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 여자의 원한
“허 사장님과는 약간의 친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쪽과 대양 그룹 사이가 그렇다 보니 위문 한 번을 못 갔네요. 그렇다고 모르는 척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사람, 어쩌다가 사고가 났는지 알고 있어요?”
“아뇨. 교통사고라고만 들었습니다.”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요. 하지만 아무래도 근호와 근일 두 사람이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경덕 그 사람도요.”
“오경덕이라면 대양 그룹 회장님의 비서실장 아닌가요? 그 사람과 허대웅 사장님의 죽음이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데이비드의 일관된 반응에 회장 부인이 다소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언제까지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건가요?”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를 말씀해 주셔야 저도 편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좋아요. 그날 사고가 있기 조금 전에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다더군요. 상황이 급해 제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한테 전해 줄 말이 있다고 했어요. 혹시라도 자기한테 문제가 생기면 당신한테 연락하라더군요. 더 물어보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고요.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예요. 자, 이제 당신이 말해 봐요.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이 나한테 당신을 찾아가라고 한 거죠?”
여자가 데이비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저도 솔직하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나도 이제 그만해야겠군요.”
생각보다는 줄다리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허 사장님과 약간의 약조가 있기는 했습니다.”
“무슨 약속이요?”
“허 사장님께서는 대양 그룹의 미래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계셨죠. 이대로라면 침몰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침몰을 시키려는 것은 당신들이었죠.”
여자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설마 지금 우리와 잘잘못을 논하러 오신 것은 아니시겠죠?”
“좋아요. 우리 쪽, 아니 류근수 그 사람이 시작한 일인 것은 맞아요.”
여자는 모든 책임을 이미 자리에서 물러난 류근수 대양중공업 사장에게 미루었다.
“그래서 지금 대양중공업과 대양증권까지 엉망이 되었잖아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요?”
“뭐. 그건 제가 대답 드릴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니로군요. 더군다나 대양중공업과 대양증권에 생긴 문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고요.”
“정말인가요?”
여자가 데이비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데이비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역시 그 사람을 만나야겠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보스는 무척 바쁘신 분이라서요.”
“나한테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 11%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도 있고요.”
여자가 핸드백을 열고 USB 메모리를 꺼내 놓았다.
“이건 뭔가요?”
데이비드가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다.
“허 사장이 갖고 있던 메일에 남겨져 있던 녹음 파일이에요.”
“그걸 왜 제게 보여 주시는 건가요?”
“그거야말로 제가 물어 보고 싶은 거예요. 이건 우리 집의 누군가가 몰래 녹음을 해서 허 사장에게 보낸 거예요. 어째서 허 사장은 이걸 녹음했고, 어째서 날 당신과 만나게 한 걸까요?”
여자의 질문에 데이비드는 잠시 고민했다.
“허 사장님은 대양 그룹이 침몰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와 손을 잡는 쪽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하셨죠. 대양 그룹이 쓰러지면, 자신이 대양 그룹을 맡으시려는 계획이시더군요. 그런 이유로 우리 쪽에 협조를 구하신 거죠.”
“협조라. 과연 협조가 맞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허 사장이 원한 협조가 무언가요? 자기가 대양 그룹의 수장이 되는 것이 전부였나요?”
“아뇨. 부인과 류근석 군의 장래에도 관심을 두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류근석 군에게 대양 그룹 주력 계열사 하나쯤은 맡기실 생각인 것 같더군요.”
여전히 데이비드는 회장의 사위와 회장 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었다.
데이비드의 말을 들은 여자는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좋아요. 그 사람과 했던 협상. 이제 내가 물려받겠어요.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 줄게요. 대신 우리 근석이가 대양상사를 받았으면 해요. 내가 가진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이면 그정도의 가치는 있을 거예요.”
데이비드는 대양인터내셔널 지분이 대양 그룹 순환출자의 고리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라면 11%의 지분은 현 회장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그녀의 지분이 그 정도는 아닐 터인데,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아마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말인 듯하다.
“역시 제가 확답을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요. 그리고 어떤 것을 해 주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고요.”
“우리 집안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드리지요.”
그녀는 허 사장이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딱히 필요한 정보는 없습니다. 아까 부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대양 그룹은 스스로 쓰러지고 있는 썩은 거목에 불과할 뿐이죠.”
“그럼 달리 무얼 원하는 건가요?”
데이비드의 냉담한 반응에 여자가 조금 당황한다.
“글쎄요.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협상에 능숙하시네요. 좋아요. 그렇다면 기다리겠어요. 당신들이 내거는 조건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대신 내 조건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우리 근석이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근호, 근일 두 사람이 파멸하는 걸 꼭 봐야겠어요.”
여자는 지금껏 참고 있었던 원한으로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 * *
“아무래도 그녀와 사위 사이의 관계는 평범한 불륜 이상인 모양이더군요.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이렇게 불리한 협상에 나선 이유는 어쩌면 단순히 아들 걱정 때문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데이비드가 유진에게 이날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 두 형제가 허대웅의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확실한가?”
“적어도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일로 두 형제와 회장의 비서실장 사이에 조금 언성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만일 그 여자가 그 일로 원한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이용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래. 그 여자와는 우선 협력 관계로 하지. 그렇다고 딱히 무얼 요구할 건 없어.”
아무래도 몸이 달아오른 쪽은 그쪽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상대를 조급하게 만들 것이다.
그날, 유진은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또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양자동자 류근호 사장이 입원했다고 하네요.”
요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모양이지.”
듣기로는 혈압으로 쓰러졌다고 하는데, 그동안 매일 술에 절어 살아 더욱 건강이 상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이 안 좋은 모양이다.
“회장과 자동차 사장이 동시에 그런 꼴이니, 대양 그룹 측에서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존 브레넌으로부터 대양 그룹에 대한 상당히 세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정보를 얻고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정보의 신뢰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전자 쪽은 어때?”
“류근일 사장이 지금 급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주로 대양인터내셔널 주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부친과 큰형이 쓰러졌으니, 이걸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바쁘겠네.”
유진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어서 껍데기만 남을 그룹이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과 같은 대양 그룹을 손에 넣을 기회를 결코 놓치기 싫은 모양이다.
“류근호 사장이 빨리 일어나지 못하면, 둘째인 류근일 사장이 대양 그룹을 손에 넣게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다른 주주들도 병석에 있는 사람이나, 아직 경륜이 부족한 그 자식들을 지지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래. 앞으로도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어.”
“이제 공매도 물량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략 6% 내외입니다. 이걸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던 물량을 풀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대양중공업 사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 있었다.
“지금까지 회수한 수익은 130억 달러입니다. 하지만 대양 그룹 쪽의 손실은 적어도 170억 달러 이상으로 확인됩니다.”
대양중공업의 주가 폭등 사태 와중 이익을 본 사람들은 물론 유진만이 아니다.
어차피 큰 이익을 보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니 유진도 수십억 달러의 미실현 이익에 대해 큰 아쉬움은 없다.
“외국인들이 공매도 리콜에 요청하지 못해 대양증권이 책임지게 된 손실이 4조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무차입공매도가 논란이 되며 대양증권이 억지로 떠맡은 보증금은 공매도 세력이 지불 능력이 없다고 파산 선고를 하며 고스란히 대양증권의 손실로 남았다.
지난해에 대양증권 순이익이 겨우 7천억 원 수준이니, 4조 원은 거의 6, 7년 분의 이익에 해당한다. 사실상 파산 선고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손실이다.
이로써 대양 그룹의 금융 계열사 중 큰 역할을 담당하는 대양증권은 난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계열사들로부터 긴급하게 수혈을 받고, 금융당국을 통해 은행의 대출을 받았기는 하지만, 그런 큰 손실을 본 증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안나는 보유하던 물량의 상당수를 시장에 풀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공매도 물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파악하고 있던 다른 주주들도 슬슬 발을 빼려 하고 있던 참이라, 대량의 물량이 나오자 너도나도 물량을 던져 버렸다. 당연하게도 대양중공업 주식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던지는 사람만 있으니 매일같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거래 물량은 없고, 장이 시작되기 무섭게 하한가로 떨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대양중공업 공매도 사태는 꽤 큰 후유증을 남겼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비자금이 날아간 거야 그저 외국계 펀드들의 대실패 정도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무차입 공매도의 위험성이 대중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한편으로 지금까지 외국인과 기관들만 별다른 규제 없이 공매도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시민들의 비난에 정치권에서는 잘못된 관행을 고치겠다며 새로운 법안을 내놓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제대로 된 법안이 나올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법안이라는 것이 처음 입안될 때에는 그럴듯해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며 누더기가 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대양중공업 사태는 그렇게 여러 의미로 한국 사회와 경제계에 여파를 남기고 있었다.
* * *
“이번에 수입이 괜찮았지?”
대양 그룹 회장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로운 비서는 주말의 휴식을 맞아, 강남구의 한 고급 클럽 프라이빗 룸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그럭저럭 1,000억은 될 거 같아요. 삼촌.”
상대는 유진의 전 약혼녀에게 성폭행과 폭력 등으로 고발을 당한 그 류성규였다.
1심에서 징역 2년의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 중인 류성규는 경기도의 한 조용한 전원 마을에서 은거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상 별다른 제지 없이 강남의 모처에 마련된 곳에서 지내며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