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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27화 (127/363)

127화 실리

현재 자동차 업계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다산자동차가 52%, 대양자동차가 32%, 그리고 제일자동차가 제일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13%라는 초라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에 애정이 많고, 무엇이건 1등에 대한 욕구로 가득한 한 회장으로서는 제일자동차야 말로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대양자동차를 손에 넣으면 다산을 턱밑까지 추격할 수 있고, 적절한 투자가 이어지면 다산자동차를 넘어서는 것도 꿈은 아니다.

물론 유진도 그들의 그러한 욕망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져 놓은 것이었다.

“회장님께서 제게 전권을 주셨습니다. 대양자동차, 우리가 갖겠습니다.”

한정훈 부사장이 유진을 찾아온 목적을 명확히 했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추이를 보면 강 회장님께서는 대양 그룹의 해체를 의도하시는 모양이더군요.”

계속되는 대양 그룹 악재의 원인으로 유진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제일쯤 되는 그룹에서 원흉이 유진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유진은 묵묵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대양 그룹의 해체는 필연적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 뒤처리가 문제겠죠.”

한 부사장도 굳이 유진의 시인을 끌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대양 그룹 사주에 대한 은원은 끝맺음해야 하지만, 강 회장님께서 대양 그룹을 빼앗을 생각은 없으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시려는 거겠죠? 그러니까 제게 대양자동차의 인수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으신 거고요. 만일 강 회장님께서 대양 그룹을 통째로 인수한다면 다른 대기업들에게 경각심을 주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쌓아 온 이미지 또한 부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지금까지 해 놓은 행위에 대해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사장님의 말씀처럼 대양 그룹을 제가 끌고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전 어디까지나 금융 투자자이지, 백 개가 넘는 기업집단을 이끄는 총수는 아니니까요.”

유진은 원론적인 대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상대가 어떤 의도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답변이다.

사실 제일 그룹에서 분석한 것은 너무나도 정확하다. 유진은 대양 그룹을 손에 넣고 경영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들어가는 공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다.

대양 그룹을 손에 넣을 경우 대기업들이 유진에게 경각심을 갖게 된다거나, 국민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는 따위는 사족에 불과하다.

“대양자동차와 대양인터내셔널, 그리고 대양캐피탈은 우리 제일이 책임지겠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제일 그룹은 벌써 대양 그룹을 해체하고 어느 부위를 물어 갈지까지 생각을 끝낸 모양이다.

“제일 그룹에 도움이 많이 되겠군요.”

유진은 그저 남의 일이라는 듯 말한다.

꽤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대양 그룹의 계열사 중에서 가장 알짜배기를 골랐다.

대양자동차는 제일자동차를 선두에 올려놓기 위한 바탕이 될 것이고, 대양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90여 국에 긴밀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는 세계적인 상사이다.

그리고 대양캐피탈은 대양카드와 더불어 대양 그룹의 든든한 돈줄이다.

덩치가 큰 대양중공업이나 대양건설 같은 주력 계열사를 원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비교해 건설이나 중공업이 딱히 큰 이익을 낼 수 없다는 점 때문이겠고, 대양전자는 딱히 제일전자와 큰 시너지를 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일 터다.

대체로 유진 측에서 분석했던 내용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대신 강 회장님께 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만일 제일 그룹이 협력하겠다면, 대양 그룹 해체는 더욱 손쉬워질 것이다. 한국에서 제일 그룹의 영향력은 그 어느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니까.

당장 여당은 물론이고 통수권자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협력이라. 좋은 말씀이군요.”

유진은 과연 제일 그룹이 무얼 들고 나왔는지 궁금했다.

“예. 조만간 검찰 측에서 대양증권에 대한 조사에 들어갈 겁니다.”

아무래도 오기 전에 이미 손을 쓰고 온 모양이다.

금융감독원의 감사와 검찰의 그것은 또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대양중공업 부실에 대해서도 조치가 있을 겁니다. 아마 무척 커다란 범죄행위가 증명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이중장부나 자산의 복수 계산, 가공의 매출 등을 통한 분식회계는 대기업의 유구한 전통이다.

한국의 언론들은 대기업이 망하면 국가 경제에 위기가 온다는 가스라이팅으로 이러한 관행에 대해 면죄부를 주어 왔다.

미국의 경우는 엔론이나 월드컴 같은 거대 기업도 분식 행위로 인해 기업 자체가 분해되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사실상 국가 경제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이러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대개는 큰 문제 없이 지나가고는 했다.

소위 메이저 대기업치고 이러한 회계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10대 그룹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규모라면 회계 부실이 원인이 되어서 파산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10대 그룹 안에 든다면 어떤 식으로든 법망을 피해 가고는 했다.

하지만 한 부사장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제일 그룹 측에서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 모양이다.

대양 그룹 또한 한국의 4대 재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역시 제일 그룹이 가지고 있는 힘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동안 대양 그룹에 관련된 수많은 비리들이 언론에 보도되며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만큼, 정권의 지지율을 보전하는 차원에서라도 대양 그룹의 부정에 대해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제일 그룹과 대양 그룹 간의 전쟁이라도 벌어질 모양이군요.”

유진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정확하게는 대양 그룹과 한국 재계 사이의 문제일 겁니다.”

한정훈 부사장이 들고 온 선물 보따리는 단순히 정부에 압력을 넣는 것만이 아닌 모양이다.

“최근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대양 그룹의 도를 지나친 불법적인 행위들이 한국의 경제에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이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양 그룹의 불법 행위 때문에 다른 대기업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는 말이다.

대양 그룹 계열사들이 해외의 기업을 인수하며 거액을 챙기려 했다는 의혹이 연달아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기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미디어포커스가 대양 그룹이 해외의 펀드 등을 통해 어떤 식으로 돈을 챙겨 왔는지를 상세하게 보도하고 그런 보도가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가면서, 이제 다른 대기업들의 해외 투자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조사와 감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각계의 의견이 도출되고 있다.

대양 그룹을 제외한 다른 대기업들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비난에 함께 빠져들게 된 셈이다.

더군다나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사용해 온 꼼수들이 사실 다른 대기업 사주들이라고 전혀 사용하지 않던 행위들은 아니다.

이 사태가 길어질수록, 그들에 대한 의혹 역시 점점 세를 불려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대양 그룹을 보는 여타 대기업 사주 일가의 눈이 고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양 그룹에 닥친 일련의 의혹을 거국적 차원에서 덮어 주자니, 유진이 문제였다.

일반적인 폭로 보도라면 어떻게든 힘으로 찍어 누르고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금 동원 능력이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유진이 대양 그룹에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데, 섣불리 대양 그룹의 편을 들었다가 괜히 그와 척을 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결국 대양 그룹 사태는 다른 대기업 사주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눈앞에 내놓은 꼴이 되어 버렸다.

자신들도 원죄가 있으니 대양 그룹의 편을 들어 유진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거나, 대양 그룹을 외면하고 더 나아가 대양 그룹을 해체하는 것에 일조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리고 제일 그룹이 선택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대양 그룹을 분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명성과 성진, 삼호 그룹 회장님들도 같은 의견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성금융지주의 오 회장님도 우려가 아주 크시더군요.”

한 부사장의 입에서 나온 그룹들은 모두 대양이 해체되면 나름 득을 볼 만한 기업들이다.

아마도 그들 수장들이 모여 대양 그룹을 해체해서 자신들의 그룹의 비료로 삼겠다는 의견이 모여진 모양이다.

“단순하게 제일 그룹의 의사를 말씀하시려고 오신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경제계의 어르신들께서 이번 사태에 대한 우려가 크시니 제가 총대를 메게 되었습니다.”

유진의 대양 그룹에 대한 적의가 다른 대기업들에까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막고, 한편으로는 각자가 이득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진과 타협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진과 유일하게 안면이 있으면서, 한국 제일의 기업집단의 차기 후계자인 한 정훈이 그들을 대표해서 유진을 만나러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산 그룹 회장님은 거기 포함이 되지 않는 모양이지요?”

일부러 다산은 제외했다는 것에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일이 원하는 것은 대양자동차이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으면 다산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당연히 다산과는 교감하지 않았을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물론 다산 그룹 김 회장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시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회합이 조금 급박하게 이루어진 탓에, 김 회장님과는 미처 조율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김 회장님께서 건강상 문제로 경제인 회합에 자리하시기 힘든 면이 있어서요.”

한 부사장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다산 측에 책임을 미루었다.

“아쉽군요. 사실 이런 일에 다산이 빠지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요.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한 부사장님의 말씀이 다산을 제외한 한국 재계 수장들의 의견이라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경제계의 그 누구도 강 회장님의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징치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제게 무슨 권한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은 구가 뭐라 해도 자본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돈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의 그 어떤 집단에 비해서도 월등한 지위를 수십 년 동안이나 차지하고 있는 제일 그룹 후계자는 유진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은 선선히 인정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런 유연성이야말로 거대 집단을 이끄는 수장에게 필요한 능력일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기업집단을 이끄는 이들은 늘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따위를 내세우고 한 시대의 주류 세력에 거스르기보다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실리를 취하는 태도를 이어 왔기에 지금의 굳건한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독재자의 시대에도 그랬고, 민주화의 시기에도 그랬다. 재벌 기업들은 아직 단 한 번도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유진이 지닌 돈의 힘은 명백하게 그들에게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수준이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그들은 유진을 거스르기보다는 흐름을 타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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