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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43화 (143/363)

143화 제일 그룹

대양인터내셔널 주주총회를 앞두고 각 그룹에서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대양 그룹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양 그룹의 해체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해체되는 대양 그룹의 각계열사들이 어떻게 나누어지는지에 따라 향후 한국의 경제계가 새롭게 재편될 것이 확실하기에 각 그룹에서는 최대한 대양 그룹의 알짜배기 기업들을 차지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최대의 재벌 그룹인 제일 그룹에서도 이번 총회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검찰이 대양자동차 류근호 사장에게 20년 형을 구형했습니다. 그쪽 변호사가 병환을 이유로 보석 허가 신청을 하고 있지만, 구속을 풀어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 상황에서 류 사장이 풀려나면 대양 그룹의 해체에 제동이 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양 그룹 해체가 완전히 끝난 뒤에나 보석이 허가되거나,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제일 그룹 회장실에서는 매일같이 주요 인사들이 모여 대양 그룹의 향방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조용히 보고를 듣고 있던 회장이 물었다.

“전액 탕감은 어려울 것 같고, 4조 정도는 써야 한답니다.”

“택도 없는 소리로군. 그 돈을 쓰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제일 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쪽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선업이 다시 활황으로 돌아서리라 예상되고는 있지만, 대양중공업의 가치가 그만한 금액을 지불할 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헐값으로 내주면 후일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관심 없다고 하지. 그 부실 덩어리를 우리가 아니면 누가 가져갈 수 있겠어?”

“삼원 그룹에서도 탐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흥! 삼원 따위가 대양중공업을 넘본다고? 새우가 고래를 삼켜?”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회장의 장남 한정훈이 끼어들었다.

“대양중공업은 우리가 가져와야 해.”

“뭐? 미쳤어요? 4조를 주고 부실 덩어리를 가져온다고요?”

차남이 바로 반발했다.

“강 회장과 약속한 거야. 자동차와 중공업을 우리가 맡기로 했어. 강 회장은 대양 그룹 해체로 대양 임직원들이 고통받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러니까 대양중공업을 인수해서 정상화할 수 있는 곳은 다산이나 우리뿐이야. 삼원 같은 곳에서 인수해 봤자 대량의 정리해고나 있을 뿐이야.”

“아니. 그러면 대양중공업 직원들 살려 주자고 4조 원이나 들여 인수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봉입니까? 강유진이 그 사람이 좀 잘 나간다고 해서, 우리를 그렇게 부려먹을 만큼 대단해요?”

차남은 최근 들어 부쩍 거칠게 장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기 후계 구도에서 실적으로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남이 미국으로 몇 번 건너가 강유진을 만나고 오면서부터 그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금 동원력에서 세계 제일이라는 남자가 라이벌인 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밀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차남은 사안마다 형과 부딪치는 모습을 보여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대단하지. 대단한 사람 맞아. 지금 제일전자 주가가 유지되는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주가 좀 떨어지면 어떻게 되기라도 해요? 그보다 제일 그룹의 자존심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강 회장이 제일전자 주식을 털어 버리면, 당장이라도 주가가 반 토막 날 거야. 그러면 주주들이 가만있을 거 같아?”

“그렇다고 해서 그 부실 덩어리를 4조 원이나 주고 인수하자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그 강유진이 대양 그룹에 복수하고 자기 이미지는 깎지 않으려는 속셈 때문에?”

“대양자동차를 인수하는 것으로 대가는 충분해. 제일자동차와 대양자동차의 합병으로 우리가 얻을 이익을 생각하면, 약간의 출혈은 감수할 수 있어. 그리고 조선업 시황을 생각하면 대양중공업과 제일중공업의 합병만으로도 절대 손해는 아니야. 세계 제1의 조선소가 된다고. 부채야 다시 협상에 나서면 되는 거고.”

“그만들 하거라.”

두 형제의 논쟁을 지켜보던 부친이 조용하지만 힘 있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얼굴에 핏대를 올리던 두 형제가 입을 다물고 부친을 바라보았다. 여느 대그룹의 부자들처럼 제일 그룹의 가족들도 가장의 권위는 확고했다.

“대양중공업 부채에 대해서는 좀 더 압력을 넣어보겠습니다.”

두 형제가 입을 다물자, 전략기획실장이 대신 입을 연다.

“그렇게 해봐. 대양중공업을 가져오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헛돈을 쓰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회장은 두 아들 중 어느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 늘 그러하듯 두 아들의 경쟁을 조장하는 것은 부친이었다.

두 사람의 화해를 종용하지도 않았고,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회장은 항상 제일 그룹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둘 중 누가 제일 그룹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를 눈여겨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강 회장은 뭐라고 했나?”

“네.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대양 그룹 사태로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원치 않는다는 말만 하더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자기가 이렇게까지 이끌어 놓고선 말이야.”

둘째 아들이 다시 한번 어깃장을 놓았다.

“나이에 비해서는 너무나 원숙한 사람입니다. 절대 허투루 볼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운이 좋아 그런 성공을 보았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한정훈은 자신을 밀어준다 생각하는 유진에 대해 호의적인 수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상 이번 사태는 두 형제에게 후계 구도의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다.

대양자동차와 대양중공업을 인수하면 이제 제일 그룹은 전자와 함께 한국의 산업계를 이끌어나가는 정점으로 완벽하게 군림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현 회장의 가장 큰 바람인 자동차 사업에 있어서도 다산과 함께 양대 구도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순간이다.

이는 장남이 제일 그룹의 후계 자리를 명백하게 차지할 수 있는 정도의 결정적 기여로 볼 수 있다.

“언제고 한번 강 회장을 만나보아야 할 것 같구나.”

제일 그룹 한 회장은 작금의 한국 경제계를 이렇게까지 뒤흔들어 놓은 당사자를 직접 한번 마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한정훈이 재빠르게 말했다.

“회장님의 초청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지. 한동안 한국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가 보는 편이 낫겠구나.”

“아버지!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아니, 그 젊은 사람을 보러 제일 그룹 회장이 몸소 움직이다니요?”

둘째 아들이 다시 반발하며 나섰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작금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그 남자가 대세를 이끌고 있는데. 너희들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업을 한다는 것은 위세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내 손에 한 푼이 더 들어올 수 있다면, 젊은 사람이 아니라 열 살 어린아이에게도 머리를 숙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한국 재계의 정상에서 10여 년을 군림해 온 한 회장은 정말로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새파란 젊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그가 부친인 선대 회장과 함께 제일 그룹을 성장시켜 온 장본인이기에 가능한 행보였다.

지금이야 천하의 제일 그룹이라 하지만, 재계의 정상에 이르기까진 수많은 부침이 있었다.

수십 년의 군부독재 시대를 보내면서 대통령뿐 아니라 한낱 장군에게까지 머리를 조아리면서 키워 온 기업이다.

민주화 시대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이다. 300명이 넘는 임기 4년짜리 새파란 국회의원의 호통에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 줄 자세가 되어 있다.

“얼마 전에 다산전자 김 사장이 뉴욕에 다녀갔다는구나. 다산 사람들이 그 강 회장과 막역하다고 했지? 틀림없이 이번에도 무언가를 논의했을 거야.”

회장의 이어지는 말에 한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차남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우리가 대양자동차를 손에 넣는 것을 다산에서 그냥 두고 볼 리만은 없지.”

“맞습니다. 강유진이가 형님한테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차남이 재빠르게 부친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를 빼앗기면 곤란해.”

지금까지와 달리 한 회장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난다.

계획과 달리 다산자동차에서 대양자동차를 삼킨다면, 제일자동차의 입지는 한없이 낮아진다.

더 이상 자동차 사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강 회장에게 연락해서 바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산 그룹이 거론되자 잔뜩 긴장한 한정훈이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이번 일은 조금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돼. 그리고 이 부회장은 강유진 회장에 대한 자료를 전부 모아서 분석하도록 하세.”

회장은 이어 전략기획실장에게 새롭게 지시를 내렸다. 협상을 위해 나서려면 상대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 부사장도 이 부회장에게 지금까지 강 회장과 만났던 일들에 대해 최대한 알려 주게나.”

“알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전부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정훈의 얼굴에는 조금은 곤욕스러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LA의 저택에서 할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만나 즐기던 일들까지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차남이 끼어들었다. 계속 사태를 두고 보다가는 자신만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이번에는 나 혼자 가 보겠네. 자네들은 당분간 여기 일에 전념하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준비만 마치겠습니다.”

한정훈은 차남에게 기회를 주느니 차라리 둘 다 가지 못하는 쪽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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