좋은지, 여자의 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진다.
두 비서관은 그대로 조용히 화장실을 나와 지하층의 주차장으로 그녀를 끌고 가 밴에 태웠다.
차에는 이미 누군가가 운전대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몸을 묶은 뒤 밴의 뒤쪽에 실었다.
“난 가 볼 테니, 또 다른 문제 없는지 살펴 봐.”
윤 차장이 젊은 비서에게 말했다.
“네.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 아주 수고했어. 나중에 실장님께서 따로 한 말씀 하실 게다.”
윤 차장은 새 비서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사이, 윤 차장이 차 문을 닫았다.
여자를 실은 차가 주차장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도 지하로 내려오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사라진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성실 씨는 왜 안 보여?”
여자가 사라지고 난 뒤 한참 뒤에야 주방 사람들이 그녀의 부재를 깨달았다.
“아. 성실 여사님 조금 전에 몸이 좋지 않아 퇴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느새 지하에서 올라온 젊은 비서가 말했다.
“그래? 어디가 아픈 거래?”
“글쎄요. 저도 잘은…… 여자분께 자세히 여쭤보기도 그래서…….”
사내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여하튼 나중에 한소리 해야겠네. 그걸 나한테 말하고 가야지. 쯧! 류 비서,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시원한 거라도 한 잔 줄까?”
“뭐. 주시면 고맙죠. 하하.”
사내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