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시민권
“이번 미 대통령 취임식 때 강 회장님께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시더군요. 한국에서도 꽤나 놀라고 있습니다. 강 회장님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정도로 친밀하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한국 외교 사절단의 일행으로 방문한 김충식 의원은 취임식이 끝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진을 방문했다.
“도널드는 자신의 친구를 잊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트럼프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그렇죠. 듣기로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대소사는 서로 챙겨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따님이신 이방카 영애 내외와도 좋은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말이 자꾸 길어지는 것을 보면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방카와 쿠슈너와 이런저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대통령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면서 말미에 강 회장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시더군요.”
“대통령님께서도 제 이야기를 하셨다니 영광이로군요.”
“강 회장님께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계시다고 무척이나 기꺼워하셨습니다.”
“그런가요? 저야 그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것뿐인데요. 세금도 대부분 미국에서 내고 있고요.”
유진은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김 의원은 계속해서 그를 추켜세웠다.
“아니요. 단순히 세금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에서 제일가는 금융가가 되셨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무척 큰 자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께서 하반기에 순방에 나설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쪽 방문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국 대사관으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하더군요.”
“백악관의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도널드와 난 서로 좋은 친구이지, 어떤 부담을 주는 사이는 아니라서요. 그렇지 않아도 도널드는 당선 이전부터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습니다. 그러니 내가 백악관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충 김 의원이 원하는 것이 감이 왔기에 유진은 미리부터 선을 확실하게 그어 놓았다.
“네. 그러시겠죠. 참으로 멋진 우정입니다.”
김 의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슬며시 닦았다.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유진이 하려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이번 하반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서 우리 한국만 제외된다면 한국으로서는 외교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미 대통령이 한국을 홀대한다는 식의 이미지라도 생기게 되면 한국으로서는 이만저만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외교팀이 무척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군요.”
“그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선거 기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방위비 분담이나 주한 미국 주둔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바람에 우리 쪽에서 조금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김 의원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번과 다르게 무척 힘겨워하고 있다.
아마도 청와대에서 중요한 지시를 받고 왔는데, 유진이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으니 그런 모양이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외교부에서 힐러리에게만 올인한 모양이더군요. 굉장히 근시안적인 태도입니다.”
“그렇죠. 하하…….”
사실 힐러리에게 집중한 것은 한국 외교부서만의 일은 아니다. 일본도 그랬고, 중국도 그랬다.
트럼프가 힐러리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한 나라는 거의 없었으니, 힐러리에 대해 음양으로 이런저런 지원을 해 주었지만, 트럼프는 거의 홀대하다시피였다.
유독 도널드 트럼프에게 지원한 나라는 러시아뿐이다.
그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는 내내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이어가게 되고, 이런 모습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미 정계의 반발을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이라도 트럼프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보고 있습니다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백악관이나 국무부나 사람들이 전부 갈려서 새로운 라인을 만드는 데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희로서는 당장 트럼프 행정부와 긴밀하게 연결을 해야 하는데, 좀처럼 방법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렇겠군요. 트럼프는 기존 워싱턴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어서 기존 사람들을 거의 기용하지 않았으니까요.”
유진은 계속 김 의원이 보내는 시그널을 무시하고, 남의 일처럼 받아들이기만 한다.
“하여 대통령님께서는 강 회장님께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해 주시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김 의원은 결국 원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꺼내 놓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도널드는 사적으로서 좋은 우정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도널드에게 어떤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합니다. 어쩌면 향후 미 대통령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담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지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한번 대국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아시아의 외교 관계에서 한국만 소외되는 일이 생긴다면 국가적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이 됩니다.”
사실은 이제 정권 후반기에 들어선 대통령에게 큰 손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유진에게 이렇게 들러붙고 있다는 것은 김 의원도 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아! 이건 말씀을 미리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도널드 트럼프가 며칠 전에 제게 말을 하더군요. 조만간 제 국적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 회장님의 국적 문제라니요?”
김 의원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사업을 주로 영위하는 곳은 미국 아니겠습니까? 한 해에도 수천억 달러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곳이 이곳 미국인데, 계속해서 외국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미국인의 눈에 결코 좋게만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사업의 기반을 한국으로 옮길 수도 없는 거고요.”
“그 말은…….”
“그래서 전부터 시간이 되면 영주권을 얻은 뒤에 시민권을 획득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널드가 대통령이 된 기념으로 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게 되면…….”
“아쉽게도 한국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복수 국적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한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유진이 계속 미국의 외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 월가에서 큰돈을 벌어 가는 것은 결국은 약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유진에게 시민권을 선물하려는 것은 앞으로 3년 뒤에 닥칠 재선에 대비해서라는 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외국인 신분인 유진은 미국의 선거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고, 거액의 헌금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민권을 얻게 되면 합법적으로 다양한 통로를 통해 대통령 선거에 거액을 투척할 수 있다.
“그건…….”
김 의원은 새롭게 마주한 현실에 당황했다. 강 회장을 구슬려 트럼프와 긴밀한 관계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좋지 못한 소식만을 가지고 가게 생겼다.
만일 현 대통령의 임기 중에 유진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이 된다면, 대통령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은 눈에 보듯 뻔하다.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국민들은 정치권의 잘못으로 유진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해서 유진이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을 막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 참!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해 드려야겠군요.”
김 의원은 비장의 무기를 빼 들었다.
“최근 검찰에서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계열사의 자금을 유용하고, 또 해외에 보유 중인 펀드 소유의 기업을 비싸게 떠넘기려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조만간 검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기소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 정치권에서는 유진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거 정말 잘된 일이로군요. 하지만 그렇게 검찰 기소 뒤에 사법 처리 과정에서 흐지부지된 일이 어디 한둘입니까?”
유진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악형향에 대해 제대로 단죄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도 이제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대기업 사주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심판을 내릴 거라 기대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대양 그룹 사주 일가는 지금까지 저질러 온 탈법이나 불법 행위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 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은 저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니, 제대로 된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유진의 반응이 나오자, 김 의원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시 한번 유진에게 간청했다.
“그래서 말씀인데…… 혹시 한국을 위해 트럼프 행정부에 어떤 역할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요. 나도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외교적인 승리를 바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와의 우정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하나 유진은 김 의원의 간청을 재차 거절했다.
“만일 그렇게 해 주신다면, 대통령님이나 저나 강 회장님의 노고에 대해서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정치인들은 결코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두 번의 거절로 바로 돌아설 만한 사람들이라면, 그 지독한 정글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자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조금 알아는 보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유진이 몇 번이고 거절한 이유야 당연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쉽게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이다. 주는 사람이 쉽게 주면 받는 사람도 가볍게 여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힘들다, 어렵다고 강조해야 상대도 그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거래의 추는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다. 김 의원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도널드와 가까운 유진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의원은 그날 몇 번이고 부탁을 해 왔고, 유진은 한 번 알아보겠다는 말로 넘겨 버렸다.
* * *
“검찰이 웬일이지요? 한꺼번에 다섯 곳을 압수수색했단 말인가요?”
이제 대양 그룹과는 꽤 멀어져 있는 류성규가 살짝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대양전자, 대양자동차, 대양케미칼, 대양인터내셔널, 대양에너지. 전부 주력 계열사야.”
대양 그룹 회장 비서실의 류 비서가 꼼꼼하게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짚어 주었다.
“이건 단순하게 경고나 협박 수준이 아닌 것 같아. 아예 대양 그룹 자체를 뒤집어엎겠다고 세상에 알리려는 모습이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무슨 군사정부 시대도 아니고 말이에요.”
재벌 그룹이 완전하게 공중분해 되어 버리는 일은 군사정권에서는 종종 있었던 일이다.
특별히 무슨 불법 행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정권 실세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랬었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가 되어서는 이렇게까지 한 그룹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일은 없었다.
“심상치가 않아. 검찰은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분위기가 뒤숭숭해.”
“뒤숭숭하다는 게 어떤 의미이죠?”
대양을 나간 뒤로 그룹 내의 정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성규로서는 상당 부분을 류 비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정치권도 그 녀석 손을 들어주려는 모양이야.”
“또 그 빌어먹을 새끼…….”
류성규는 여유만만하던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