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폭탄 세일
유진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은 달러를 비롯한 각국의 통화를 대체할 수 있는 가상 화폐를 발행하려는 음모를 수시로 꾸미게 된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리브라’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도에 나선다.
기존의 암호화폐가 가진 불안정한 가치를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스테이블 코인의 형태로 수십억에 달하는 페이스북 시민들이 실제 국가와 상관없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시도 역시도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페이스북이 가진 영향력이 너무 큰 탓이다.
각국의 정부, 심지어 미국 정부에서조차 페이스북에서 발행하는 화폐가 가진 위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나선다.
수십억 인구가 사용하는 가상 화폐는 이미 더 이상 가상 화폐라 부를 수 없다.
어쩌면 세계의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를 위협할 수도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심지어 유럽 연합에서까지 각국의 통화 담당자가 우려와 규제를 언급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시도였다.
일개 개인이 발행하는 암호화폐였다면 이 정도까지의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내 페이스북은 이 야심 찬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된다.
“굳이 유진과 함께해야 할 이유가 뭔가요?”
당연한 질문이 날아온다.
“페이스북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죠.”
“맞아요. 앞으로도 페이스북이 가상화폐 사업을 시작하면 많은 난관이 있을 거예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마크 저커버그의 차세대 플랜이다.
당연히 수많은 명석한 사람들이 지금도 문제점과 방안을 모색해 저커버그에게 보고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는 이미 자신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크다. 너무 큰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기존의 암호화폐를 도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발행 권한을 갖지 않는다면 프로젝트 존립의 의미가 사라진다.
몇 년 후 페이스북이 출시할 리브라는 여러 경제 주체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디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발행하려 하지만, 순전히 달러에 패깅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발행의 이점을 잃어버리게 되어 결국 포기하게 된다.
페이스북의 거대한 규모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낼 경우 엄청난 경제적인 수익을 보장받겠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화폐를 발행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페이스북 생태계에서만 유통되는 화폐를 발행하는 계획이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을 겁니다. 다음번에는 미국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반발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페이스북이 진출 중인 국가들에서 퇴출되는 것도 각오해야 할 겁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일이 커지기 전에 포기할 것이다.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의 굳은 입술과 눈매는 결코 포기라는 것을 모른다고 외치고 있었다.
“정공법이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요.”
“물론이지요. 마치 해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군요.”
“페이스북 생태계를 포기하는 겁니다.”
“음…….”
유진의 말에 저커버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아마도 이미 고려하고 있던 모양이다. 물론 유진이 말한 방법을 실행하려면 페이스북 단독으로는 무리다. 누군가가 함께 힘을 모을 사람이 필요하고, 바로 그 사람이 눈앞에 있다.
사실상 페이스북이 발행권을 가지고 있지만, 페이스북에서 통용되지 않는 평범한 암호화폐를 만든다. 페이스북에서 통용되지 않으니 시장에서는 그다지 반응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암호화폐는 페이스북과 무관하게 발행되어 시중에 풀린다.
단지 기존의 화폐와 다른 것은 가치의 변동이 심한 화폐가 아니라, 충분히 유력인에 의해 보장받는 안정적인 종류의 통화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그것이 유력한 화폐가 되면, 여러 사이트와 함께 페이스북에서도 시범적으로 통용을 시작한다.
시간을 들여 차분하게 서두르지 않고 해당 화폐가 페이스북은 물론 다른 많은 사이트에서 통용되게 만든다.
이 경우 페이스북은 단독 발행 권한은 얻어 내기 어렵다. 화폐의 가치를 보장해 줄 만한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한 번 함께 생각해 봅시다.”
젊은 독재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직은 완전한 협력이 아니라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보자는 의미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유진도 손을 내밀어 마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악수를 했다.
“그런데…….”
손을 놓고 나서 마크가 입을 열었다.
“아까 하신 말씀 말이에요. 설마 그냥 농담이죠? 농담 맞는 거죠?”
마크는 유진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정말로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왈칵 들었던 모양이다.
“농담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농담입니다. 하하.”
유진은 여전히 모호하게 농담인 듯 아닌 듯 웃음을 터트렸다.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크는 욕심이 많고 신의가 없는 사람이다. 동업자의 뒤를 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인물이다.
그런 마크에게 직접 찾아와 제안한 것은 그만큼 마크가 세워 놓은 제국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의 제국에는 페이스북은 물론이고 차세대 SNS인 인스타그램,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활성 사용자를 가진 메신저 왓츠앱까지 포함되어 있다.
유진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역시 당장은 마크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에 방문한 이상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둘이 부재중이란다. 실례라기에는 뉴욕에서 날아오며 바로 연락한 유진의 실책이다.
두 사람은 며칠 뒤에나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차라리 LA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제프도 그곳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제일전자 한 부사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LA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연락을 받았다.
- 아!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한정훈입니다.
급한 일이라 하여 전화를 받아보니 목소리가 영 좋지 않다.
“아직까지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유진은 그가 어떤 일로 전화를 했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제일전자에서 출시 중인 스마트폰이 배터리에 화재가 일어나는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제일전자는 창사 이래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제일전자에서는 거의 두 달가량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10월에 들어가며 마침내 사태는 서서히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을 보면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 네. 사실 내일 제품 단종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미 구매한 제품은 전부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 줄 예정이고요.
“지금까지 생산한 제품이 얼마나 되지요? 100만 대는 넘죠? 꽤 골치 아프겠군요.”
- 150만 대입니다.
한정훈이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무척이나 시달린 모양이다.
150만 대의 리콜에, 주력 생산 제품 중 하나의 단종이라면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하다.
비록 화재가 발생한 휴대폰의 숫자는 겨우 수십 대에 불과했지만, 소비자로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대폰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자체가 엄청나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의심은 제일전자의 다른 스마트폰에까지 옮겨 가고 있었다.
- 혹시 우리 제일전자 주식 갖고 계시면…….
그가 유진에게 전화한 이유는 너무 명확했다. 내일 시장 발표 이후에 매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유진이 제일전자 주식을 팔았다는 소식이 시장에 흘러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고민 중이었습니다.”
- 강 회장님…….
천하의 제일전자 후계자가 누군가에게 이런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내일의 발표로 주가 하락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고, 만일 어느 정도 이상 떨어진다면 최근 들어 제일전자의 실질적인 선장을 자임하고 있는 한 부사장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갈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과 제일 그룹 차기 수장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한 부사장에게 있어서는 치명타와 다름없는 일이다.
-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기어이 그의 입에서는 부탁의 말까지 나온다.
한 부사장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굴욕이었다.
사실 재계의 거물이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은 예전에는 아마도 흔히 일어나던 일이다.
재벌 가문의 창업자들이 회사를 일구어가는 과정에서야 얼마든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대가 흘러 창업자가 아닌 이가 회장 자리에 서게 되면, 기업을 이루어 낸 당사자보다 오히려 더 권위적으로 되기 마련이다.
“한 부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유진이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 네? 그럼?
“좋아요. 내일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한 번 막아 보지요.”
- 저. 정말이십니까?
한 부사장은 단순히 주식을 팔지 않겠다는 말을 넘어 주가 하락까지 막아 보겠다는 말에 흥분해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부사장 일이 아닙니까.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어려울 때는 도와야죠.”
-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 부사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연신 인사를 했다. 만약 전화 통화 중이 아니었다면, 눈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절이라도 했지 싶다.
“그러니 주가 걱정은 마시고, 대책 마련이나 충분히 해요. 사람이 심란하면 머리도 안 돌아가더군요.”
- 물론이죠. 주가 문제만 아니면 큰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장담하시니 믿어 볼게요. 그럼 오늘 하루 편히 쉬도록 해요.”
- 알겠습니다, 회장님. 내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재벌 3세 치고는 사회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일 제일전자에서 뭔가 발표가 나면 바로 하락할 거야. 8% 정도 떨어지면 그때부터 주워 들여.”
유진은 뉴욕의 요안나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
- 8%나요? 이번 사태에 대해 뭔가 대단한 발표를 하려는 모양이지요?
“아마도. 최대한 많이 받아. 음, 오늘 주가에서 3% 오를 때까지.”
- 그렇게나요? 알았어요.
“그리고 매수 시작하고 3%까지 오르면 미디어에 연락해서 매수를 알리고. 내용은 적당히 알아서 해.”
- 제일전자의 잠재력은 충분하고, 투자 가치는 아직 높다 정도면 되겠지요?
언제나처럼 요안나는 보스의 의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제일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판매된 모든 제품에 대해 아무런 조건 없이 교환 또는 환불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비록 문제가 된 제품은 전체 생산량의 0.002%에 불과하지만, 혹시라도 불안하실 소비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날 오전, 제일전자에서는 약속했던 발표를 시작했다.
“이번 사태로 불안해하는 소비자에 대한 추가 보상은 없나요?”
“이번 사태로 제일전자가 입게 되는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가요?”
기자들의 요청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동안, 제일전자의 주가는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