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자유지상주의자들
“동생분이 세계 암호화폐 거래 시장에서 상당한 지분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유성은 비트멕스, 코인베이스, 비트렉스같이 미국 암호화폐 거래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코인 거래소에 절대적인 지분을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코인 거래소라면 대개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 동생분의 사업이 유진과 관련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약간의 도움은 주었습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설립이나 투자, 그리고 발전 방향 등에 대한 조언과 필요한 자금을 대 준 것이니, 결코 약간의 도움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투자 이후로는 거의 유성의 손에 맡겨 놓고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암호화폐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물론이지요. 비트코인의 가격이 2013년의 전고점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과 달리 다른 알트코인들의 성장세도 눈에 띌 정도이고요. 솔직히 앞으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들이 어디까지 올라가게 될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시다면 암호화폐 자체에 투자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암호화폐 거래소라는 것이 그다지 수익을 내지도 못하고 있고, 또 장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피터 틸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어떤 산업이든 결국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은 플랫폼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죠. 증권 거래로 따지면 증권거래소나 중계업자들처럼 말이지요. 암호화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개별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는 등락에 따라 적지 않은 위험을 부담해야 하지만, 암호화폐 거래소라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요.”
상당한 혜안을 가진 사람이다. 하기는 그러니까 페이팔에서 팔란티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성과를 보여 올 수 있었겠지.
“사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유진 때문입니다.”
피터 틸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미래에 대해 가장 정확한 눈을 가진 사람을 찾으라면 역시 유진이겠죠.”
“그렇게 봐 주시니 고맙군요.”
피터 틸의 유진에 대한 평가는 사실 많은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무엇보다 유진이 도널드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피터 틸이 유진에게 공감하고 있는 것은 유진의 투자 실적이 아니라, 트럼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널드는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자 중 가장 훌륭한 비전을 갖고 있고, 또 반드시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할 인물입니다.”
유진도 피터 틸이 보수적인 공화주의자이며, 실리콘밸리에서 보기 드문 트럼프 지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실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에서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였다.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라면 도널드가 아무런 내실도 없는 허풍쟁이이며,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업가들은 대개는 유진의 눈앞에 있는 피터 틸이나 코크 형제처럼 이념적으로 미국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소수에 불과하다.
“더 이상 미국이 외부에 눈을 돌리고, 쓸데없이 국력을 낭비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당장 중동에 나가 있는 미군을 철수시킬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미국의 경제는 호전되겠지요.”
갑자기 이야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미국의 선거로 흐르고 있었다.
피터 틸은 열렬하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토로했다.
“솔직히 트럼프가 완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잘못 흘러가고 있는 미국을 바로잡기에 도널드만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재미있는 의견이군요.”
유진은 누군가와 정치에 대해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특히 피터 틸처럼 젊은 시절부터 자유지상주의의 우월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사상가와는 말이다.
피터 틸은 대학 시절부터 진보적인 사상의 동기들과 늘 논쟁을 벌여 왔고,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대학 신문을 발행할 정도로 적극적인 행동을 펼쳐 왔던 사람이다.
“도널드가 이번 대선에 승리할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지요.”
유진의 대응은 그 정도였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확실히 유진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에요. 지난번 브렉시트에 대해서도 그랬었죠.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당연히 이번 일도 그러겠죠. 우리 모임에서 친구들도 그런 말을 하곤 해요. 유진이 지지하는 것만 봐도 트럼프의 당선은 100% 틀림없는 일이라고.”
피터 틸이 우리 모임이라 칭하는 것은 틀림없이 페이팔 마피아일 것이다.
페이팔 마피아에는 피터와 함께 대학 시절 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사람들도 몇몇 끼어 있었고, 그들은 피터의 요청으로 페이팔에 참여해 마찬가지로 큰 부를 획득한 뒤, 또 각기 새로운 사업을 벌여 다시 부를 불려 나갔다.
피터의 대학 시절 친구들뿐 아니라 페이팔 출신 인사들 상당수가 피터처럼 공화당을 지지하고, 자유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트럼프에게 지지를 표시하고 있는 유진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 페이팔을 창업할 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느 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화폐 체계를 만드는 거였죠.”
“놀라울 정도로 앞선 식견을 갖고 계셨군요.”
사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이상은 그 모든 정부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완성이다.
그리고 각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화폐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체제이니, 결국 정부에서 발행하고, 지불을 약속하는 화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기술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충분한 기반을 갖추지 못했었죠.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정부에서 발행하는 화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암호화폐는 발행도 유통도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각 개인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획기적인 시도입니다. 난 이번 기회를 결코 놓칠 생각이 없어요.”
“그렇지요. 암호화폐의 가장 큰 장점이 그런 것이니까요.”
하지만 반면에 가장 큰 단점 또한 그것이다. 화폐의 지불을 약속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암호화폐는 적절한 가치를 보장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출렁일 수밖에 없다.
어제는 사과 하나의 가치를 갖다가 오늘은 사과 100개, 그리고 내일은 20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을 어떻게 화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몇 년 동안 암호화폐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고민해 왔어요. 그리고 사실 적지 않은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암호화폐의 거래를 중계하는 기관이더군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그쪽으로 새롭게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피터 틸이 미소를 지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암호화폐 거래시장을 선점한 사람이 있더군요. 그것도 다름 아닌 유진의 동생이었어요. 아!”
피터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유진이었어요.”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유진을 바라보는 피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하게 시장에 먼저 진출한 정도가 아니더군요. 적어도 전 세계에 스무 곳에 달하는 거래소가 유성의 영향권 아래에 있더군요. 역시 당신은 비즈니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어요. 시장을 완벽하게 독점해 버렸더군요. 도저히 유성과는 경쟁할 방법이 없어요.”
비록 독일에서 태어나 이민 온 독일계 미국인이지만, 피터 틸은 전통적인 미국 자본주의자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 분야들은 몇몇 독점주의자들에 의해 각각의 분야마다 하나의 거대한 기업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가 철도와 해운을 독점하려 했고,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석유 시장을 독점했다. 앤드류 카네기는 철강산업을 손안에 넣었고, 존 피어폰트 모건은 월가를 손에 쥐었다.
피터 틸 또한 그런 독점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실 그뿐 아니라 다른 페이팔 마피아들 또한 가능하다면 비슷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독점방지 따위는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방해하는 악법으로 여길 뿐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각자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완벽한 경쟁이야말로 이들의 가장 커다란 목표이다.
그런 그들이 트럼프와 유진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사실상 그 무능력 때문에 세상에 대한 통제를 포기할 것이고, 유진은 자신의 능력으로 단시일 내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성과를 올렸다.
“암호화폐가 점점 힘을 갖게 되면 아마도 국가에서는 암호화폐에 대해서도 통제를 하려 나설 것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사상이 어떻든, 앞을 바라보는 시야만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년도 남지 않은 암호화폐의 비상기가 찾아오면 대부분의 국가가 암호화폐를 국가에서 통제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때 암호화폐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사람이 유진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안심이 되는군요. 한 개인으로서 국가의 압력에 맞설 사람은 지금 시대에 오직 유진 한 사람뿐일 겁니다.”
“엄청난 찬사로군요. 솔직히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와 처음으로 유진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야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와 대항한다는 말은 어떤 자리에서라도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더군다나 유진은 아직 외부인이다. 지금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조심해도 모자라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밖에서 한정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피터는 이제 자신이 페이팔 마피아들의 대표로 유진을 만나러 왔음을 밝혔다.
“유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내 회사에 가장 큰 투자를 한 사람도 유진이니 말이에요.”
역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도 꺼낸다.
“맥스도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 합니다.”
페이팔 창업의 두 주역 중 하나인 맥스 레브친은 캐글이라는 빅데이터 회사를 창립했고, 유진은 그 회사의 지분도 갖고 있다.
“우리가 당장 투자를 위해 모을 수 있는 돈이 약 40억 달러 정도 됩니다.”
한 모임에서 가볍게 각출해 낼 수 있는 자금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돈이다.
“그 정도의 자금이라면 차라리 새롭게 거래소를 만드는 편이 낫겠군요.”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유성이 수십 개의 거래소에 관여하며 사용한 돈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아니, 지금까지 유진이 암호화폐 관련으로 사용한 액수를 모두 합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경쟁에는 관심이 없어요. 확실한 아이템을 선택해서, 우위에 서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그 자리는 유진 당신이 차지하고 있고요. 지금 와서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피터의 투자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뭘까요?”
페이팔 마피아는 틀림없이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미국의 경제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혁신적인 위인들의 모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실리콘밸리의 정복자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정복자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애플이다.
페이팔 마피아의 대표적인 부자에 올라서는 일론 머스크가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한 시대를 이끈 대단한 혁신가들과 손을 잡는 것은 유진에게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대등한 무언가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