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대안 우파
“잘 어울리는군요.”
“그렇지? 조금 낡았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흐흐.”
백악관의 웨스트윙에 위치한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서 트럼프가 잔뜩 폼을 잡고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다음 날, 유진은 도널드의 초대로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해 짧게나마 친분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 자네야말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군. 도널드 트럼프에게 한 투자야말로 자네에게 일생일대의 승리가 될 거야.”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날은 더욱 거들먹거렸다.
“물론이죠. 도널드와 친구가 된 것이야말로 최대의 행운일 겁니다.”
유진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라도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있다.
“그래. 그 힘든 시간 동안 늘 지지해 준 것은 정말 고맙네.”
“도널드가 이 자리에 앉을 만한 유일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8년간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고생이 많겠습니다.”
유진은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뱉을 수 있다.
“물론이지. 벌써 재선거가 기대되는군.”
트럼프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어떻게 이끌어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대통령을 하고 싶었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가장 적당한 전략을 선택했을 뿐이다.
“많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는 늘 위험하고 외로운 법이지요. 하지만 도널드라면 전부 이겨내리라 생각합니다.”
“허! 위험이라? 아무 문제 없어.”
이번의 승리는 사실 도널드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선이 되니 그야말로 기고만장이었다.
뭐,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유진은 속으로 미국이 앞으로 몇 년 동안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요 며칠 내로 자네의 미국 시민권 획득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사인하겠네. 그동안 외국인 신분이라 불편했을 텐데, 앞으로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감사합니다. 도널드의 위대한 미국 시민이 되어 기쁘군요. 하지만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도널드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바쁜 친구를 괴롭히는 건 친구로서의 자세가 아니지요. 진정한 친구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 알겠네.”
하지만 트럼프는 유진의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다.
그 자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익이 있다면 어떤 불법이나 비윤리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남들도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믿기 마련이다.
유진은 잠시 트럼프와 덕담을 나누고, 사진사를 불러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집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아직 백악관에서 만날 사람이 더 있었다.
“바빠 보이는군요. 재러드.”
집무실을 나서자 비서관 한 명이 백악관 선임고문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게 된 트럼프의 사위에게 인도해 주었다.
“아주 정신이 없습니다. 이제 시작이니 할 일투성이입니다.”
제러드 쿠슈너가 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다들 할 말들이 많고, 원하는 게 너무 많아요. 별의별 잡다한 요구들을 해 오는 자들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생각도 없이 내뱉는 인간도 있지요.”:
쿠슈너는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고 불만을 내뱉었다.
“쉬운 자리가 아닐 겁니다. 그래도 도널드에게 재러드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깨가 무겁겠군요.”
“장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얼굴을 보니 벌써 지쳐 보이는군요.”
유진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아, 배넌…… 배넌…… 그 빌어먹을 놈이 계속 선을 넘으니 머리가 아파 미치겠군요.”
생각했던 대로 스티브 배넌과의 알력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당선 직후부터 자신을 도와 온 사람들 사이에 경쟁을 유도했고, 그들은 모두 트럼프의 신임을 얻어 내기 위해 파벌을 만들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특히 트럼프의 심복이라 불리는 네 사람들은 각기 트럼프에게 자신의 유능함을 보이고, 트럼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전쟁에 가까운 다툼을 보인다.
그것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 트럼프의 선거를 책임졌던 스티브 배넌, 워싱턴의 정치인으로서 이례적으로 트럼프의 지지를 선언하고 그의 곁을 지켜온 라인스 프리버스, 그리고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이 네 사람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니고, 각기 다른 사상으로 각자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특히 대안 우파의 대변지인 브라이트바트뉴스의 CEO로 있으면서 트럼프에게 도움을 주어 온 스티브 배넌과 재러드 쿠슈너 사이의 알력은 이미 심각할 정도였다.
“무슬림 입국 금지는 선거 캠페인 용이었어요. 정말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요.”
배넌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나서, 재러드는 둑이 터진 듯 화를 뱉어 냈다.
“오바마케어 폐지도 차근차근 전략을 세워 진행해야지, 당장에 서두른다고 해결될 수 없는 일이고요. 빌어먹을 자식은 자기가 왕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니까요.”
재러드는 유진에게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학생처럼 배넌의 행위를 하나하나 고했다.
스티브 배넌은 대안 우파의 사상적인 배경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리고 미국의 대안 우파의 사고는 솔직히 상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놀랍게도 재러드 쿠슈너는 트럼프 캠프에서 독보적일 만큼 상식 있는 사람에 해당했다.
사실 재러드는 트럼프의 딸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민주당 소속이었고, 뉴욕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하듯 쿠슈너 역시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
그런 쿠슈너에게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스티브 배넌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100개의 행정명령을 당장 발표하자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정국을 위태롭게 할지 알고 하는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미국의 대통령이 가진 권한인 행정명령은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에 준하는 법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임기 중에 평균 200여 개 정도의 행정명령을 제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스티브 배넌이 얼마나 과격하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가 주장하는 행정명령은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낼 만큼 과격한 것들이다.
스티브 배넌은 이를 통해 워싱턴 정가의 기존 정치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려 획책하고 있었다.
대안 우파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 그리고 기존 정치인에 대한 증오뿐인 반지성주의 운동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신의 삶의 불행을 모두 외부에서 찾으며, 미디어 등을 통해 강요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하다.
심지어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조차 부정할 정도이다.
그러한 대안 우파의 지도자 중 하나인 배넌이 내놓는 정책이 상식적인 것이 더욱 이상하다.
“배넌이 너무 급진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일이죠. 하지만 재러드가 충분히 그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내가 아니면 그를 제어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어떻게든 막아야죠.”
“물론 재러드야말로 그 일을 해낼 사람이죠.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스티브 배넌이 백악관의 수석전략가라고는 해도 그걸 결정할 만큼 큰 권한이 있는 건가요? 과연 도널드가 그런 안하무인의 행동을 그냥 두고만 있겠어요? 너무 튀는 행동인 듯싶은데요.”
“흐음…….”
유진의 말에 재러드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 누구보다 도널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재러드 그 자신이다.
도널드는 사람들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지만, 그 누구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게 놓아 둘 사람은 아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재러드가 씩 웃었다.
“요 며칠 매스컴에 배넌이 트럼프를 당선시킨 장본인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더군요. 상당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에요. 지금 정국을 장악하는 사람은 도널드입니다. 도널드 말고는 그 누구도 앞에 나서서는 안 됩니다.”
유진은 다시 한 가지 힌트를 준다.
도널드 트럼프는 모든 사람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원한다.
만일 백악관의 다른 누군가가 매스컴의 집중을 받는다면 결코 질투를 참을 사람이 아니다.
“배넌은 지금 확실히 선을 넘으려 하고 있어요. 누구든지 분수를 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안 되죠. 수석전략가가 대통령을 조종할 수는 없는 거지요.”
재러드는 도널드에게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배넌이 선을 넘고 있다는 말로 트럼프의 공명심을 자극해야겠다는 생각에 미쳤으니, 당장이라도 사용할 기세였다.
“덕분에 머릿속이 맑아졌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유진 말이 맞아요. 누구도 트럼프의 앞에 이름을 올리면 안 되지요. 하하.”
“백악관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아니요. 나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어요.”
쿠슈너가 다시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럼프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 누구라도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속이 좁은 리더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밑에 사람이 유능하다던가 인기가 있는 것을 절대 반기지 않는다.
“참. 이번에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 차이나가 성공적으로 런칭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어요.”
“오! 다행이로군요.”
연이은 좋은 소식에 재러드가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중국의 대도시 열두 곳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대형 매장을 런칭했어요. 그리고 연일 광고가 나오고 있지요. 아마 이번 분기가 끝나면 매출액에 놀라게 될 겁니다. 중국의 인구는 무려 14억 명이나 되니 말이에요.”
유진도 즐거운 표정으로 전해 주었다.
“멋지군요.”
쿠슈너는 중국의 패션 사업으로 얼마나 벌어들일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이 바쁜 모양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방카가 그 옷들을 입고 중국 대사관을 방문한다거나…….”
“아니면 시 주석의 방문에 나선다거나…….”
쿠슈너는 정치인이라기보다 비즈니스맨에 가깝다. 바로 유진이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기왕이면 백악관에 있으면서 도널드와 늘 함께라면 좋겠지요.”
“물론이지요. 그것만큼 매스컴을 타는 일도 드물 테니. 그렇지 않아도 장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방카도 백악관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고요. 단지 그 빌어먹을 매스컴들이 걸리는군요.”
이미 재러드의 재직만으로 쉬지 않고 딴지를 걸어오고 있는 미디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이 상황에 이방카까지 백악관에 들어오면 분명 난리를 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있지요.”
대통령의 권한이 가장 큰 시기는 당연히 바로 지금이다. 만일 여기서 밀려 버리면 앞으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도널드와 할 이야기가 참 많겠군요.”
재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재러드와 이방카야말로 도널드를 위해 헌신할 유일한 사람들이죠. 가족이 최고 아닙니까?”
“맞아요. 가족이 최고죠. 하하. 아! 우리한테는 유진이야말로 가족 같은 사람이에요.”
하기는 지금까지 유진이 그들에게 베푼 것들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가족보다 나을 것이다.
물론 유진은 이제부터 그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받아갈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한 시간이 넘도록 세계에서 가장 바쁜 남자의 시간을 빼앗고 작별을 고하니 재러드가 아쉬운 듯 말했다.
“지금은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월가의 사업가가 백악관을 너무 자주 방문하는 것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내가 뉴욕에 가서 만나도록 하죠.”
“고향으로 오신다면 언제라도 환영하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뵙도록 하죠.”
아무래도 앞으로도 쿠슈너와는 종종 만나게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