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샤이 트럼프
“그렇다면 잘 알겠습니다. 적어도 한국의 대기업 경영진들은 대양 그룹 문제에 관여치 않겠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사실 그들의 제안이 온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대양 그룹을 해체해서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는 조금 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굳이 거절의 의사를 표시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유진으로서는 그다지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저 하이에나들이 빈사 상태의 대양 그룹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고, 저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으리라.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부담 없이 연락 주십시오. 강 회장님 말씀이라면 제가 언제라도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한정훈 부사장과의 회합은 의외의 소득을 유진에게 안겨 주었다.
사실 대양 그룹 문제에 관련해 다른 대기업들이 대양 그룹에 대한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유진의 행보에 딴지를 걸고 나서면 조금 곤란한 것은 사실이다.
한두 개의 재벌 기업이 아니라, 재벌 그룹 수장들 전체가 유진의 행보에 딴지를 걸고 나온다면 제법 귀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양 그룹 정도 되는 거대 재벌이 해체되고, 그룹의 수장이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이 하나의 선례로 남는 것을 대기업 수장들이 꺼려 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10대 그룹 총수가 실형을 받고 감옥에 갇혀 실제로 형을 산 일은 거의 전무했다.
아무리 큰 배임이라도 1심에서 2심, 그리고 대법원을 거치면서 결국 집행유예로 마무리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특히 소위 4대 그룹 직계 가족은 아예 구속된 경우조차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나마도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된 때문이지,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범죄 행위에 대한 단죄를 받은 일은 볼 수 없었다.
한국은 법치국가이지만, 대기업 사주와 그 일가에 대해서는 검찰이든 법원이든 명백하게 편의를 보아 주고 있다.
물론 유진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결말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 수장들이 그런 결과를 납득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하나가 쓰러지면, 두 번째도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진의 행보에 경각심을 갖고, 그와 결판을 내겠다며 나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유진은 차분하게 다각도로 자신의 힘을 늘려 가고 있다.
단지 대양 그룹뿐 아니라 한국의 재계 자체와 전쟁을 벌이려면 예상치 못한 희생자들이 나올 것에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먼저 스스로 유진과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은 사실 어느 정도는 의외의 결과이다.
아마도 그들 역시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일 터다.
한국 경제의 성장기에는 불법과 탈법을 통해 기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오히려 능력에 가까운 일이었다.
특히나 총으로 정권을 잡은 위정자에게 적당한 대가를 내놓는 것으로 그런 불법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아 내고, 경쟁자를 누르는 것이 정당한 수단으로 경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리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로 사람들이 법치에 익숙해지고, 재벌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시선도 전과 달라지고 있다.
앞으로는 전과 같이 재벌 그룹의 총수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행위라도 용서받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시류의 흐름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제는 바뀐 새로운 룰에 따라 기업을 경영하고, 국민들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것을 선택하려는 모양이다.
물론 이 시대에 가장 큰 권력은 자본을 지닌 사람, 바로 유진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했다.
“내일은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오후에 이곳에서 몇몇 지인들을 초대한 작은 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달리 일정이 없으시다면 함께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유진은 좋은 소식을 들고 날아온 한 부사장을 위해 작은 연회를 개최할 생각이었다.
“딱히 급한 일은 없습니다. 저도 강 회장님의 그 유명한 파티에 꼭 한번 참여하고 싶군요.”
한 부사장은 LA까지 날아온 일이 잘 풀렸다는 생각인지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널드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모니카가 다가와 묻는다.
“지금 상당히 격양되어 있습니다.”
“뭐, 상관없지. 전화기 줘 봐.”
모니카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넘겼다.
“네. 유진입니다.”
- 82%라고 하더군. 빌어먹을 놈들.
전화를 받자마자 도널드 트럼프가 욕설을 내뱉는다. 상대에 대한 고려 따윈 없는 트럼프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유진은 그저 슬쩍 미소를 지을 뿐이다.
- 거짓말투성이야. 미디어는 믿을 만한 놈들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전부 내게 칼을 들이밀고 있을 뿐이지. 82%라고? 웃기는 소리! 아무리 못해도 50%대에서 박빙이라고!
트럼프의 분노는 이날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 때문인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발표된 여론조사 중에서는 최악의 수치가 나온 모양이다.
82%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을 예상한 수치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은 많아도 18%를 넘지 않는다는 의미이니 그가 흥분할 만했다.
트럼프는 유독 숫자에 예민한 사람이다.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 위해 늘 수도 없는 수치들을 거론하며 자랑하는 것이 말버릇이다.
그런 트럼프에게 지금의 성적표는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가장 극단적인 예측이지만, 어떤 결과에서도 힐러리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을 70%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
당연히 트럼프 선거 캠프에서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사실상 참패가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라 적지 않은 조직원들이 침통한 분위기 속에 나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도널드. 아무 문제 없으니까. 어차피 결과는 이미 명백해요. 미디어에서 무어라 하든 도널드는 내년 1월 백악관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을 겁니다.”
- 하하! 그렇지? 역시 자네는 늘 시원한 말을 한다니까.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사무실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완전히 활기를 잃어버린 선거 캠프의 모습에 위기를 느낀 트럼프는 항상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았고, 유진이 바로 그의 기분을 북돋워 줄 사람이었다.
- 그래. 내년에는 백악관에서 거주하게 되겠지.
방금까지의 그 포효하는 듯하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사실 백악관이 지어진 지 오래되어 그다지 살기 마땅한 곳은 아닐 겁니다. 트럼프 타워와 비교하면 감옥에라도 온 기분이겠죠. 그래도 미국의 미래를 위해서 잠시 고난을 자처한다 생각하십시오.”
- 그래. 그게 문제지. 백악관은 너무 낡았어. 하하!
트럼프는 통쾌하게 웃었다.
- 하지만 문제는 문제야. 사실이 어떠하든 미디어들이 저렇게 날 헐뜯으면 정작 날 지지해 줄 사람들도 투표장에 나오기 싫어질 거야.
트럼프라고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사업에 도전했고,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 온 감각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라고 해서 여론조사가 정말로 불공정하다 여기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 즈음의 트럼프는 어느 정도는 스스로도 엑시트를 고려하고 있는 형편이다.
트럼프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지만, 한편으로는 물러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영리한 사업가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파산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며 사업 실패의 덤터기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을 아주 멋지게 해내 온 사람이다.
하지만 다른 사업과 달리 이번에는 섣불리 물러설 수 없었다.
트럼프는 젊은 시절부터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쉬지 않고 그 길로 나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이 그가 수십 년을 기다려온 최고의 기회였고, 또한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며 유색인종에게 미국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의 위기감은 커졌고, 이번 선거에서는 힐러리가 나오며 남자들의 경각심이 커졌다.
백인이면서 남자인 트럼프에게는 유색인과 여자에 대해 혐오를 가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낼 최고의 기회였다.
더군다나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선거 막바지에 공표된 여론조사의 절망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물러설 수 없었다.
“미디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진이 딱 잘라 말했다.
“도널드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도널드처럼 미디어를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히 미디어에서 주관하는 여론조사 또한 믿지 않는 거지요. 그들은 여론조사에 응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선거장에서 자신의 의지를 보여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외칠 겁니다. 보아라, 누가 옳았는지.”
유진은 트럼프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를 잃지 않을 계기였다.
- 하하. 좋은 의견이로군. 맞아,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론조사 따위를 할 이유가 없지.
트럼프도 유진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선거 캠프에서 조직원들을 격려할 발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이 기꺼웠다.
사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 잘 응하지 않으려 하고, 때로 진심과 다른 선택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원인이 전부 그들이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그 스스로도 부끄럽기 때문이 더 그럴듯한 해석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최강대국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드높여 줄 만한 지도자는 아니다.
오직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만 점철된 그의 행보와 횡설수설하는 언급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블루칼라의 백인 남성들뿐이다.
하지만 실제 선거 결과에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가 부끄러운 지도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 비주류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선택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명이었다.
“지금까지 도널드는 잘해 오고 있어요.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다르게 행동해야 할 이유도 없고요.”
단지 트럼프를 북돋우기 위한 말은 아니다. 정말로 그의 선거 전략은 충분히 먹혀들어 가고 있다. 단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부끄러울 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행동뿐입니다. 캠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도널드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들을 격려해 줘요.”
- 맞는 말이야. 자네야말로 이 시대의 현인이지.
트럼프가 필요한 것은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지해 주는 명백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줄 뿐이다.
“다음 달 선거 전에 뉴욕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때는 웃는 얼굴로 만나기를 바라겠어요.”
- 그래. LA에서 좋은 여자들 실컷 만나고 오라고. 하하하. 참! 사라 양과 그 여자 친구와 셋이 즐거운 시간은 보냈나 모르겠군.
사회적 공감이 결여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또한 모두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도 유진을 자신과 다르지 않은 취향의 소유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뭐.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습니다.”
- 그거 보라고! 내 말이 맞잖아! 아니기는 뭐가 아니라고! 크하하하! 제러드에게 100달러를 받아 낼 수 있겠네.
트럼프는 유쾌한 웃음을 던지며 전화를 끊었다.
“도널드 트럼프였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한정훈 부사장이 조금 질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무래도 선거 결과에 대해 걱정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군요. 정말 트럼프가 정말로 선거에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교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사내였지만, 유진의 정치적 도박만은 도저히 묻지 않고 넘어가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물론입니다. 미국은 트럼프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니, 세계가 그를 요구하고 있지요.”
“음. 모든 전문가가 힐러리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데도요?”
“모든 전문가가 영국이 EU에서 제 발로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것과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가 아닐까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인류 모두의 화합과 공존을 바라는 시대정신은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렇군요.”
유진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부사장은 의문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