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근조
“한국 사법당국에서 법무부에 대양 그룹에 관련된 미국 내 펀드의 자금 흐름에 대한 정보를 요구해 왔습니다. 법무부에서는 최대한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원하는 요구를 들어줄 예정입니다.”
에릭 홀더가 보고를 올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에릭 홀더는 여전히 적지 않은 지인들을 정관계에 갖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법무부에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과 트럼프의 친분을 이용해 다양한 방면으로 로비를 시도했고, 유진이 도널드는 물론 숨은 실세라는 쿠슈너와도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법무부 상위층에서는 한국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마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해외의 사모펀드를 이용해 편취를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엔 충분할 겁니다.”
한국 쪽에서도 꽤 열심인 모양이다. 이렇게 미 법무부를 통해 자료를 요청한 것을 보면 어쩌면 유진에게 시그널을 보내고 싶은 듯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다양한 방법으로 편취를 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에 해당하는 수익을 몰수당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그들이 쌓아 올린 해외 비자금의 대부분은 유진이 빨아먹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한국 내 자산으로 충당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진의 사설 정보기관 수장인 존 브레넌이 보고했다.
한국 내 각 권력 기관에서 대양 그룹에 대해 다양한 방면으로 압박에 나섰다는 이야기였다.
검찰청은 물론이고, 금융당국과 국세청, 관세청까지 대양 그룹이 최근 10여 년 동안 행해 온 불법 행위에 대해 전격적인 내사에 나섰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불법적인 부분이 나오면, 모두 지체 없이 검찰에 송치해 사법 처리를 받게 할 거라고 한다.
대양 그룹의 각 계열사는 쏟아지는 사정 바람에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된 상태다.
임직원들도 회사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일을 진행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정 드라이브는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대로라면 대양 그룹이 분해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우려 때문에 대양 그룹 계열사 주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처분해 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사 줄 사람이 없으니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피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단순히 보스에 대한 우대로 대양 그룹을 단죄하려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 존 브래넌의 심증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대양 그룹의 불법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맞는 듯 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은 단순히 청와대의 지시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알겠어요.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도록 하죠.”
유진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자신의 의도와 조금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사람들이 유진과 대양 그룹 사이의 분쟁에서 생겨날 떡고물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단순한 떡고물 이상일 수도 있다. 이 틈을 노려 대양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할지도 모른다.
존 브래넌이 물러간 뒤, 유진은 요안나를 불러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 보았다.
“대양 그룹의 청산 가치는 대략 45조 원 정도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벌써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산업계에서 수위를 달려온 대양 그룹 계열사들은 탄탄한 영업망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다양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룹이 망한다 해도, 그 잔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적지 않은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유진의 목표는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게 합당한 처분이 내려지는 것이지, 대양 그룹의 자산 따위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대양 그룹 사이의 문제에 전혀 상관도 없는 인간들이 발을 걸쳐 이득을 보려는 것을 방관할 생각도 없다.
그건 사실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게 누구이건 간에 유진을 통해 이득을 얻는 행위를 방관한다면, 추후에도 유진의 행보에 자기 마음대로 발을 걸치고 이익만 쪽쪽 뽑아 먹겠다는 자들이 나올 가능성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항상 한 번이 문제이다. 처음을 용납하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된다.
유진은 그게 누구든 그냥 모르는 체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누가 이걸 획책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장은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 *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서울중앙지검의 한 방에서 대양자동차 사장이며 이제는 부친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대양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는 대양 그룹 회장의 장남 류근호가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우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검찰 측에서 가진 증거가 너무 명확합니다.”
변호사가 쩔쩔매면서도 어떻게 하든 사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날더러 수갑을 차고 유치장으로 가란 말이야? 자네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일 막으라고 돈을 준 거 아니야? 너도 검사장 출신이잖아! 왜 이따위로 일을 처리해?”
“여기저기로 압력을 넣어 보고 있지만, 씨알도 안 먹힙니다.”
“안 먹히는 게 어디 있어? 지금까지 내 돈 받아먹은 놈들은 다 뭘 하고? 중앙지검으로 내려준 돈만 한두 푼이야?”
“위쪽에서 내려온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위쪽이면 어디? 검찰총장? 그 새끼는 내 돈 안 먹었어?”
“저…… 사장님,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변호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어때서? 들으라고 해! 씨바. 여기서 내 돈 안 받아먹은 놈 있으면 나오라고 해! 검찰총장? 그 자식은 어디 있어? 나오라고 해! 대체 무슨 배짱으로 받아 처먹고 이제 와 이따위 지시를 내려? 어? 시발! 내가 죽으면 혼자 죽을 거 같아?”
류근호에겐 최후의 협박 수단이 남아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관계에 뿌린 돈은 늘 증거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는 회장 가족 일가만이 알고 있는 모종의 장소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류근호나 류근일도 지금의 사태가 얼마나 엄중한지는 잘 알고 있다.
사방이 대양 그룹을 노리고 있는데, 그걸 모를 수야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화려한 장부가 남아 있다.
물론 그걸 터트리는 순간 그들 자신부터 산화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돈을 받은 사람들 또한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최후의 보루로 가지고 언제든 협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그보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더 위?”
“아무래도 VIP 같습니다.”
변호사의 말에 류근호 사장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무리 많은 돈을 검찰이나 정치권에 뿌려 놓았다고는 해도, 청와대에 관련이 되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물론 대통령에게도 적지 않은 헌금이 들어갔고, 그 증거 또한 남아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협박한다면 결코 득이 되지는 않는다.
“우선 당장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류 사장의 얼굴을 읽은 변호사가 다시 설득에 나섰다.
“어차피 구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조만간 법원을 통해 빼내 드리겠습니다.”
“진짜. 쪽팔리게 만들 거야? 윤 변. 나 지금 그런 사진 찍히면 곤란한 거 알잖아? 지금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되면 근일이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였다. 대양 그룹의 권좌를 차지하기까지 이제 겨우 한 발자국 남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구속당해 재판까지 받게 되면, 그 자리는 둘째 아들인 류근일 대양전자 사장에게 빼앗기게 될 가능성이 컸다.
“사실 그것도 문제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조만간 둘째 사장님도 소환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대양전자도 자동차 못지않게 위기입니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두 분 다 구속될 가능성이…….”
“허…….”
류근호 사장은 자신뿐 아니라 라이벌인 동생마저도 구속될 수 있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완전히 뼛속까지 발라먹겠다는 말이네. 누구야? 누가 이런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허탈한 표정으로 류근호가 물었다.
그는 다혈질에 막무가내인 경향은 있지만, 결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변호사의 말에서 이제 그들의 눈앞에 닥친 아주 거대한 음모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자식이야? 강유진? 그 녀석이 이렇게까지 컸어?”
“아마 정권 후반기로 들어서며 강유진과의 협력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듣기로 새로 당선된 미 대통령과 무척 친밀한 관계라고 합니다. 강유진이 어깃장을 놓으면 지금 한국의 대통령도 식물이 되어 버립니다.”
“허허…… 그 말도 안 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아주 막장입니다.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지금까지의 관행 따위는 상관 않고 마음대로 저지르는 종류의 사람이지요. 그런데 최대 후원자가 요구한다면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실제 사실이 어떻든, 지금의 한국에서 바라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강유진에 대한 이미지는 그러했다.
특히 강유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한 이미지는 한껏 신격화되어 심지어 미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는 진짜 실세라는 말까지 떠돌고 있었다.
물론 그저 트럼프와 친한 재계 인사 정도라며 폄하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근 몇 년 동안 유진이 일구어 낸 엄청난 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금 한국의 정관계에서 강유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강유진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른다.’로 이어지고, 다시 ‘청와대에서 난리가 난다’로 결말지어지는 일련의 사고가 관련자들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유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유진이 한국의 정계와 재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믿고 있었다.
변호사의 말에 류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러면…… 나가서 최대한 방법을 간구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 말 없는 류 사장을 지켜보던 변호사가 자리를 떴다.
여기서 더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래. 나가서 근일이한테 말 좀 전해 줘. 최대한 구속은 면해야 한다고.”
근호 사장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저쪽이 원하는 건 다 내어주라고 해. 나랑 그 녀석이랑 둘 다 들어와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
사태를 직시하니, 동생과의 경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변호사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변호사는 다시 류 사장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해 드리게 되어서.”
“뭔가?”
“류근일 사장님께서…….”
“근일이가 뭐?”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호사의 말에 류근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사고? 무슨 사고?”
“교통사고입니다. 이동 중에…… 트럭이 사장님께서 타고 계시던 차를…….”
“무슨 소리야? 지금!”
“즉사였습니다.”
류근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