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선물 보따리
“사실 그때 말들이 조금 많았어요. 강 회장 정도 되면 그래도 알아서 먼저 뭔가 액션이 있어야 하지 않냐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고 막아섰었죠. 미국에서 큰일 하고 있는 사람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이에요.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열심히 자기 일하는 사람을 찝쩍거리고 말이에요.”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이거 감사드려야겠네요.”
유진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겼다.
“감사할 거야 없죠. 강 회장이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바닥이 좀 그래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깨어 있어서 될 일 안 될 일 구별을 하는데, 예전 사람들은 아직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 열심히 하고 있는 경제인들을 뜯어먹을 생각을 한다니까.”
김충식 의원은 자신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려는 듯 혀까지 차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여하튼 내가 우리 당 의원들한테는 잘 말해 놓았어요. 괜히 강 회장한테 쓸데없이 껄떡대지 말라고들 말이에요. 그러니 지금처럼 하시는 일만 열심히 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
“정말이에요. 정치인은 자기 할 일만 해야지, 괜한 사람 괴롭히면 안 돼요. 강 회장이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고, 또 한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게 얼만데.”
김 의원은 자신이 강 회장을 위해 열심히 나서 주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런데 대양 그룹하고는 아직 풀 게 남았어요?”
그리고 말미가 되어서야 은근하게 용건을 물어 온다.
“풀 거라…… 글쎄요. 풀 거라기 보다는 한국 재계가 정상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정상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주가가 실제 성과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받는 원인에는 대기업의 잘못된 문화들이 한몫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으음…….”
“하청기업을 쥐어짜는 거야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불투명한 회계 처리라든지, 기형적인 지배 구조라든지, 주주들에 대한 대우 같은 것은 틀림없이 고쳐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지, 정상화. 정상화 그거 참 좋죠.”
말을 하다 말고, 김 의원은 술잔을 비운다.
그러자 저쪽에 서 있던 소믈리에가 조용히 다가와 잔에 술을 채우고, 이번에는 설명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참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정상화라는 게. 어떤 면에서 보면 또 뭐가 정상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도 많고요.”
김 의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대통령님께서도 사실은 걱정이 많으십니다. 기업의 잘못된 관행이야 고쳐 나가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 와중에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생기고, 그러한 부작용도 뒤따르지 않겠어요? 그럼 반드시 고통받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에요.”
김 의원은 자신의 방문이 단순히 유진과의 친분을 쌓으려는 정도가 아니라 여권 내부의, 그리고 대통령의 의지를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넌지시 알리고 있었다.
“암을 제거하려면 때로는 통증이 있을 때도 있지요.”
“물론이에요. 잘못된 관행. 꼭 고쳐야 하는 거 맞아요.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급진적이냐에 따라 피해가 생각보다 커질 수도 있단 말이지요.”
지금의 여권에서는 유진과 대양 그룹 사이의 분쟁이 몰고 올 여파를 걱정하는 모양이다.
“만일 피해가 생긴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정상화가 되면 짧은 시간이나마 받았던 통증 또한 충분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겠지요.”
유진은 자신이 대양 그룹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젊은 분이 굉장히 강직하시네. 하하. 솔직히 말해서 강 회장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먹힐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김 의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대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군요.”
“아니. 죄송할 거야 없지. 그래도 내가 부탁 하나만 하지요. 대양 그룹이랑 강 회장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 같은데, 그래도 뭔가 벌이려면 우리랑 상의라도 한 번 해 줘요. 국회 회관에 모여 있다가 어어!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차리고, 나중에 뒷수습만 하려면 쪽팔리거든. 허허.”
김 의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진은 한국식 대화법에 능숙하다.
“여하튼 전할 말은 다 전했으니, 이제 그만할게요. 그런데 이 와인 참 괜찮네요.”
“다나 에스테이트 2007년이로군요. 한국 사람이 만든 와인입니다.”
“오! 그래요? 한국에서도 이런 와인이 나와요?”
“한국 사람이 캘리포니아에서 운영하는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거죠. 저명한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가 무려 두 번이나 100점 만점을 준 와인입니다.”
“그래요? 내가 와인은 몰라서. 그래도 대단하네.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와인을 만들어서 100점을 맞고. 꼭 강 회장을 보는 거 같아요.”
“하하. 저도 그래서 이 와인을 즐겨 마시고는 합니다. 이국 땅에서 성취를 보여 주는 고향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좋은 일이지요.”
그 와이너리의 주인이 한때 정부 고위 인사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준비한 술이지만, 김 의원이 와인에 조예가 없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맞아요. 아주 좋은 일이지요.”
김 의원이 연신 감탄을 하며 와인을 마셨다.
“정말로 좋은 일이에요. 강 회장이 잘 되면 우리도 좋은 거지. 강 회장이 이렇게 바쁜데 내가 만나자고 하는 것도 실례 같아.”
어딘지 뼈가 있는 듯한 말이었다.
“요 며칠 빠질 수 없는 약속이 계속 있어 김 의원님께 실례를 했습니다. 어제도 에릭 홀더 전 법무부 장관과 중요한 할 말이 있었습니다.”
유진은 한국 사람들이 권위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특히 미국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그야말로 꿈에도 그릴 만한 일이다.
“아. 그런 중요한 자리가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급하게 만나자고 한 내가 미안하네요. 하하.”
대한민국 중진 의원이라 해도, 미국의 현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이라는 요직을 지낸 사람과 비교하면 무게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법무부 장관이 사실상 유진의 직원이기는 하지만, 거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릭 홀더 장관님은 전에 대통령님과 워싱턴에 갔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서로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말아서 참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러시다면 언제고 한번 두 분의 만남을 주선해 보도록 하지요.”
“정말입니까?”
유진의 제안에 국회의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에릭 정도의 거물과 사적인 만남의 자리를 갖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저 바다 건너의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최근 10여 년 사이 부쩍 올라갔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변방의 이국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의 정치인들보다는 차라리 20여 년 전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거물급 정치인이 오히려 미국에서는 훨씬 더 인정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다음 미 정권도 민주당에게 돌아갈 것이 유력한 상황이니, 이번 정권에서 오랜 시간 법무장관을 맡아온 사람과 약간이나마 연분을 맺을 수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에릭 홀더 장관이 퇴임하신 뒤에 쉬고 계신 모양이라, 우리 회사 법률 고문을 부탁드렸거든요. 아마 그 정도 부탁은 들어 주실 겁니다. 다음에 뉴욕에 들르실 때, 미리 한번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약속을 잡아놓도록 하지요.”
“우리 강 회장 대단하시네요. 내가 아주 감탄했어요.”
얼마나 좋은지, 희색이 만연한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하나쯤 챙겨 주는 것이 유진에게 나쁠 것은 없다.
더군다나 김 의원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다른 정치인들에게 유진과의 만남에서 얻어 낸 것을 자랑한다면, 모두들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리라.
사실 유진은 지금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김 의원에게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제법 유능한 정치인이고,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당에서 힘을 발휘할 사람이다.
아쉽게도 대선에는 나가지 못하지만, 언제나 차기 대선후보 중 상위에 오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비위를 맞추어 주거나, 굽실거릴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적당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챙겨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 의원님 둘째 아드님께서 증권사에 다니고 계시다던데요? 제가 아는 친구가 뉴욕에서 자산운용사를 운용하고 있는데. 마침 한국 증시 전문가를 찾고 있다더군요.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아드님께 권유라도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아. 우리 강 회장 마음 씀씀이가 넓으신 거야 알고 있었지만, 세심하시기까지 하시네요.”
유진이 풀어놓는 선물 보따리가 하나씩 열리자, 김 의원은 이제 우리라는 말까지 붙여 가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한국의 증권사에 다니는 것과 뉴욕의 투자회사에 다니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연봉의 차이는 물론이고, 커리어 면에서 차이가 훨씬 더 컸다.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 김 의원으로선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대양 그룹과의 일은 크게 문제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게 늘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지요.”
선물을 풀었으면, 요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진이 알기로 김 의원은 능력 있고 요령 있는 정치인이지만, 그렇다고 무결점의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다. 또 유진에게는 오히려 그런 사람이 편하다.
“그렇기야 하죠. 세상일이란 것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까보다 훨씬 더 유한 태도로 김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정치권에 부담이 가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 기회를 보아 만회하도록 하지요.”
유진은 자신이 대양 그룹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정권에 피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김 의원이 대양 그룹과 큰 관련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오히려 제일 그룹에 가까운 인사였다.
여권의 중진 인사 가운데서도 하필 대양 그룹에 가까운 인사가 아니라, 제일 그룹에 가까운 사람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제일 위쪽에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었다.
만일 정말로 유진을 말리고 싶었다면, 대양 그룹의 손을 탄 정치인이 왔을 것이다.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강 회장이 말한 것처럼 정상화를 위한 과정이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요. 하하.”
김 의원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몇 마디 말로도 유진이 대양 그룹을 이대로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 의원에게는 그걸 말릴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었다.
그보다는 이 기회에 유진과의 인연을 돈독히 하고 싶은 생각만 강해질 뿐이다.
그날의 만찬 자리는 이후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유진이 내민 선물에 마음이 흡족해진 김 의원은 소믈리에가 따라 주는 와인을 연거푸 마시다가 결국은 완전히 취해 유진의 저택에 마련해 준 방에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 *
김 의원이 돌아가고 며칠 뒤, 유진은 다시 대양 그룹을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퓌클러 짐머만의 특허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우선은 법무팀을 맡고 있는 에릭 홀더를 통해 대양중공업을 건드리는 것으로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