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어떤 하루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강유진의 짓인 것 같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자식이 다산 쪽과도 친분이 있고, 미디어포커스인가 하는 데도 손을 썼겠지.”
“큰일입니다. 정치권에서 그룹 계열사에 대해 검찰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 정치권에서까지? 뭣들 하는 거야? 지금까지 우리한테 받아먹은 게 얼마인데?”
비서실장의 말에 류근일이 와락 얼굴을 구기며 분개했다.
“아무래도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모양입니다. 이제 정권도 후반기로 들어서고 있는데, 괜히 그룹과 얽히기 싫다는 거지요.”
“빌어먹을! 그래서, 아무 방법도 없다는 건가?”
“우선 최대한 손을 써 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검찰 수사만은 막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아…… 그래. 형은 어때? 이제 일어날 수 있다며?”
“예. 오늘 출근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어.”
경쟁업체인 다산 자동차의 프리스케일 인수 소식과 연일 계속되는 폭로로 대양 그룹의 모든 계열사는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대양전자와 대양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계열사 주가도 동반 하락 중이다.
한때 그룹사의 주가 총액이 100조를 넘어가던 대그룹이 이제는 그 1/3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이 재미있게 되어가고 있네요. 흐흐.”
하지만 대양 그룹에 관련된 모두가 이 위기에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게 말이야. 근호, 근일 형제는 지금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난리를 치고 있는 모양이야. 오 실장 혼자 정신없이 두 사람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이지.”
“그러게 주인을 잘 만나야죠.”
“오 실장이 내 주인이야.”
“하하. 그런가요? 재미있지 않아요? 얼마 있으면 그 오 실장이 삼촌 하인이 될 텐데?”
류성규의 웃음 섞인 말에 류 비서가 자중한다.
“쓸데없는 소리는 할 필요 없고. 어때. 네 부친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 난리가 난 상황에 여기 있었으면 같이 똥물을 뒤집어썼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대양중공업 부실의 책임을 남한테 미룰 수는 없는 거잖아?”
“왜 없어요? 미룰 사람이야 많지요.”
류성규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 참. 너희 같은 인간들은 뭐든지 남한테 떠넘겨 버리는구나.”
“뭐. 삼촌도 슬슬 배우셔야죠. 위에 서려면 책임을 넘기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고요.”
“그래. 옆에서 열심히 보고 배우는 중이야.”
“내일은 유나이티드 엑셀런트에 대한 심층 기사가 올라갈 예정입니다.”
미디어포커스의 김상기 대표 기자가 유진에게 알려 왔다.
“보내 주신 자료들 덕분에 아주 훌륭한 기사를 낼 수 있겠습니다.”
존 브레넌의 사설 정보기관은 유나이티드 엑셀런트의 지배 구조와 대양 그룹과의 관계에 대해 유진이 요청한 이상으로 상세한 정보를 확보해 넘겨 주었다.
일개 탐정 사무소 정도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정보들이 충실하게 들어 있어, 미디어포커스에서는 따로 추가 취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비정상적인 루트로 얻어낸 정보인 만큼 사실 확인이 어렵지만, 어차피 한국에서는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사항들이라, 관할권이 아니다.
“잘 됐군요. 내일도 좋은 기사를 볼 수 있겠어요.”
“대양 그룹처럼 비도덕적인 기업은 이번 기회에 따끔한 맛을 봐야 합니다.”
“그렇죠. 이젠 대기업도 잘못된 관행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온 거죠.”
유진은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덕분에 아주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부터 미디어포커스는 대기업의 부도덕한 실태를 보도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기사를 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정보를 얻어 내기도, 증거를 찾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몇몇 언론에서 기껏 힘들게 대기업의 불법적인 행위를 발견해 기사로 실어도, 사회는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장 다른 언론사부터가 대기업의 편을 들어주고 나섰다.
검찰에서는 늘 흐지부지 조사를 하다 말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허점투성이 상태로 재판에 들어간다.
증거가 확실해도 법원에서는 솜방망이 처벌로 몇억 원의 벌금과 집행유예로 사건을 종결시켜 버린다.
정권의 눈 밖에 난 경우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대기업의 잘못된 행동이 제대로 된 심판을 받은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사회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IMF를 이끌고 온 원흉 중 하나인 대기업이, 그동안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사주의 개인적인 축재를 위해 사용해 왔다는 의혹은 모두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언론들도 지금까지 드러난 부정 축재 의혹의 규모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태의 주인공 자리에는 바로 미디어포커스가 있었다.
이미 프리스케일 인수 사태 때부터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의혹을 재기해 왔고, 이번에도 대양자동차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아주 충실한 정보와 함께 보도했다.
대양 그룹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반대급부로, 미디어포커스가 시민들의 큰 지지를 얻어 가고 있었다.
때문인지 이번 기획 기사에 참여한 모두가 아주 의욕에 넘치는 모양이다.
- 아! 망했네. 대양중공업은 그렇다 쳐도, 대양전자 넌 왜 이러는데! 작년에 사서 반쪽 났다.
- 그러길래 누가 대양 그룹 주식을 사랬냐? 강유진이 이를 갈고 있는 거 알면서 들어간 니가 바보.
- 그러게. 작년에 강유진이랑 대양 그룹 사이 벌어진 일을 보고 처분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네.
- 강유진이 대양 그룹 인수할 거 생각해서 잔뜩 사 놨는데 어째서 아직도 가만히 있는 거냐?
- 그러니까 말이야! 빌어먹을 류 씨 집안 다 쫓아내고, 강유진이 먹어 버리면 좋잖아?
- 위기가 기회야. 지금이야말로 대양 그룹 저가 매수의 기회지. 지금 쌀 때 사놓고, 강유진이 인수하고 나면 개꿀 아님?
- 그래서 언제 인수하냐고!
그렇게 세간에서는 강유진이 대양 그룹을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존의 대양 그룹 계열사 주주들까지도 차라리 빨리 강유진이 대양그룹 인수에 나서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김 의원. 이번에 뉴욕 가서 얘기 잘 끝내고 오셨다면서요?”
“예.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더군요.”
여당의 중진인 국회의원 김충식은 자신과 비슷한 무게의 홍 의원의 질문을 받고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또 이러면 됩니까? 아니. 김 의원이 뉴욕에 가서 통보하고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일을 저지릅니까?”
“일을 저지르다니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다산전자가 무슨 반도체 회사를 인수한다는 거, 보니까 그 친구가 자금을 대기로 했다면서요? 그리고 대양자동차가 미국의 유망한 벤처기업을 인수하는데 딴지를 건 것도 그 사람 짓이 아닙니까?”
아주 작심하고 왔던지, 홍 의원은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다산전자가 미국 반도체 회사를 저렴하게 인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거야 좋은 일이지요. 대양전자에서 30조 원을 주고 사려 했던 걸 겨우 10조 원에 사게 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축하해줄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대양자동차의 벤처기업 인수 건은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거고요. 강 회장이 대체 무얼 어쨌단 말씀이신지요?”
“아니.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하필 시기가 공교롭잖아요?”
“공교롭다라……. 공교로운 것은 대양 그룹 쪽이죠. 10조 원짜리 회사를 30조 원에 사겠다고 하질 않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껍데기 회사를 수천억 원을 들여 인수하지 않나.”
생각과는 다른 김충식의 반응에 홍의원이 얼굴을 붉힌다.
“아니! 이거 보세요, 김 의원! 무슨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이 일 잘하는 기업을 그렇게 매도하면 되겠어요?”
“홍 의원님께서 류 회장 은혜를 많이 입은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만하면 할 만큼 했어요.”
김 의원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대양 그룹 편을 들어준다는 거예요?”
“의리 지킨다고 괜히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서 함께 가라앉지 마세요.”
“뭐예요?”
홍 의원이 벌컥 화를 낸다.
“어차피 류 회장도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거 같고, 해외에 숨겨 두었던 비자금도 이번에 전부 털어먹은 거 같아요.”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중진급 국회의원 정도 되면 일반인은 접하지 못하는 정보를 잔뜩 갖고 있기 마련이다.
“얼마 안 남았어요. 거기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슬슬 정리하세요.”
김 의원이 미국에 가서 유진과 회기애애한 만남을 하고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어지간한 정치인들은 벌써 대양 그룹과 유진 사이의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권력의 부침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 그들 정치인이다.
하필 대양 그룹과 연관이 가장 적은 김 의원을 특사로 보낸 것도, 그리고 김 의원이 유진에게 좋은 소리만 늘어놓고 온 것도 모두들 앞을 내다본 수 놓기였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나한테 충고하는 겁니까?”
“홍 선배.”
김 의원이 나지막하게 홍의원을 부르며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치계에서도 선배이고, 사법고시에서도 두 기수 선배이고, 학교도 딱 두 해 선배이니, 사적인 자리에서는 선배라 부르는 것이 스스럼없다.
지금은 나름 공적인 자리이지만, 호칭 하나 바꿔 부르는 것으로 조금 더 진솔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험! 험! 뭡니까?”
“정치 여기까지 하고 마실 겁니까?”
“그게 뭔 소리요?”
“슬슬 다음 순서도 생각하셔야죠. 다음 선거, 2년 남았습니다.”
김 의원이 말한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다. 정치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있는 궁극적인 자리를 둔 다툼이 이제 2년 앞으로 다가왔다.
“강 회장이랑 척을 지고, 다음 선거에서 후보가 될 자신 있으십니까?”
“뭐요? 그 인간이 뭐 여기 한국에 뭔 대단한 인맥이 있다고. 나 참.”
“강 회장이 누군가를 대선 후보로 낙점시키지야 못하겠죠. 여태까지 한국에서 정치인들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 놓은 것도 아닌데. 하나…… 그렇다고 후보에 못 들게 하는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김 의원이 싱글거리며 홍 의원에게 물었다.
“아니. 그건…….”
홍 의원이 흠칫한다.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김 의원의 지적을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당장 그에게 매달리는 대양 그룹 사람들의 간청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것뿐이다.
사실 홍 의원은 대양중공업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홍 의원의 지역구에는 대양중공업이 들어와 있고, 의정 활동에도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아 왔다.
당장 대양중공업 임직원들이 내고 있는 후원금이 끊기면 갑갑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더군다나 류 회장에게는 차기 대선에 전폭적인 지원까지 약속받았었다. 하지만 대양 그룹에 닥친 위기로 그런 지원도 이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였다.
홍 의원으로서는 그런 모든 사태를 일으킨 유진이야말로 눈엣가시나 다름없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애걸복걸하는 상황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김 의원. 어찌 생각을 돌려 볼 수는 없겠소? 솔직히 말해 내가 류 회장하고 얼굴을 돌릴 사이는 아니란 거 알지 않아요?”
“그 류 회장도 이제 과거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있네요. 선배, 선배 한 사람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에요. 홍 선배가 언제까지고 거제의 희망으로 남으셔야 지역을 위해서도, 국가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김 의원은 홍 의원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려 했다.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야.”
“이미 늦었습니다. 금융감독원에서 대양증권에 대한 감사에 들어갈 겁니다.”
“뭐라고?”
“이번에 공매도 사태로 대양증권 부실이 한계를 넘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잖아요. 대양증권 문 닫을 겁니다.”
“아니.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거야?”
홍 의원이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선배도 아시지 않습니까? 최종 결정자가 누구인지.”
김 의원이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홍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청와대에서마저 대양을 버렸다면, 정말로 이젠 가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