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혼외자
“1,000억이라. 30배 정도인가?”
“타이밍이 좋았어요. 삼촌 말대로 그 시점에서 올라탄 게 적중한 모양이에요. 우리가 들어간 가격이 25,000원이고, 엑시트는 70만 원이니 30배가 조금 안 되죠.”
류성규는 자신보다도 나이가 어려 보이는 비서를 항해 조금도 거리낌 없이 삼촌이라 불렀다.
“하하. 그 인간들, 자기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동안 네가 벌어들인 돈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기뻐하겠군.”
류 비서도 자기보다 형뻘인 성규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삼촌 거예요. 자금을 댄 건 나지만, 이 일을 계획한 건 삼촌이잖아요.”
“약속을 지켜 주면 나야 고맙지.”
“우리는 운명 공동체에요. 끝까지 같이 가는 거예요. 대양을 집어삼킬 때까지.”
“운명 공동체라. 그거 듣기 좋은 말이네.”
“뭐. 1,000억이라고 해도 대양 그룹을 차지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액수기는 하지만요.”
“그래. 택도 없지. 하하. 그런데 이 술 꽤 괜찮네?”
류 비서가 자신 앞에 놓인 글라스에 담긴 술을 입술에 적시며 말했다.
“맥캘란 라리끄에요. 2년 전에 한국에 딱 10병밖에 안 들어온 술이죠. 그때 한 3,000만 원쯤 했는데, 지금은 남아 있는 술이 거의 없을 걸요. 뭐, 오늘 같은 날에 딱 좋은 술 아니에요?”
“굉장한 술이네. 그럼 이 한 잔이 내 월급보다 많겠군.”
“슬슬 이런 거에도 익숙해질 만하지 않아요? 삼촌도 어엿한 대양 그룹 회장님의 아드님인데 말이죠.”
류성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이라…… 하하. 그래,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말이야.”
“인정받는 거 아무 의미도 없더라고요. 날 보세요. 아들이라고 집에 들여 놓고 어떤 취급들을 했는데요.”
두 사내의 눈빛에는 아주 지독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참! 그 노인네는 어떤가요?”
말없이 위스키 잔을 비우고 나서 성규가 물었다.
성진정공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세계적인 거부가 된 유진과 틀어지고, 그의 약혼녀를 성폭행하고 협박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 순간부터 사실상 가문에서 퇴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성규는 전처럼 내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다.
“여전하지. 며칠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슬슬 갈 때가 다 된 모양이야.”
“흠. 곤란한데.”
“맞아. 곤란하지. 아직은 좀 더 버텨 줘야 하는데 말이야.”
절대 부친과 조부의 건강을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다. 그저 일을 그르치게 될까 걱정될 뿐이다.
“큰아버지도 안 좋다고 했죠?”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라더라. 혈압이 내리고, 술병도 나은 모양이야.”
“흠…… 그 사람은 좀 더 누워 있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이죠.”
“여하튼 당분간은 둘이 이번에 입은 피해를 파악하고, 또 노인네 가 버린 뒤의 일을 대비하느라 정신없을 거야.”
“네. 그러면 계속 일을 진행해야 할 텐데. 언제 하실 건가요? 소송은?”
류성규가 꺼낸 소송이란 말에 류 비서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더 늦기 전에 해야겠지? 노인네 가 버리고 나면 영 힘들 테니.”
“그러는 편이 낫겠어요. 삼촌이 소송에서 승리하고 나서 상속청구 소송까지 들어가면 꽤 복잡해지겠죠.”
“그래. 내가 얼마만큼이라도 받아 내면, 지금까지의 구조가 뒤틀릴 거야.”
“이번에 얻은 1천억이 있어 다행이에요. 그때를 대비한 비용으로 쓰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여하튼 이건 그 절반이에요.”
성규가 가방 하나를 꺼내 놓았다. 류 비서는 가방을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래.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지 넣을 테니.”
“그러지 말고 삼촌도 조금 즐기면서 살아요. 500억 에서 몇억이나 몇십억쯤 모자란다고 대세에 큰 영향은 없을 테니까요.”
“돈도 써 본 사람이나 쓸 줄 알지. 나 같은 사람은 만 원짜리 한 장 쓰는 것도 계산부터 하게 된단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익숙해지라고요. 당장 일주일 동안 1억 쓰기 정도만 해 봐요.”
“그래. 한 번 생각해 보지.”
류 비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 볼게. 나중에 보자.”
돈과 서류 따위가 섞인 가방을 챙긴 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여자애들 이쁜데.”
“이쁜 여자 다 필요 없어. 너도 데일 만큼 데였잖아?”
“그래서 이젠 그런 여자들은 안 만날려고요.”
성규는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여하튼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아주 시원했다고요.”
“그거 작업하느라 힘 좀 들었어. 그나마 멍청한 녀석을 찾아내 다행이었지.”
“세상에는 참 멍청한 놈들이 많다니까요.”
“그래도 그 여자 명이 질긴 모양이더라. 벌써 움직일 수 있다던데?”
“그렇다더군요. 뭐, 그래도 제까짓 게 이제 어쩌겠어요?”
“알았어. 그럼 또 보자.”
류 비서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은 없는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류 비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규의 얼굴에는 한동안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결코 호의에서 나오는 미소는 아니었다.
클럽을 나온 류 비서는 주자창에 세워져 있던 차에 가방을 싣고 어디론가 향해 차를 몰았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뒤에 도착한 곳은 경기도의 한 저층 아파트 단지였다.
늦은 시간이라 주차장이 가득해 한참 만에 간신히 빈 곳을 찾아 차를 세운 류 비서는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고는, 가방을 열고 얼마간의 현금을 꺼내 봉투에 담았다.
봉투를 품에 넣고 차에서 내린 류 비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누군가가 톡톡톡 뛰어왔다.
“하아, 하아…… 왜 여기 있어? 들어오지 않고?”
류 비서를 향해 달려온 여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렇게 뛰어올 거 없는데. 이모는 어떠시니?”
“뭐. 그렇지. 그냥 누워 계셔.”
“그래? 병원은 언제 가지?”
“며칠 있다가. 근데 정말 안 들어갈 거야?”
“어. 뭐 줄 게 있어서 잠깐 들른 거야.”
챙겨온 봉투를 여자에게 건네주자, 여자는 익숙한 듯 그걸 받아 들었다.
“이렇게 계속 돈이 어디서 나와?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월급은 뻔할 텐데.”
“이번엔 조금 많이 넣었어. 병원비하고, 너 필요한데 써. 앞으로도 매달 그만큼씩은 줄게.”
“많이? 아!”
여자가 봉투를 열어보고는 가득한 오만 원 권을 보고 깜짝 놀란다.
“대체 이게 얼마야? 아니,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어?”
“보너스.”
“진짜? 그럼 이거 오빠가 모아. 다 우리 주지 말고.”
여자가 봉투를 도로 류 비서에게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나한테는 그거보다 훨씬 더 많으니까.”
“진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걱정된다는 듯 류 비서를 바라보며 여자가 물었다.
“회장 비서실이라 비밀을 지켜야 할 것도 많고, 대신 급여도 높아. 달리 비서가 아니라니까.”
처음으로 류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지? 우리 때문에 엉뚱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어. 그럼 난 간다.”
류 비서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가 떠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무언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혼외자라는 말이지요.”
- 네. 아마도 그런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존 브레넌이 새로운 정보을 알려 주었다. 대양 그룹 회장에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혼외자가 있다고 한다.
지난 삶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는 것에 유진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국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 호적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정황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은 회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류성규와 어떤 커넥션이 있는 모양입니다. 함께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흠…….”
류성규가 지금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베일에 싸여 있던 회장의 혼외자와 연관이 있을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다.
유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류성규라면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그 두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봐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쉽게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그저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과, 류성규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걸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다.
존 브레넌과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모니카가 들어왔다.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보스.”
보고를 하는 모니카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문제가 생겼다면서도, 오히려 웃고 있었다.
“뭔데? 아!”
모니카가 건네는 태블릿을 받아 보다가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보고 유진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수영장에서 반라의 두 여인이 서로를 껴안고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꽤 어두운 시간에 찍었는지 해상도가 낮은 사진이었지만, 유진은 그 수영장도,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두 여인들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려 사진을 조금 위로 올리자, 기사가 올라온다.
[할리우드의 여배우 사라 델비안이 연인으로 알려진 유진의 저택에서 동양계 여인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
“누가 찍은 거지? 파파라치가 집안으로 들어왔나?”
유진은 그 사진 속 상황보다, 어째서 이런 사진이 찍혔는지가 더 궁금했다.
“사라가 친구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열었던 모양이에요. 그중 한 명이 찍어서 신문사에 판 것 같아요.”
LA의 벨에어에 있는 저택은 유진이 비울 때면, 사라와 그녀의 연인인 지나가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사라 때문이 아닌 그녀의 연인인 지나 민을 위한 호의의 표시이다.
한편으로는 유진이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에서 보내고 있는 만큼, 그 큰 저택을 그냥 놀리는 것보다 누구라도 사용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침 벨에어와 지나의 연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사라와 지나는 편하게 그곳을 자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친구들을 초대할 때도 있던 모양인데, 하필 그중 질이 좋지 못한 사람이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젠 슬슬 사실을 밝혀야 하지 않겠어요?”
모니카를 비롯한 측근들은 유진과 사라의 관계가 결코 로맨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라가 뉴욕에 들를 때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관계였다. 한편으로는 사라와의 거래 때문이기도 했고.
“사실을 밝히고 말고 할 게 따로 있었나?”
지금까지 유진은 사라와 연인 사이임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뭐.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이만큼 왔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사라와 함께 길을 걷거나, 식당에서 자리를 함께하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미국 제일의 부호와 아름다운 여배우의 커플 사진은 어느 매체에서도 비싼 값으로 사 주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할리우드 스타의 경우 그저 걸어가는 사진 한 장만으로 수백 달러, 그리고 자극적인 사진이면 수만 달러까지도 받는다고 한다.
지금 미국에서 유진의 인기는 여느 할리우드 스타에 못지않다. 그리고 사라 또한 연기보다는 외모로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정상급 여배우이다.
게다가 아마도 유진과의 열애설이 난 뒤로, 그녀의 인지도는 전보다 몇 배나 상승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진과 사라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찍으려는 파파라치들이 꼬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유진 또한 자신의 인지도를 위해서 그런 사진이 찍히는 것을 적당히 용인했다. 사실상 사라뿐 아니라 유진 자신도 사라를 이용한 면이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