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코크 인더스트리
“대체…… 어쩌다?”
류근호는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미군이 모는 트럭이 사장님이 타고 계신 차를 덮쳤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침착하게 벌어진 사건을 설명했다.
미군의 군용 전술 트럭이 대양전자 사장이 탄 승용차를 뒤에서 덮쳐, 완전히 깔아뭉개 버렸다.
15톤이 넘는 차량이라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은 물론이고 운전석까지도 납작해져 사장과 운전사 모두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운전병이 술을 마셨던 모양입니다.”
“혹시 그 녀석과 관련된 건 아닌가? 강유진이?”
차츰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한 류근호가 물었다.
“그건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강유진의 행보로 보아서는 가능성이 그리 크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그 녀석의 행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죄송합니다.”
“그래서, 미군이라면 제대로 수사는 되겠어?”
류근호의 물음에 변호사가 고개를 숙인다.
“아무래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끝나 버릴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여하튼 검찰에서는 우선 풀어 주겠다고 합니다. 당장 장례부터 치러야 하니까요. 나가 계시는 동안 제가 손을 써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잘만하면 이대로 끝낼 수도 있을 듯싶습니다.”
“그래…… 알았네.”
류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생의 죽음으로 구속을 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쩐지 동생의 죽음이 단순히 사고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 배후에 강유진이 있다면,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안전한 거 맞지?”
류 비서가 조카 류성규에게 물었다. 일이 벌어질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서 벌어질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성규가 맡아서 처리한 것이다.
“차베스 상병은 조만간 본국으로 송환될 겁니다. 삼촌도 알잖아요? 미군은 못 건드리는 거. 어차피 흐지부지될 겁니다.”
성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본국으로 돌아가 재판을 받고, 길어야 1년 정도 복역하고 불명예제대로 끝날 겁니다. 어쩌면 6개월도 안 살 거고요. 그 정도로 200만 달러면 횡재지요. 더군다나 돈은 전부 차베스의 사촌 동생에게 현금으로 주었으니 뒷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그 동네에서 제 친구들하고 척지고는 못살아가요.”
“그러네. 200만 달러면 평생 구경도 못 할 돈이니.”
류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성규의 인맥에 대해서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 이런저런 친구들을 사귀어 놓았다고 해서 그저 건달들 몇이나 알고 있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 처리를 보니 진짜 어두운 인간들과 연줄이 있던 모양이다. 설마 미군까지 동원해서 살인을 저지를 줄이야.
“그 녀석들이 배신하지는 않겠어?”
“뭐 하러요? 그래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 차라리 주는 돈이나 받아 챙기고 다음 거래를 기다리는 편이 낫죠.”
“다음 거래라…….”
류 비서의 얼굴에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자신과 성규의 계획대로라면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두 사람은 더 사라져 줄 필요가 있다.
류 비서가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행보에 따른 피해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대양 그룹에 몸을 담기로 했을 때부터 그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그 일이 끝난 뒤의 뒤처리가 문제였다.
과연 그렇게 위험한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도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물론 그도 나름대로 생각은 갖고 있다. 연결 고리가 하나뿐이라면 그 하나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리면 그만이다.
삼촌과 조카는 서로의 내심을 감춘 채 이날의 성공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 * *
대양전자 사장에게 벌어진 사건을 보고받은 유진은 존 오웬을 불러 혹시 이번 사건의 배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정보망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존 브레넌 또한 이번 일로 조금 놀랐던 모양이다.
“전혀 뜻밖의 사태입니다.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 차베스 병장의 신변 처리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미국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그런 모양입니다. 군검찰에서도 이미 단순한 사고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파견군이 한국의 저명인사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상당히 곤란해질 겁니다. 단순히 군당국뿐 아니라 정권에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사안입니다. 절대로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유진도 이미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과격하게 일을 저질러 버렸기에, 오히려 안전했다.
미군이 파견국 유명 기업인을 청부 살해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 된다 생각하면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이제 겨우 한 달도 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다.
“우리 쪽에서도 차베스 상병의 뒤를 캐 보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어떤 조치를 하기는 어려워도, 사주한 놈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존 브레넌은 조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유진의 지시로 대양 그룹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하다.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그런 짓을 저질러서 득을 볼 쪽은 빤하니까요.”
대양 그룹 회장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대로 사망하면 남은 세 형제와 그의 부인이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니 용의자는 금세 좁혀진다.
“류성규와 그 숨겨진 넷째 아들은 여전히 어울리고 있겠죠?”
“네. 꽤 여러 번 같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그들 쪽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류근수는 지금 어떤가요?”
회장의 셋째 아들이고, 성규의 부친인 전 대양중공업 사장 류근수는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나가 있었다.
“형의 장례식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입니다.”
“그쪽하고 그 막내한테 신경을 더 써 봐요.”
유진은 지난번 삶에서는 무사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와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아직 성규와 다른 한 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다.
그저 대양 그룹이 어떻게 내부에서부터 붕괴해 가는지 정확하게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사실 성규가 언제라도 사고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번 삶에서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부친을 대양 그룹 후계자로 만들고, 자신 또한 그렇게 대양 그룹을 차지했던 자이니.
그걸 알면서도 방치했던 것은 굳이 그걸 막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쪽 정보망으로 정치권의 움직임을 좀 더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까?”
그보다는 대양 그룹에 손을 얹으려는 다른 어떤 세력이 거슬린다.
“약간의 손을 써 두었습니다. 검찰 쪽에 오더가 모두 세 곳으로부터 내려온 듯합니다. 청와대와 여당, 그리고 야당입니다. 여당 쪽은 4선 의원인 한재수 의원이고, 야당은 국회부의장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가져왔다. 유진은 존이 한국의 국가정보원 쪽에서 정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예측해 본다.
CIA는 전통적으로 각국 정보기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CIA에서 오랜 시간을 몸담아 왔고, 국장까지 지낸 존이라면 그 정도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국회부의장이라. 꽤 거물이군요.”
“그쪽에서 어떤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좀 더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존은 겨우 하루 만에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왔다.
“국회부의장의 수석 비서가 삼호 그룹 차남과 잦은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삼호 그룹?”
삼호 그룹은 부동산과 유통 등으로 세를 불린 대기업으로, 재계 5위권을 오가는 재벌 그룹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대양 그룹 회장의 첫째 사위가 삼호 그룹 회장의 처조카라는 점이다.
대양 그룹의 류 회장은 여느 재벌 그룹과 달리 혼맥을 맺을 때, 결코 너무 덩치가 큰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쪽의 영향력으로 후일 문제가 생길 것을 꺼렸기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라면 얼마 전 미국에서 난리를 친 막내아들을 명성 그룹과 혼맥을 맺어 주려 한 것이다.
그 경우는 막내아들의 나이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너무 어려 명성이 막내를 통해 어떤 힘을 쓰지 못할 것을 고려한 행사였다.
그래서 류 회장 자식들의 혼맥은 다른 재벌의 방계나, 중견 기업 사주의 자식 정도가 전부였다. 아니면 아예 흙수저 출신의 영특한 사위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니 삼호 그룹 회장의 처조카인 첫째 사위가 오히려 가장 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삼호 그룹과 대양 그룹 사이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존 브레넌과의 이야기는 거기까지로 했다. 유진에게는 이날 굉장한 거물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데이비드.”
그날 저녁, 유진은 뉴욕 팰리스 호텔의 프레지던트 스위트에서 미국의 재계와 정치계의 숨은 실력자를 만났다.
로또에 당첨되고 뉴욕으로 와서 처음 묵었던 방이라, 유진에게도 낯선 곳은 아니다.
데이비드 코크가 유진의 플라자 호텔을 마다하고, 이곳 팰리스 호텔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유진의 본진으로 들어가기 싫었던 까닭인 듯하다.
“어서와요. 동지.”
올해 일흔여섯의 심술궂게 생긴 백인 남자가 밝은 표정으로 유진을 맞이했다.
데이비드 코크.
미국에서 비상장기업으로는 카길과 함께 1, 2위를 번갈아 하고 있는 거대 석유 회사인 코크 인더스트리의 소유자 중 한 명이다.
형인 찰스 코크와 함께 코크 인더스트리의 지분 82%를 소유하고 있어, 포브스 선정 억만장자 순위 공동 8위에 올라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산을 합치면 1위인 빌 게이츠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실질적으로는 미국 제일의 자산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포브스 순위에 유진이 올라가기 전까지의 일이다.
다시 말해 유진에게 1위 부자 자리를 빼앗긴 형제 중 동생이 유진을 초대한 것이다.
“동지라 불러 주시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여러모로 공통점을 지닌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유진은 노인의 얼굴에 돌고 있는 환한 웃음이 결코 진짜 환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유진이 우리의 이상을 가장 명확하게 이어줄 후계자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흐흐.”
“그렇게까지 보아 주시니 고맙군요. 나도 데이비드와 찰스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진이 데이비드의 얼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음흉한 사람인지를 알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