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속셈
다음날은 오 비서가 변호사와 함께 류근호를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고생은 뭐. 나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지. 그래, 자네는 어떤가?”
류근호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어쩐지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이다.
“저야 늘 뒤치다꺼리가 일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보다 계열사 경영진들이 문제입니다. 검찰이 온 그룹 계열사들을 전부 쑤셔 대고 다니는 통에 다들 죽겠다고 합니다.”
“우리 쪽에서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이지?”
“네. 당분간은 그저 버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럼 지금 누가 그룹을 지휘하고 있는 겐가?”
류근호가 조금 기운을 내어 보며 묻는다.
“홍 사장님께서 맡고 계신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홍 사장님의 그룹 전체에 대한 장악력은 거의 없다 보아야 할 겁니다.”
대양 그룹 회장의 첫째 사위이며 삼호 그룹 회장의 처조카인 홍철중은 현재 대양 에너지의 대표이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대양 그룹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세 아들 중 첫째는 구속 상태이고, 둘째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셋째는 구속될까 두려워 한국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회장 장녀의 남편인 홍 사장이 그나마 정통성을 갖고 있다 할 수 있었다.
“홍 사장이라면 그래도 진중한 성격이니, 이 위난을 넘기기에 적합하겠지. 내가 못 나가면 홍 사장 체제로 그룹의 운영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겠어. 그러니 자네가 힘을 좀 실어 주게.”
류근호 사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홍 사장님의 인품이라든지, 경영 능력은 딱히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척 힘들어하십니다.”
“그래. 그런 게 당연하지. 하지만 어쩔 수 있겠나? 그 친구 말고 사람이 없는데.”
“그렇기는 합니다. 근수 사장님이라도 오시면 그나마 나을 텐데 말입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말해 뭘 하겠나.”
“김 사장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차라리 이참에 그룹을 분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요.”
“분리?”
지금까지의 기운 없던 얼굴이 싹 사라지고, 냉막한 표정으로 류근호가 되물었다.
“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던 계열사들과, 정상적인 계열사들이 한데 묶여 있으면, 함께 침몰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서, 차라리 살릴 수 있는 계열사라도 살리자고 하셨습니다.”
“그래……. 결국 자기라도 살아남겠다는 말이지?”
류근호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오른다.
“대양유통과 백화점이 독립하겠단 말이지요.”
오 비서도 선선히 김 사장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음을 말한다. 대양유통 김 사장은 회장의 둘째 딸 남편으로, 유통과 백화점을 맡아 경영하고 있다.
“슬슬 하나씩 튀어나올 때가 됐나 보네?”
“그렇죠. 위기가 닥쳐 오면 자기라도 살아날 구멍을 찾는 법 아니겠습니까?”
“경아는 뭐라고 하나?”
“아가씨께서는 달리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워낙에 조용하신 분이어서.”
“걔라고 무슨 생각이 있겠어? 남편 하자는 대로 따를 아이지. 여하튼 달리 말은 하지 말아 보지.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보자고. 그런데 홍 사장은 달리 꿍꿍이가 없는 거 같아?”
“홍 사장님께서도 김 사장님 말씀에 달리 크게 이의를 표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류근호 사장은 매제들의 행동에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듯 보였다.
“만약 김 사장 말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어? 유통과 백화점, 에너지, 그리고 카드랑 생명 정도는 살릴 수 있나?”
“우선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1/3도 안 남게 됩니다.”
대양 그룹은 국내 대기업 집단 중에서도 가장 많은 분야를 아우르는 문어발 그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그룹의 중추는 자동차와 전자, 그리고 중공업이다.
이 주력 계열사에서 생산한 상품이 전 세계에 공급망을 가진 인터내셔널을 통해 수출되는 매출이 절대적이다.
두 사위의 말대로 하면 주력을 전부 포기하고, 내수 위주의 그룹만 남게 된다.
“그쪽을 살리고, 한규와 대규에게 몰아줄 방법을 찾아보지.”
류근호 사장은 오히려 사위들의 계책을 이용해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내실 있는 기업을 넘길 방법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어차피 주력 계열사들을 살릴 수 없다면 차리라 나머지라도 삼킬 생각이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오 비서는 충실하게 대답했다.
* * *
“다음 달에 대양인터내셔널 주주 총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대양 그룹의 움직임에 항상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데이비드가 보고했다.
대양인터내셔널은 대양그룹의 순환출자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양인터내셔널을 지배하면 대양 그룹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대양인터내셔널의 지분은 대부분 사주 일가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회장이 15%, 그리고 세 아들이 합쳐서 15%, 기타 그룹 계열사에 10% 정도가 있다.
거기에 아마도 다른 방법으로 또 적지 않은 지분을 들고 있다 보아야 한다.
“슬슬 분열이 시작되는 모양이네.”
“아마도 주력 계열사와 비주력 계열사를 분리하려는 모양입니다.”
“주력이면 자동차, 전자 쪽을 버리겠다는 말이겠군.”
“예. 어차피 살리지 못한다면, 실속이라도 찾겠다는 생각 같습니다. 그런데 내부의 움직임이 꽤 부산스럽습니다.”
데이비드는 사위들과 형제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사위들이 힘이 있나?”
대양의 류 회장은 철저하게 아들들 위주의 경영을 이어 왔다.
사위들에게 계열사를 맡겨 놓긴 했어도, 여전히 지분은 거의 넘겨주지 않았다.
“한 부인에게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차피 아들들은 힘을 못 쓰니, 한 부인이 회장의 지분을 움직이면 가능하다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에 더해 각 계열사 사장들이 움직일 수 있는 지분과 일반 주주의 지분이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대양 그룹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류근호 사장이 구속된 가운데에도, 그룹의 경영진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수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삼호 그룹에서 이 사태에 끼어들 생각인 모양입니다.”
“삼호 그룹이면, 첫째 사위와 관련 있는 기업이었지?”
삼호 그룹은 호텔과 백화점, 유통에서 4대 그룹과 경쟁을 다투는 대기업이다.
그룹의 덩치는 5, 6위 권 수준으로 만일 대양 그룹의 유통, 금융 계열사를 집어삼키면 당장에 4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당연히 대양 그룹 유통 부분을 노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정치인들 쪽으로 꽤 로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치권에서 검찰을 동원해 자신들과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획책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진은 이미 삼호 쪽에서 국회부의장에게 무언가 로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런데 야당 쪽만이 아니라 여당 쪽에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정말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재미있게 돌아가네. 대양 그룹이 삼호 그룹에게 노려진다니.”
몇 년 전만 해도, 삼호 그룹이 대양을 노리는 모습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등장하며 대양 그룹의 위상이 흔들렸고, 이제는 재계 순위 아래인 삼호에게까지 사냥감으로 보일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한정훈 부사장도 삼호 그룹 이야기를 꺼냈었지.”
제일 그룹에서는 대양자동차를 비롯한 주력 계열사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명성과 삼호 그룹 등을 끼워 넣어 대양 그룹을 해체시키고 큰 덩어리는 자기가, 나머지는 명성과 삼호에게 넘겨 주려는 계획이었다.
“아무래도 다산 그룹과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 할 거 같네.”
유진은 대양 그룹을 둘러싼 국내 대기업들의 암투가 반가웠다.
대양이라는 커다란 먹이가 눈앞에 내던져지자 대그룹들에서 이걸 어떻게 나누어 먹을지를 두고 추잡한 싸움을 벌일 것이 예상되었다.
물론 당장이야 내부적으로 정리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유진은 그들이 짜 놓은 구도대로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며칠 뒤, 다산 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인 김수호가 한국에서 뉴욕으로 날아왔다.
“사장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전부 자네 덕인데 축하는 무슨.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하하.”
다산전자 부사장을 맡고 있던 김수호는 프리스케일 인수를 발표하며 전격적으로 사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듣기로는 조만간 다산 그룹의 전자 부분을 독립시키며 회장을 맡게 될 예정이라 한다.
“정말 자네한테는 뭐라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프리스케일 인수로 전자의 위상이 두 배는 오른 것 같아.”
“앞으로는 거기서 두 배, 네 배, 계속 치고 올라갈 겁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덕담으로 서로의 환심을 쌓았다.
“그런데 대양 그룹을 둘러싸고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더군요.”
“그래. 제일, 명성, 삼호, 성진. 다들 대양을 뜯어먹으려 정신이 없는 모양이야.”
이미 다산 쪽에서도 다른 그룹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일 그룹과 함께 재계 수위를 다투던 기업이니 건실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다산만 빼고 재계 1위부터 6위까지가 전부 달려든 형세입니다.”
“하하. 우리야 그렇게 양심 없는 놈들과 다르니까. 자네가 대양에 침을 발라 놓았는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의만 상하면 어쩌나.”
다산 그룹 측에서도 대양 그룹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유진과의 관계를 훨씬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유진의 대양에 대한 감정을 잘 알고 있는데, 괜히 욕심을 내었다가 유진과 척이라도 진다면 얼마나 곤란해질지를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유진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탐이야 나지. 지금은 부실하다고 해도, 우리랑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니 말이야.”
한국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가능한 많은 분야에 발을 걸쳐 놓았다.
대기업 집단 중 건설, 유통, 전자, 중공업, 화학, 유업 따위의 계열사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대기업들은 결국 서로가 경쟁 상대이며, 한쪽이 위태로울 때는 서로의 사냥감이 되기 마련이다.
다산 그룹만 해도 대양 그룹과 겹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보아야 할 정도이다.
“자동차, 전자, 유통…… 솔직히 통째로 삼킬 수만 있으면 좋겠어. 흐흐흐.”
곰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순박하게 웃으며 욕심을 드러냈다.
“다산과 대양이라. 그거 엄청나겠군요.”
유진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웃고만 있었다.
“그래. 혹시 우리 쪽에 맡길 생각이 있는가?”
유진이 말을 꺼내니, 꼭꼭 눌러 왔던 욕심이 머리를 드는 모양이다.
“제가 무슨 권한이 있다고 맡기고 말고를 하겠습니까?”
“흐흐. 자네가 아니면 누가 권한이 있다 말하겠나? 다들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꼴이지.”
“자동차, 전자, 유통이라. 그 세 가지를 원하시는 모양이네요?”
유진은 이 곰 같은 사내가 언급한 순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동차와 전자만 먹어도 우리가 확실하게 1위 탈환이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다산 그룹이 확실하게 재계 1위였다.
하지만 2000년대로 넘어서며 제일이 전자를 중심으로 1위 자리를 빼앗은 뒤로, 다산은 한 번도 재계 1위 자리를 넘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이 대양 그룹을 해체하며 떨어질 콩고물을 누가 얻어가냐에 따라 재계의 순위는 바뀌게 될 것이다.
IMF 이후로 사상 최대의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대양 그룹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 번 구도를 생각해 보지요.”
유진은 대양 그룹의 해체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대기업들 눈앞에 내놓는 것으로 한국의 재계를 통째로 손에 넣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