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경쟁력
“강 회장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되어 갈 것 같소이까?”
한국에서 날아온 제일 그룹 한 회장의 첫 질문은 현안인 대양 그룹의 일도, 제일 그룹에 대한 소감도 아닌, 한국 경제에 대한 유진의 예측이었다.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전쟁 후 60년이 넘는 동안 급격하게 성장을 해 왔고,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죠. 일본처럼 헤게모니를 장악한 대기업 위주의 구조는 변함이 없을 거고, 풍부한 중산층이 탄탄하게 경제를 받쳐 줄 테니까요.”
유진은 그다지 부담 없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요.”
한 회장은 유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듯 지긋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경제는 무척이나 다이나믹하게 변해 왔죠. 그 와중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세계의 변화에 맞춰 그 어느 나라 경제인들보다 빠르게 변해 왔고요. 한때는 한국의 경제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여 왔던 것도 사실이고요.”
중동 건설 붐으로 시작된 세계 진출에서 한국의 기업들은 놀라운 성과와 발전을 거두었다.
중국이 개방되며 가장 빠르게 움직인 것도 한국의 경제인들이었고,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으로 진출해 바닥에서부터 기반을 쌓아 올린 것도 그때까지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한국인들이었다.
그 원동력은 누가 뭐라 해도 소위 재벌이라 불리는 한 회장 같은 사람들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희생이 바탕에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지금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도전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겁니다. 창업주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3대로 넘어오며 도전보다는 수성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보아야 할 테지요.”
“맞소이다. 지금은 명실공히 지키기 위한 수성의 시간이지요.”
한 회장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친에게 제일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30여 년 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위기와 도전을 강조하며 채근해 온 사람이다.
한 회장에게 경제는 늘 위기 상황이었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제일을 한국을 넘어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올려놓는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그의 두 아들과 두 딸이 경영권을 놓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수많은 경쟁자들과 싸우며 제일을 한국 1위로 올려놓은 한 회장의 눈에는 차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기껏해야 부친이 이루어 놓은 제일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기 어린 질투나 보이는 아이들로만 느껴질 뿐이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대기업을 만들어낸 창업주들은 늘 회사의 명운을 걸고 혼신을 다해 도전해 왔다.
그들에게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3세들에게는 그런 치열한 도전의 경험도, 그래야 할 동인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남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었고, 자라면서 풍족한 생활에 익숙해진 후계자들이 실패하면 끝이라는 절박함을 지니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특히 제일은 더할 겁니다. 이미 한국 제일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2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기도 하고요. 더는 도전할 거리도 없으니, 앞으로는 지키는 일만 남아 있는 거겠죠.”
“최고의 자리라는 것은 사실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은 것인데…….”
“아마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만은 제일이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군요. 한 회장님이 그렇게 튼튼한 구조를 만들어 두셨으니까요.”
“어쩐지 칭찬으로 들리지만은 않는구려.”
한 회장의 말에 유진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대한민국은 제일 공화국이라고.”
“그거야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 아니겠소? 실상을 보자면 대기업이야말로 쉬지 않고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인데.”
그렇게 말하고 있는 회장의 얼굴에는 오히려 자심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외견상으로 한국의 대기업들은 무척이나 독특한 위치에 있다.
정치인들은 심심하면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말하고, 언론은 쉬지 않고 재벌기업의 부도덕을 성토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기업의 불법과 일탈에 대해 한없이 자비로운 사회의 분위기가 있다.
언론은 수십 년 동안 재벌 그룹에 책임을 묻는 것은 대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약화한다는 프레임을 국민들에게 심어 놓았다.
물론 그 언론의 뒤에는 다름 아닌 제일 같은 대기업이 숨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까지 재벌 그룹 사주 일가의 일탈 행위나, 대기업의 부당 행위가 있을 때마다 국민들은 늘 그 사주에 대한 처벌에 반대해 오고 있을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언론의 국민을 향한 가스라이팅이 성공했다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기업인의 불법 행위에 대해 시민들이 이렇게까지 관대한 나라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강 회장은 남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 들었소. 보시기에 한국의 경제가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세계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나 보오.”
“그것까지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쟁력과 노하우라면 그럭저럭 굴러가지 않을까 싶군요.”
“그럭저럭이라.”
한 회장이 잠시 유진의 말을 반추해 보았다.
“어쩐지 뼈가 있는 말로 들리는구려.”
“그렇게 들으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일전자처럼 몇몇 선도 기업들은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겠지만, 다른 기업들은 업계를 선도하기보다 국내시장을 나누어 먹기 위한 경쟁에 안주하게 될 겁니다.”
“음…….”
“실질적으로 21세기 이후 전자와 중공업 분야 외에 한국의 기업들이 세계를 선도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고 하겠지요. 몇몇 IT기업이 국내시장을 독점하며 대기업의 반열에 들었지만, 과거 대기업들과 달리 해외시장에서 경쟁하기보다는 국내시장의 파이를 나누는 것에 그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겠소.”
유진은 대기업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낸 성과를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성과까지 담보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 몇몇 분야를 제외하고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추는 기업은 나오기 어려울 거라는 말이겠구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렇지요.”
“강 회장은 그렇다면 한국의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미국처럼 내부적으로 충분한 시장을 갖고 있으면서 치열한 경쟁을 선호하는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될 것 같습니다.”
“인재들이라……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예전과는 달라. 전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전자나 화공 같은 걸 배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에 헌신했었는데, 요즈음은 전부 의사나 되려고 하더군.”
다른 대기업 회장들이 그러했듯, 한 회장 또한 인재를 포용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 온 장본인이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점점 더 도전하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 제일 그룹이 미래에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하시오?”
처음 한 회장에게서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유진은 그것이 이번 대양 그룹 사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한 회장은 대양 그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제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도 아닌데, 제일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 낸 한 회장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때로는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보다, 외부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이 훨씬 더 정확할 때가 있지요. 특히 강 회장은 기업의 미래 가치를 알아보는 데에는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분이 아니겠소?”
한 회장은 유진을 그저 운이 좋아 큰돈을 벌어들인 젊은 투자자 정도가 아닌,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현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송구스럽군요. 하하. 하지만 솔직히 제일 그룹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일전자라면 명확하게 앞으로 10년 뒤에도 업계를 선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그룹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기업 집단은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꽤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한국의 재벌 그룹 구조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구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명확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강 회장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소?”
한 회장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전 각 기업의 경쟁력과 미래의 시장만을 생각합니다. 역시 그룹 차원에서 볼 땐 투자의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유진은 이제 한 회장의 의도가 조금씩 읽히고 있었다.
한 회장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길어야 5년. 한 회장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의 제일 그룹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이루어 낸 것은 단순히 큰 기업 정도가 아니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불모의 땅에서 부친과 함께 수십 년의 걸쳐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제국이다.
자신의 사후 제국이 오래도록 성세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건국자로서의 당연한 걱정이리라.
하지만 그의 네 자식 중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두 아들 중 하나가 그나마 성과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현 회장이 이루어 놓은 것처럼 큰 그림을 그리고 무모한 도전을 무릅쓸 정도의 과감성은 없었다.
시대가 바뀐 것도 잘 알고 있다. 유진의 말처럼 이제는 수성의 시대이다.
하지만 경영자가 세대를 넘어 세습해서 성공한 경우는 아주 드문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조차 100년이 넘도록 한 가문에서 거대 기업을 세습해 성공시키는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
한 회장은 제일 그룹의 미래에 유진이 어떤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만일 제게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제일전자와 제일자동차에 투자를 하겠습니다. 물론 제일자동차가 앞으로도 올바른 선택을 이어간다는 가정하에 말이지요.”
유진은 한 회장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사실 그건 유진이 그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올바른 선택이라면, 다산자동차에서 대양자동차를 인수하겠다는 의도는 없는 모양이구려?”
이날 처음으로 대양 그룹과 다산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산자동차는 이미 아래에 동아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대양자동차까지 넣는다면 오히려 혼선만 가중될 우려가 있다고 여기는 듯하더군요.”
“그렇다면 다산에서 원하는 것은 무어라 합디까?”
“자동차와 중공업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이더군요.”
“욕심도 참 많군요. 그 친구 원래부터 그랬었지. 허허.”
유진의 대답에 한 회장이 은근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그려 놓은 구도와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에서 대양 그룹의 나머지 계열사를 전부 가져간다면, 다시 제일과 다산 사이에 피 터지는 경쟁이 시작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