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한국 제일
- 8%까지 떨어졌습니다. 매입 시작합니다.
요안나에게 보고가 올라오던 시간, 유진은 벨에어에 있는 저택에서 헐리우드의 인사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와 주최한 파티에는 그동안 유진이 투자했던 영화의 주역들이 주로 초대되었다.
간간히 요안나에게서 상황을 보고받으며, 유진은 이날의 게스트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
사라와 지나도 이번 자리에 함께했다.
그녀들은 유진이 자신들의 관계를 지켜 주기 위해 한 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특히 사라를 위해 연인 노릇을 해 준 것이나, 지나의 부모를 설득해 준 것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워했다.
“사라 쪽은 어떻게 됐어?”
어찌 보면 지나의 부모보다 까다로운 쪽이 사라의 부친이다.
지나의 부모는 유진의 설득 때문인지, 딸의 여자친구를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라의 부친인 아서는 그동안 몇 번 정도 유진에게 연락을 취해 사라와의 관계를 이어 가지 않겠냐는 의사를 넌지시 건네오고는 했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뭐.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네요.”
사라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부친은 딸의 애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실 더는 지원을 받을 생각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기로 했어요.”
사라는 부친과의 절연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안 되는 것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요.”
“그래.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자금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실험을 전부 해 볼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인지 몰랐어. 유진 말이 맞았어.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금이 필요해.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당신 같은 자본가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 만일 그 돈이 아니었다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지금의 성과를 얻어 내지 못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영영 불가능했을지도 몰라.”
눈을 반짝이며 최근의 성과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머지않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빠른 성과보다는 완벽한 결과가 훨씬 더 중요하니까.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청구하고.”
“물론이지. 인류에게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지만, 그전에 확실하게 끝낼 수 있어.”
때때로 자의식이 과한 개발자들은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는 한다. 하지만 지나의 연구는 그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굉장히 너그러운 분이네요.”
지나와 사라와의 대화가 끝나자 유진의 곁으로 다가온 한 여인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 같으면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 버린 옛 남자를 그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어린 시절 프렌즈를 무척 즐겨 봤었거든요.”
“아하! 사실 나도 그랬어요. 하지만 로스에게 일어난 일이 결코 내게 일어나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이 빌어먹을 리버럴 월드에서는 흔한 일인 모양이에요.”
할리우드의 배우치고는 보수적인 여자였던 모양이다. 하기는 사실 미국에서도 양쪽 끝인 캘리포니아와 뉴욕을 제외하고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할리우드의 여배우라고 반드시 개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맞아. 영화와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진의 주변으로 적지 않은 여배우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한마디씩 던진다.
“조금 뻔뻔스럽네요. 현 애인을 데리고 오다니.”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유진은 그제서야 그녀들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라와 헤어진 유진은 이제 공식적으로 솔로의 몸이다. 그것도 아주 핫하고 매력 넘치는 매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부를 일군 솔로 남자.
항상 세간의 주목을 끌어들이길 원하는 할리우드 인사들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유진은 살짝은 부담을 받았지만, 그도 세간으로부터 주목받는 것을 꺼리는 성격은 아닌지라, 여유롭게 그녀들의 저돌적인 대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요안나는 제일전자의 주식을 부지런히 사들이고 있었다. 덕분에 주가는 어느새 반등을 시작했다.
- 8%나 떨어졌네. 어제 공매도 때렸으면 개꿀이었겠는데.
- 하루 사이에 20조 원이 사라졌다. 지옥문이 열렸다.
- 코스피도 20포인트 떨어짐. 역시 제일전자가 제일 무서워.
- 하락이 멈춘 모양이네. 여기가 바닥인 모양이다.
- 이쯤에서 들어가면 되나?
- 내일 또 떨어짐. 지금 들어가면 자살행위
- 아니. 몰라. 제일전자가 얼마나 탄탄한데.
- 사라! 강유진이 제일전자 매수한단다.
- 가짜 뉴스 퍼트리면 징역 10년
- 진짜임. 뉴욕 포스트에 기사 났음.
- 어? 진짜네? 한국 신문에도 났음. 강유진, 제일전자 펀더맨털에 이상 없어. 오늘이야말로 매수의 기회. 이러는데?
- ㅆ;0 빨리 사야겠다.
- 난 샀음. 지난번에도 강유진 덕분에 대양중공업으로 8,000만 원 벌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벌려나.
- 오 개꿀 찬스!
세계 제일의 투자전문가가 제일전자 주식을 매수한다는 소식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역시 한국의 개미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일전자 주식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 가장 튼튼한 대장주로 인정받아 왔는데, 그 강유진이 공격적으로 사들인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들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강유진은 단 한 번도 투자에 실패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지난번 강유진이 대양중공업에 투자해 공매도 파산 사태를 이끌어 내며 적지 않은 부자를 만들어 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기에, 혹시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요행수를 노린 투자가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발 빠른 개미들이 매수세에 올라탔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세력이 제일전자 매수에 합류했다.
이번 사태가 제일전자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힐 것이라 예견해서 발표가 끝나자마자 팔아 버린 사람들조차 강유진의 소식을 접하고는 더 늦으면 손해가 크다는 생각으로 곧장 재매수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날 장이 마감하기 직전, 제일전자의 주가는 오히려 이날 시작가는 물론이고 그 주 가장 높은 가격을 상회하며 마감되었다.
“당분간 추가 매입을 하지. 우선은 9.9% 정도를 목표로.”
제일전자의 주가 부양이라는 아주 훌륭한 구실이 있으니, 마음껏 매집을 지시했다.
“제일전자 부사장이 내일 LA로 오겠다고 합니다.”
장이 끝나자마자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유진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유진은 이날 4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제일전자의 주가 방어를 위해 쏟아부었다.
물론 주가가 오르는 통에 벌써 몇억 달러의 수익이 생겼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제일전자 주가가 건실하게 오르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투자였지만, 제일전자 입장에서는 고맙기만 할 것이다.
“그럼 도착하면 여기서 머물라고 하지. 어차피 남는 방도 많으니.”
현재까지 미국에서 거래된 가장 비싼 저택이라고 하는 1억 3천만 달러짜리 벨에어 자택에는 당연히 호화스러운 게스트룸도 여럿 딸려 있다. 어지간한 호텔에서 묵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유진은 제일 그룹 회장의 장남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어찌 되었건, 현실적으로 제일 그룹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유진은 결과적으로 그가 제일 그룹의 수장 자리에 오를 것도 잘 안다.
그렇다면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특히 제일 그룹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능력 있는 차남이 한창 실적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투자 가치가 훨씬 더 높을 것이다.
다음날 늦게 한정훈 부사장이 LA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전날 바로 출발한 모양이다.
한 부사장은 유진의 호의를 받아들여 예약해 놓은 호텔 대신 수행원들과 함께 바로 유진의 저택으로 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강 회장님의 저택은 탐이 나는군요.”
제일 그룹 주력 계열사인 제일전자 한정훈 부사장과는 이것으로 두 번째 만남이다. 다만 지난번에는 뉴욕에서였지만, 이번에는 할리우드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국 제일의 재벌가 후계자는 유진의 저택에 탄사를 보냈다.
“제일 그룹 회장님의 자택이 그렇게 명당이라지요?”
“하하.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 명당이 어떤 곳인지야 잘 모르겠지만, 여기도 꽤 명당 소리를 들을 만한 곳이군요. 뒤쪽으로 산이 있고, 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곳이 명당이 아니라면 어디가 명당이겠어요.”
사실 유진도 한정훈도 명당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른다. 한국에서 풍수지리를 따지는 세대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지금에 와서 명당이니 관상이니 하는 소리를 한다면, 어디 조선 시대에서 온 사람 취급이나 당하기 딱 좋다.
하지만 유진의 벨에어 자택은 그런 풍수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절로 명당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훌륭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발 고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만큼 탁 트인, 너른 로스앤젤레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대부분의 시간을 맨해튼에서 보낸 유진도 오랜만에 보는 이 시원함에 하루의 대부분을 넓은 정원에서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넓은 풀 옆의 선베드에 등을 기대고 누워 LA를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으면 참 시간이 잘 간다.
“여기를 사 놓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오지는 못하겠더군요.”
“그건 참 아쉬운 일이네요. 그런데 뉴욕의 자택도 여기 못지않게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뉴욕은 조금 번잡스러운 면이 있어서요.”
“그렇기는 하죠. 확실히.”
“이번에는 고생이 많으셨다면서요.”
“예. 아주 죽다 살아난 기분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래도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한정훈은 유진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일전자의 역량이라면 이번 사태도 큰 문제 없이 봉합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요. 강 회장님의 투자 성공 신화에 누가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전자의 잠재력과 무엇보다 한 부사장님의 역량을 신뢰하고 있으니까요.”
유진과 한정훈은 잠시 그렇게 덕담을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양자동차 말입니다.”
그러다 한정훈이 와인 잔을 비우고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번 방문의 목적은 단순하게 유진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한정훈 부사장은 자신의 부친을 회장님이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친한 사이라도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직책을 부르는 것이 훨씬 더 격의 있다 생각하니 그런 태도가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한 회장님께서 자동차 사업에 애정이 많으신 것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예. 조금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대양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자동차 분야에서도 1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제일 그룹은 어느 분야에 진출하든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기업으로 성공시킨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하는 한 회장이지만, 자동차에서만큼은 3위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자동차 산업에서 다산을 누르고 한국 제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욕심이 드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