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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45화 (145/363)

145화 창업 왕조

“다산에 그걸 전부 인수할 만한 여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소만.”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한 회장이 물었다.

“여력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유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강 회장이 다산그룹의 물주가 되려는 모양이오?”

“그룹 자체에 투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개별 기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투자할 생각이 있습니다.”

“개별 기업이라…… 난 어쩐지 강 회장이 무섭게 느껴지는구려.”

“한국에 어떤 기반도 없는 저를 그렇게 생각하실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산과 제일이 대양 그룹 계열사를 독점한다면, 다른 그룹들에서 틀림없이 반발하고 나올 것이오.”

한 회장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2위인 다산을 제외하고 1위인 제일, 3위인 명성, 4위인 성진, 5위인 삼호가 해체된 대양의 시체를 골고루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럴 경우라면 다산이 불만을 품어도 싸워야 할 상대가 너무 많다.

한 회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브렉시트나 미국 대선 이상으로 한국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유진 같은 금융 투자자들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 또한 명백하다.

한 회장으로서는 유진이 대양 그룹 해체에 이어 재벌 구도 최상위 두 그룹을 나머지 그룹들과 경쟁시키며 이득을 챙기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까 회장님께서 한국 경제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물으셨지요? 그리고 전 지금까지와 같이 흘러간다면 제일전자와 몇 개 기업을 제외하고는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 말씀드렸구요.”

유진의 말에 한 회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20년쯤 전 일본 기업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 그렇게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일본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한국 대기업의 미래가 보이지요.”

“…….”

“하지만 일본의 경제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몇 개 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이 밀접하게 관여하며 국가 경제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지요.”

잠시 끊어진 호흡에도 한 회장은 묵묵히 유진을 바라보았고, 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국도 새로운 경쟁력을 키우려면 일본 못지않게 집중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대략 스무 개 남짓한 대기업들이 문어발처럼 다양한 분야에 전부 진출해서 서로 시장 나누어 먹기에만 연연한다면 세계시장을 선도할 능력이 모자라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강 회장은 제일과 다산이 다른 그룹들을 전부 제치고 독점적으로 각 산업 분야를 지배해야 한다 생각하는 거란 말이오?”

“독점은 아니지요. 어느 시장에서든지 독점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기업에 있어서나 소비자에게 있어서나 말이지요. 전 비슷한 규모의 두 기업이 서로 다른 방향의 전문성을 지니고 경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합니다.”

“제일과 다산이 말이오?”

한 회장이 다짐이라도 하듯 다시 물었다.

“한국에서라면 역시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뿐이지 않겠습니까?”

“흐음…….”

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유진이 꺼낸 말은 천하의 한 회장에게 있어서도 경악스러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 재고를 위해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제일과 다산 두 그룹의 경쟁 체제를 만들겠다는 말은 다른 대기업들을 고사시키거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이다.

“그게 가능할 거라 믿소?”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제일 그룹에 대해서도 충분히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진의 말에 한 회장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다른 사람이 꺼낸 말이라면 재고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한국 제일의 제일 그룹이라 해도, 한국 경제를 전부 반분하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제일을 여기까지 올려놓은 장본인이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산과 함께라면? 그리고 그에 필요한 자본이 충분하다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재계가 아닌, 정계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유진이 꺼낸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컸기에,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다. 제일과 다산, 그리고 1조 달러가 넘는 자산을 움직일 수 있는 유진의 재력이라면.

이전 해에 한국의 GDP가 1조 5,000억 달러, 그리고 한국 주식 시장의 총 시가 총액이 1조 3,0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유진이 움직일 수 있는 자산만으로 그걸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한 회장은 곧 유진의 말이 그의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진의 말대로 한국 경제를 다산과 반분했을 때의 의미도 생각해 본다.

단순히 재벌 그룹 1위에 오르는 것과 한국 경제를 반으로 나누어 지배하는 것에는 꽤 커다란 간극이 있다.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특히 정치, 사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스웨덴 경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과도 비교되지 않는 영향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도 언론에 미치고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말하자면…… 지금은 농담처럼 제일 공화국이라 불리우는 정도이지만, 그때가 되면 정말로 한국은 제일과 다산 두 그룹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때 가서도 제일과 다산이 그대로 사이좋게 반분하고 있지만은 않겠지. 아마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질 터이고, 언젠가는 한쪽이 왕좌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진짜 싸움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하필이면…….’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 하필 자신의 생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지금에야 이런 기회가 오게 된 것일까?

조금만 더 젊었어도 아주 의욕적으로 뛰어들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구려.”

한 회장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인자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욕심이 없었다면 지금에 와서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유진은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지 않았다. 한 회장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유진의 의도대로 대양 그룹을 해체해서 제일과 다산에 나누어 주고, 한국의 재계를 반분할 자금까지 투자한다면, 유진이 그 두 대그룹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할 것이 틀림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진이 두 대기업을 통해 한국 경제를 지배하겠다고 나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의도를 유진은 숨길 생각도 없었고,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한 회장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그 점이다. 제일과 다산이 한국의 경제를 반분한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사람은 바로 강유진 본인이다.

어쩌면 두 그룹은 강유진의 재산을 불려 주기 위해 재주를 부리는 곰의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한다 해도 유진의 제안이 너무나도 달콤한 것은 사실이다.

금융 투자자인 유진이 원하는 것과 재벌 그룹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벌 그룹의 수장으로서, 한 회장이 원하는 것은 영향력이다. 혹은 지배력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를 완벽하게 쥐고 흔들 만한 힘.

어떤 의미에서 재벌 기업의 수장들은 각자만의 왕조를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아래에 수십만, 혹은 수백만에 달하는 종업원을 거느리고 사회 각 분야에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룩한 그 위대한 왕조를 후손에게 물려주어 영화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한 회장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산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대한민국을 완전히 손에 넣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가를 세울 수 있다.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유진은 한 회장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었다. 하지만 그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유진도, 한 회장 자신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는 것은 다산에서 그걸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만일 제일에서 거절한다면, 유진의 지원이 어디로 향할지는 눈에 훤했다.

솔직히 말해 한 회장은 유진의 지원을 받는 다산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다른 기업이었다면 모른다. 하지만 다산의 김 회장은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라이벌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유진의 자금력에, 그가 현 미국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 싸움이다.

제일 그룹에 비해 조금은 뒤처진다고 해도, 여전히 정계와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다산 그룹이 유진과 미국의 대통령을 뒤에 업고 제일과 전면전을 선포한다면…… 그건 재앙에 가깝다.

하지만 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경쟁 아닌 경쟁으로 다른 기업들만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사실은 이 시점에서 한 회장의 고민은 끝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제안의 내용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오히려 쉽사리 승낙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 * *

제일 그룹 한 회장이 뉴욕을 다녀가고 얼마 뒤, 대양 그룹의 지주회사인 대양인터내셔널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대양인터내셔널의 주주총회에서 대양전자, 대양유통, 대양캐미칼 등의 출자를 담당할 신설법인 대양홀딩스를 설립하는 회사분할안을 승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양 그룹은 대양인터내셔널과 대양홀딩스 두 개의 지주회사 체계로 정립되게 되었습니다. 대양인터내셔널의 사장으로는 류 회장의 비서실장이던 오경덕 비서실장이, 그리고 새로 설립되는 대양홀딩스 사장으로는 대양유통 사장인 김인경이 선임되었습니다.”

세간에서는 대양 그룹의 재편에서 회장의 비서실장이 갑자기 선두에 나온 것은 의외의 사건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양인터내셔널의 역할이 대양자동차와 대양중공업 등의 처리를 위한 것임이 명백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홍철중 그 자식은 무얼 한 거야?”

대양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노리던 삼호 그룹 회장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했던 대양인터내셔널의 사장 자리가 엉뚱한 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삼호 그룹에서는 회장의 처조카이며 대양 그룹 회장의 사위인 홍철중이 그걸 맡을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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