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42화 (142/363)

142화 각자의 사정

“철중이가 뭐라고 하던가?”

삼호 그룹 회장인 주성호가 장남에게 물었다.

“그 여자와 이야기가 제대로 오가는 것 같습니다. 그 여자도 의붓자식들에게 대양을 넘겨주는 것을 신통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군요. 아마 큰 문제 없이 우리쪽 손을 들어줄 것 같습니다.”

삼호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삼호호텔의 대표를 맡고 있는 장남은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에 서서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사촌이자 대양 그룹 회장의 사위인 홍철중과 긴히 연락하며 일을 꾸미는 것은 전부 그의 일이다.

이번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면 삼호 그룹은 당당하게 4대 재벌 안에 들어갈 테고, 자신은 그 공로로 삼호 그룹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할 수 있다.

삼호 그룹은 전대 회장인 주경호가 일본에서 창업한 삼호상회를 모태로 하는 유통, 호텔 전문의 대기업이다.

젊은 시절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주경호가 차린 한일 간 무역 회사는 전쟁기에 큰 성장을 이루었고,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한국에서 사채업을 하며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 수십 년 뒤에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며 10대 재벌 안에 들게 되었다.

그 뒤로 서울의 요지에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호텔을 세우고, 각지에 유통망을 늘려 가며 유통과 호텔 업계에서는 항상 선두를 달려오고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 돈줄이 되는 것은 이제는 정상적인 금융업체로 바꾼 사채업에서의 수익이다.

2대째인 주성호가 삼호 그룹의 전권을 잡은 뒤로는 한국의 여느 대기업처럼 다양한 분야에 진출에 덩치를 키워 오고 있지만, 내실은 그다지 없어 여전히 주력은 금융과 부동산에 있다.

삼호 그룹의 현 회장인 주성호는 자신의 대에서 부친이 이룬 성과를 넘어서는 실적을 내고 싶어 했지만, 주력 외의 분야에서 이미 기존 대기업들의 아성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수십 년 동안 부동산과 사채에서 벌어들인 자금은 천문학적이지만, 사업은 단순히 돈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삼호 그룹 위쪽의 4대 그룹들은 각기 정재계에 삼호에는 비교되지 않을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고, 시민들이 바라보는 삼호에 대한 눈길도 변하지 않았다.

일반 대중들의 시선에 삼호는 여전히 부동산을 기반으로 호텔 장사나 하는 기업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회장에 오른 지 20년째, 주성호는 드디어 자신의 오랜 야망을 이룰 기회를 맞이했다.

바로 대양 그룹의 좌초 위기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재계에서 4대 그룹의 아성은 독보적이었다.

제일, 다산, 대양, 그리고 명성.

이 4대 그룹과 나머지 대기업 집단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있다.

단 한 번도 다른 대기업 집단에서 이들 4대 재벌 그룹의 순위를 넘어선 일은 없다.

10대 그룹이 귀족층이라면, 그중 4대 그룹은 왕족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작금에 와서 대양 그룹이 흔들리며, 5위와 6위를 오가던 삼호 그룹이 위로 올라설 기회를 찾은 것이다.

“자동차, 중공업은 필요 없어.”

대양자동차는 다산자동차에 이어 국내 2위의 자동차 기업이지만, 최근 몇 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걸 손에 넣어 다시 제대로 굴리려면 적지 않은 투자가 필요하다.

그의 부친이 그러했듯이 주성호 회장은 아웃풋이 명확하지 않은 사업에는 돈을 풀지 않는다.

사채나 부동산은 언제고 반드시 투자한 비용을 되찾을 수 있지만, 기간 산업은 시황에 따라 엄청난 손해만 남기고 끝나 버릴 수도 있다 생각하는 것이다.

4대 그룹의 창업주들이 무모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조선소, 자동차, 전자 산업들에 과감한 투자를 거듭해 성공해 온 것에 비하면, 삼호 그룹의 투자는 늘 보수적이었다.

그 결과 4대 그룹은 하나의 산업에 성공할 때마다 그 덩치를 몇 배씩 키워 올 수 있었지만, 삼호 그룹은 부동산의 가치가 오르는 것에 의존한 경향이 높다.

창업주를 이어 삼호 그룹의 전권을 이어받은 주성호도 본질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동안 적지 않은 새로운 도전을 했다지만, 여전히 대규모의 자본이 들어가는 분야에는 절대 기웃거리지 않고, 실패해도 큰 손실은 보지 않을만한 투자만을 이어 왔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나 조선처럼 수조 원의 투자가 필요한 사업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

“전자도 딱히 매력이 없어. 제일에 자동차와 중공업을, 명성에는 전자를 던져 주고 나머지는 전부 가져오도록 하지.”

삼호 그룹은 국내 제일의 재벌 그룹인 제일과 4위인 명성과 함께 대양 그룹의 분할에 대해 협상했다. 상호 간에 필요한 계열사를 나누어 먹을 심산이었다.

협상의 자리에는 삼호와 함께 5위를 다투는 성진 그룹도 끼어 있지만, 삼호는 성진에도 나누어 줄 생각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5위 자리를 놓고 라이벌로 싸워온 사이이다. 이런 중차대한 순간에 굳이 그쪽까지 챙겨 줄 이유는 없다.

“자동차, 중공업, 전자를 제외하면 주가 총액으로는 약 7조 원 상당입니다. 하지만 지금 대양의 상황이 악재투성이라 그렇지, 정상화되서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으면 그 서너 배에 해당할 겁니다. 그걸 전부 가져오면 2, 3년 내에 명성과 겨루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4대 그룹에서 대양이 빠지면 삼호 그룹은 성진에 이어 5위에 해당한다.

거기서 대양의 알짜배기 계열사를 가져오면 명성을 넘어 3위까지도 넘볼 수 있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다. 삼호 그룹으로서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성진 쪽에는 제대로 약을 쳐 놓았지?”

“물론입니다. 그쪽에서는 케미칼과 유화 쪽을 가져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두자고. 흐흐.”

물론 주 회장도, 그 아들도 성진과의 밀약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쓰임새가 떨어지는 계열사 몇 개를 던져 주고 생색이나 낼 생각이다.

“그 여자만 손에 넣으면 큰 문제는 없는 거지?”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얼마 뒤로 다가온 대양인터내셔널의 주주총회였다.

대양 그룹을 크게 두 부분으로 계열 분리하고, 전자, 자동차, 중공업 쪽은 제일과 명성에 넘기고, 나머지는 삼호가 차지하려면 과반의 지분이 필요하다.

그 지분의 상당 부분은 대양 그룹의 회장이 쥐고 있다.

하지만 대양 그룹 류 회장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회장의 부인이다.

삼호 그룹으로서는 그녀의 지지가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그 일만 성공하면 제일 큰 문제가 해결됩니다.”

“꼼꼼하게 처리해야 해. 이번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시작하지 않느니만 못해.”

“알고 있습니다. 대양 그룹 회장 비서실장도 돌아설 것 같습니다. 오경덕이는 우리한테도 쓸모가 많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대양 그룹의 대소문제를 도맡아 처리해 왔으니, 그자가 있으면 합병 이후에 생길 문제를 거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필요한 인재라면 데려와야지.”

“삼호 그룹 부회장 자리라면 그쪽도 서운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간 오경덕이 대양 그룹 회장의 심복으로 큰 권세를 누려 왔다지만, 그의 위상은 어디까지나 비서실장이었다.

실세라고는 하지만, 공명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새롭게 재계 3위에 오를 삼호 그룹의 부회장 자리 정도라면 그 남자에게도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부회장 자리에 앉힐 생각은 아니다. 대양 그룹 계열사들이 삼호에 편입되어 자리가 잡히면 언제라도 물러서게 할 요량이다.

“비용 계산은 확실하게 해 놓았지?”

돈 장사로 커 온 그룹의 수장답게 주 회장은 무엇보다 비용에 민감했다.

“여당의 한재수 의원과 야당 쪽 국회부의장에게 지불해야 할 게 가장 많습니다. 양쪽 합해서 아마 천억 정도가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손실부터 계산하는 것은 그들이 사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사꾼이나 금융가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각기 여당과 야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두 거물 정치가가 삼호가 대양을 삼키는 것에 대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1,000억의 비용은 아까울 것이 없다.

더군다나 그 비용이라는 것이 삼호 그룹만이 내놓아야 할 돈은 아니다.

함께 나누어 먹기로 한 제일과 명성, 그리고 성진도 각기 나누어 각출해야 한다.

거기다 두 부자는 대양 그룹 알짜 계열사를 가져오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비용도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낼 생각이 없다. 전부 대양 그룹 계열사를 통해 조달할 생각이다.

여러모로 남는 게 많은 장사이다.

“그 여자가 움직일 수 있는 지분이 약 14.7%입니다. 그리고 계열사들이 10%를 가지고 있고, 해외에 12%가량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철중이 계열사 사장들을 손아귀에 넣었고, 해외 쪽은 오 비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7.4%까지 합하면 모두 40%가 넘습니다. 승산은 충분합니다.”

삼호 그룹과 성진 그룹, 그리고 제일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대양인터내셔널의 주식이 나름 꽤 된다.

삼호 그룹은 사채업을 하며 국내 대기업들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댔었고, 성진은 독재 시절 정치권에 줄을 대고 10대 그룹에 올라서며 얻어낸 지분이다.

“그래.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처리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홍철중이 제대로 해 준다면 내년에는 우리 삼호가 재계 3위가 될 겁니다.”

* * *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삼호의 제안에 손들어 주기로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대양 그룹을 둘로 나누고, 부실이 적은 쪽을 전부 삼호 그룹에 넘기는 게 과연 우리한테 도움이 되겠어요?”

“삼호 그룹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사모님과 근석 도련님을 위한 최선입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근석 도련님께서 귀국해서 그룹의 중책을 맡을 방법도 없고, 큰 사장님이나 근수 사장님께서도 근석 도련님께 대양을 나누어 드릴 생각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더군다나 큰 사장님께서 구속 중인 상황이라 그룹 정상화는 완전히 물 건너갔고요.”

수십 년 동안 그룹 회장의 그림자처럼 보필해 오던 오 비서실장은 그룹의 위기 상황이 오자 그룹을 분해하고 다른 그룹에 넘기자고 회장의 부인을 설득하고 있었다.

만일 회장의 세 아들 중 하나만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어도 이런 짓을 꾸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대양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침몰할 배라면 최대한 많은 것을 챙겨 떠나야 한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몰할 배를 인수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아주 좋은 물주가 나타났다.

재계 수위의 4개 그룹이 나섰고, 야당과 여당의 중량급 정치인들이 뒤를 받쳐 주고 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은 절대 현명하지 않다.

“지금 한국 국민들의 대양 그룹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아실 겁니다. 근석 도련님께서 계열사를 맡는다 해도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보기 어려울 겁니다. 차리리 제값을 받고 넘기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양 그룹 회장 부인은 평소보다 훨씬 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나 위풍당당하던 여자가 위기의 상황에서 그저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어쩐지 짠한 생각이 든다.

“나 요즘 많이 힘들어요.”

회장의 부인은 이미 40대에 들어섰음에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고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촉촉한 눈을 바라보며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낀 오 비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어쩐 일인지 그녀는 비서의 그런 무례한 행위에 저항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안주인과 머슴으로만 마주하던 두 남녀의 사이에 변화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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