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절망
꽤 오랜 고민 끝에, 일론 머스크는 유진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만일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다면 머스크는 자신의 지분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온난화에 따른 탄소 배출 규제에 드라이브가 걸리고 있는 시점이다.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에 혜택을 주고, 전기 자동차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한 정책이 미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전부터 지구 온난화는 거짓이라 주장해 온 트럼프가 재생에너지와 전기 자동차에 대한 보조금을 줄일 것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심하게는 전기 자동차 시장 자체가 와해 될 거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덕분에 적자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미래가 밝아 보이던 테슬라의 앞날에 적신호가 걸렸다.
실리콘밸리에서 트럼프를 지지해 온 유일한 거물이라는 피터 틸 덕분에 트럼프와 친분을 쌓기 위해 자문을 자처한 일론 머스크이지만, 여전히 미래는 안개에 쌓여 있다.
그런 상황에서 유진의 제안은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과연 튼튼한 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은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스페이스X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으로 페이팔 마피아와 유진의 협상이 끝났다.
페이팔 마피아들은 각기 지분을 받은 유성의 암호화폐 거래소들을 통해 각자가 추구하는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페이팔 마피아의 선구자들은 유진이 손을 대었다는 이유만으로 암호화폐 시장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만간 시장이 활성화될 것에 대비해 또다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 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유진은 암호화폐 시장이 이제 유진 자신이 알던 미래와 무척이나 동떨어진 상황이 되리라 예상했다.
원래였다면 이해 말에 비트코인이 2만 달러까지 올라가며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가, 한 번의 휴지기를 맞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유진의 개입으로 시장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걸 감내하고라도 유진은 적극적으로 암호화폐에 개입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암호화폐뿐이 아니다. 유진이 보유한 자산과 그 자산을 근거 삼아 레버리지를 일으켜 굴리는 자산은 이미 조 단위를 훌쩍 넘어선다.
당연히 유진의 개입으로 인해 미래에 많은 일들이 바뀌게 될 것이다.
이제 유진이 갖고 있던 어드벤티지 중 상당수는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자신의 드라이브를 멈출 생각이 없다.
그가 알고 있는 일들은 단순히 수치로 계산되는 경제의 흐름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들이 유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상, 유진은 아주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유진은 존 브레넌에게서 새로운 보고를 받았다.
“류근석한테요?”
"네. 그런 모양입니다."
존 브레넌은 대양 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인 류근석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고 알려 왔다.
“무슨 조치를 할까요?”
“그건 데이비드가 하는 게 낫겠군요.”
인수합병 전문가로서 대양 그룹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데이비드가 처리할 일이 생겼다.
“뉴욕에 있는 근석 군의 신변에 위험이 생길 수 있는 듯합니다.”
그날 오후, 데이비드가 대양 그룹 회장의 부인에게 연락을 넣었다.
“뭐라고요?”
그녀는 당장 대경실색했다. 오직 아들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아오는 여자였다. 그런 금지옥엽 같은 자식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이상한 친구들이 얼쩡거리는군요.”
“그, 그럼 어떻게 하죠?”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우선 주변에 사람들을 몇 명 배치해 놓았습니다. 전부 실전 경험이 많은 전문 경호원들이니 당장은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근석 군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경호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사모님께서 근석 군에게 알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수행원들처럼 근석 군에게 휘둘리면 경호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주지시키셔야 합니다.”
“차라리 한국으로 들어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근석을 한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그가 미국에서 저지른 사건들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마약 문제 때문인 점이 컸다.
이미 사회적 논란을 잔뜩 만들어 놓았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면 당장 검찰에 불려가 마약 검사를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미국에 있으면서 자중하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마약 문제도 문제이지만, 한국이라고 안전할 거 같지 않습니다. 류근일 사장의 교통사고도 우리 쪽에서는 좀 의심스럽다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설마?”
“누군가가 회장님의 자제분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근호. 그 사람인가요?”
여인은 남편의 첫째 아들 류근호를 의심했다.
“글쎄요? 확실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사관인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데이비드는 이번 일이 류성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근석이 좀 잘 부탁드릴게요.”
여자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사모님의 안위도 걱정입니다. 한국의 수행원들로는 제대로 된 경호가 힘들 걸로 보입니다. 사실 비서진들도 지금은 믿을 수 없고요.”
“회장님의 심복인 오 비서실장이 뽑은 사람들이에요.”
“회장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오 비서실장도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이비드의 말에 여자는 비로소 사태를 직시할 수 있었다.
오 비서실장이 충성을 다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그 충성의 방향은 자신을 중하게 써 줄 사람에게로 향할 것이다.
데이비드가 이 사태의 원흉을 밝히지 않은 탓에, 그녀는 류근호 쪽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오 비서실장과 류근호가 손잡는다면, 그녀도, 그리고 그녀의 아들도 절대 안전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죠?”
“경호원들을 갈아치우거나, 방법을 간구해 보아야겠죠.”
데이비드는 미국의 경호업체를 알려 주었다. 그쪽을 통해 제대로 된 경호를 받는 편이 나을 거라는 조언이다.
여자는 데이비드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당장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 경호팀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미 유진을 통해 연락을 받은 경호 회사에서 충분한 비용을 청구하고 경호팀을 파견했다.
* * *
“곤란한데…….”
성규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군. 결국 근석이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지?”
류 비서는 훨씬 더 침착한 얼굴이었다.
“근석이한테 무려 다섯 명이 붙었어요. 전부 제대로 된 경호원들이라더군요. 그 녀석들이 포기했어요.”
성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친분이 있는 히스패닉 갱 일당이다.
그저 총을 들고 다니며 앞뒤 안 가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지, 무슨 대단한 훈련을 받은 암살자 같은 자들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암살자를 고용할 방법 따위는 알지 못한다.
히스패닉 갱들을 통해 좀 더 실력 있는 사람을 찾아 보는 것을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지간해서는 힘들 거란다.
뉴욕에서 전쟁이라도 일으키지 않고서는 경호원이 다섯이나 붙은 대상을 살해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멕시코에서 카르텔을 부르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 위험성이 크죠.”
“어쩔 수 없지. 그 여자도 당연히 어렵겠군. 어디서 불러왔는지,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 것 같은 백인 남자들이 단단히 보호하고 있어.”
여전히 회장의 자택에 근무하고 있는 류 비서는 회장 부인의 경호원들과 직접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
딱히 범죄자와의 접점은 없는 류 비서였지만, 그들의 덩치와 눈빛만 보아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참 눈치 빠른 여자야.”
“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는 잘 굴리는 것 같더군. 여하튼 그 여자가 살아 있으면 진짜로 곤란해. 유언장이 공개되고 나면, 그 여자와 근석이가 유류분을 주장할 수 있어.”
“하, 영감 진짜 웃긴다니까. 그 나이에 무슨 후처야. 그냥 조용히 데리고 살았으면 문제없잖아.”
성규가 툴툴거렸다.
“어지간히 사랑했었나 보지.”
그렇게 말하는 류 비서의 눈은 평소보다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오 비서는 결심이 섰답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 여자가 문제야. 요사이 오 비서를 보는 눈빛이 달라. 뭔가 눈치라도 챈 모양이지. 경호원을 갈아 치우고 나서는 기존 수행원들한테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말이야.”
“하…… 역시 그 여자부터 처리했어야 했나?”
성규는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장이 눈을 감기 전에 적어도 셋은 치워 버려야 했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도 대단하네. 형이 죽었는데, 들어와 보지도 않고 말이야.”
류근일의 장례식에 그의 동생 둘이 참석하지 않았다. 해외로 근신을 가 있던 전 대양중공업 사장 류근수도, 그리고 사고뭉치 막내 류근석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와서 뭐 하게요. 괜히 검찰 조사나 받게 되면 골치 아파지지.”
“그렇기는 하지. 그나마 근일이 그 인간이 죽어서 조금 도움이 되는 것도 있어.”
류근일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언론에서는 대양 그룹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를 조금은 멈추었다. 미디어에서 조용하니, 여론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단지 류근호에 대한 수사는 곧 재개되었고, 류근호는 결국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정권 차원에서 대양 그룹에 대한 징치를 멈출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그걸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은 태평양 건너에 있는 유진이다.
그리고 미디어에서는 오히려 사태에 대해 보도를 자제하며, 조용하게 대양 그룹의 해체를 위해 일을 진척시키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잡아 둘 거야? 그룹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어. 근수가 그렇게 가 버리고 나서 나까지 여기 계속 갇혀 있으면 그룹의 중심을 잡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류근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변호사를 닦달했다.
“지금 사방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조만간 어떻게든 나가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 조만간이 대체 언젠데!”
“당장은 어려울 거 같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이대로 그룹을 말아먹으라고? 대양이 쓰러지면 자기들은 괜찮을 줄 알고?”
류근호의 끝없는 불호령에 변호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검찰 측에서 미국 쪽 자료를 받았다는 모양입니다.”
“미국?”
“네. 미국의 사모펀드 5곳의 금융 자료가 넘어왔습니다. 아직 검찰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제가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그런 모양입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왜 미국놈들이? 아! 또 그 자식이지?”
류근호는 어떻게 그런 자료까지 넘어왔는지 금세 깨달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모양입니다.”
“하…….”
류근호는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해외 비자금과 관련된 자료라면 정말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오 비서는 어떻게 말하던가?”
“당장 셋째 사장님이라도 들어오셔서 자리를 지켜 주셔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하지만 제가 알아보니 중공업 쪽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지금 들어오시면 같이 구속될 염려가 있습니다.”
“완전히 뼈를 갈라 버리겠다는 거로군.”
이제 류근호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