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500조 원
“그 여자가 배신을 했답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고! 오경덕이는 또 뭐야? 왜 그 자식이 사장으로 선임된 건데?”
“다산 그룹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대양인터내셔널 대부분의 계열사를 다산으로 넘길 목적인 모양입니다.”
“허! 어처구니가 없구나. 제일은 뭐라던가?”
“대양홀딩스로 넘어간 계열사들만 챙기면 그만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대양을 다산과 제일이 홀랑 집어삼키겠다 이거지?”
“그렇게 협의가 된 모양입니다.”
“미쳤나! 이것들 둘이 나눠 먹겠다는데 다른 기업들은 가만있겠다고 하나? 현 의원은 뭐라고 해?”
삼호 그룹 회장은 최후의 보루인 국회부의장을 떠올렸다.
그는 대양 그룹의 침몰이 예견된 순간부터 알짜 계열사들을 집어삼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 핵심에는 야당의 5선 의원이며 국회부의장인 현 의원이 있었다.
“현 의원한테 전화 넣어 보고, 한 의원한테도 한번 보자고 해 봐.”
한편으로는 여당의 중진인 한 의원도 이번 사태에는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삼호 그룹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이다.
주주총회가 끝난 시간부터 삼호 그룹의 주요 인사들은 다방면의 사람들을 만나며 이번 사태의 해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선 곤란하다는 반응입니다. 위쪽에서도 다산과 제일에게 넘기고 빠르게 정상화시키는 것을 원한답니다.”
삼호 그룹도 재계 6위에까지 오른 만큼 정계나 관계에 적지 않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일과 다산의 그것에는 비할 수 없었다.
“현 의원이 그렇게 말했나?”0
“아무래도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듯합니다.”
재계 3위의 거대 그룹인 대양이 휘청이며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이 된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계열사 임직원 수만 50만 명에 달하는 기업 집단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에도 엄청난 악영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대양 그룹 정상화에 대한 방안을 모색 중이라는 발표를 이어 가고 있었다.
국민들도 국가가 이대로 대양 그룹의 위기를 방치하지 않을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계 1, 2위에 해당하는 제일과 다산이 대양 그룹을 인수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지면, 정계에서도 큰 부담을 덜게 될 것이다.
“언론은? 다산과 제일이 대양을 나누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조를 최대한 이끌어 내야 할 거 아니야? 이대로라면 이 나라 경제가 두 기업에 독점된단 말을 해야 할 거 아닌가?”
“국가 경쟁력을 재고하는 차원에서 제일과 다산이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논조가 훨씬 우세합니다. 아무래도 제일과 다산이 가진 영향력 탓에 우리 쪽 편을 들어 줄 만한 곳이 많지는 않습니다.”
정계뿐 아니라 언론계에도 제일과 다산이 지닌 영향력은 다른 재벌 기업들에 비해 월등했다.
전쟁 이후 70여 년 동안 번갈아 가며 재계를 지배해 온 두 그룹은 어느 분야에서건 다른 재벌들은 범접하지 못할 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그룹들에서는 뭐라 하던가?”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명성과 성진 쪽의 반발이 대단합니다.”
원래는 제일과 함께 명성, 성진, 삼호 그룹이 대양을 나누기로 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제일이 다산과 손을 잡고 다른 그룹들에 등을 돌려 버렸다.
황당하기로야 명성, 성진, 삼호 모두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래. 그럼 한번 해 볼 만하지. 각 그룹에 연락을 넣게. 조만간 한번 만나자고 하지.”
삼호 그룹 회장은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 * *
[그룹 경영진의 비리와 연일 계속되는 악재로 휘청이고 있는 대양 그룹의 향방이 조금씩 진정되어 가고 있습니다. 대양 그룹의 새로운 경영진들과 제일 그룹, 다산 그룹 경영진은 대양 그룹의 계열사들을 최대한 빠르게 정상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오늘 발표된 청사진에 따르면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은 앞으로 3년 동안 모두 100조 원의 자본금을 충당해 부실화된 대양 그룹 계열사에 지원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현재 대양 그룹의 총자산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입니다.]
[한편 해당 자금의 출처로는 미국의 금융 투자가인 강유진 씨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의 소식통에 의하면 강유진 씨가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에 5년 동안 최소 500조 원을 투자하기로 약정했다고 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GDP 1,000조 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액으로, 투자가 현실화되면 국내 GDP가 매년 10% 이상 상장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미 상반기 중으로 50조 원의 자금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고, 올해 안에 모두 100조 원의 투자금이 들어올 예정입니다.]
[한편 500조 원은 지난주 한국 기업의 주가 총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로, 제일과 다산 두 그룹에 해당 금액이 투자되면, 두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 부양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벌써 제일과 다산 두 그룹의 계열사 주가가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 최대의 자산가인 강유진 씨는 개인적인 자산만 7,000억 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운용자산은 2조 달러 이상이라고 합니다. 겨우 3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룩한 업적인데요. 500조 원의 투자금이 결코 공수표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TV에서 특집 뉴스가 방영되고 있던 그 순간. 재계 4위, 5위, 6위인 명성, 성진, 삼호 그룹의 회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강유진이는 또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비서진의 보고에 TV를 켜고 속보를 듣고 난 회장들은 고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500조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아무래도 블러핑 같습니다. 500조가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모여 있던 회장 중 가장 젊은 성진 그룹 윤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500조 원을 5년으로 나누면 매년 100조 원인데, 그 정도야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지. 쯧!”
명성 그룹의 박 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5년 동안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고, 당장 50조 원 정도라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을 거요. 그 녀석 진짜로 그 정도 자금은 갖고 있으니까.”
“50조 원이라면 사실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겠소만, 저렇게 500조니 하는 소리가 나오면 여론을 돌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빌어먹을 놈이 갑자기 왜 끼어드는 거야?”
회장들을 모은 삼호 그룹 회장이 가장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끼어드는 거라고 볼 수야 없지요. 솔직히 그 녀석과 대양 사이의 문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진 그룹 회장이 다시 깐족였다.
“그래서 이대로 두고 보자는 말이오?”
삼호 그룹 회장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이건 저쪽에서 싸우자고 나선 꼴인데.”
명성으로서는 이번 일이야말로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진 꼴이다.
명성은 재계 4위라고는 해도 대양과는 큰 차이가 없었고, 4대 그룹의 하나로서 재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어서 성진과 삼호와는 격에서 꽤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대양을 제일과 다산이 나눠 가진다면 명성과 선두의 두 그룹 사이에는 아주 현격한 격차가 생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4대 그룹으로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제일과 다산만 살아남겠군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이건 담합이나 다름없소. 당장 법정으로 끌고 가야 할 판국이야.”
“소용없을 겁니다.”
가장 젊은 성진 윤 회장이 국면을 그나마 제대로 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 하니 정치권에서건 국민 여론이건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대양이 넘어간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그 강유진이라는 인간이 제일과 다산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겁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부터 알아봐야 손을 써도 쓸 수 있을 겁니다.”
“생각이야 뻔하지. 500조로 운을 띄우고, 제일과 다산의 지분을 챙기면 두 그룹의 주가가 대체 얼마나 오르겠어요? 아마 적어도 몇 년 안으로 톡톡하게 챙길 수 있을 거요.”
“김 회장과 한 회장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가 더 궁금하구려. 대양을 먹겠다고 늑대와 손을 잡은 셈인데, 후일 저자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걸까 모르겠어요.”
제일과 다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는 어느새인가 유진에 대한 성토의 자리로 바뀌었다.
“정말로 500조 원이 들어와도 문제이지. 그런 큰돈이 들어오면 대체 지분을 얼마나 내주어야 한다는 말이야? 다산이든 제일이든 그걸 내주고도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한국의 재벌 기업 총수들은 그룹 전 계열사 발행 주식의 10%도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을 손아귀에 넣고 좌우하고 있다.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 주가 총액이 둘을 합쳐도 500억 달러를 조금 넘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렇게 엄청난 자금이 들어오면 당장에 대주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 * *
“500조 원? 그게 가능한 금액이야? 5년으로 나누어도 매년 100조 원인데. 그 정도면 10대 그룹 시가 총액이라고. 1년에 10대 그룹이 하나씩 늘어난다는 말이잖아?”
“1년에 100조 원이 말이 되는 일이야?”
유진의 투자 계획이 알려지자 당장 들썩이는 것은 재계뿐이 아니었다. 당장 정치권 유력 인사들이 모여 사태 파악에 여념이 없었다.
“가능한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 벌써 이번 달에만 10조 원 이상이 들어왔습니다.”
“100조 원이 정말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국가 경제에 플러스지?”
“당장 올해 GDP가 적어도 15%는 올라갑니다. 증시도 20%가량 상승할 거라 보고 있습니다.”
“지금 뭘 하자는 거야? 이래서야 대통령 실적만 올려 주는 꼴이잖아?”
특히 야당에서 논란이 많았다. 이제 정권도 하반기로 들어서고 있다. 당연히 대통령의 정치권에 대한 장악력은 하락할 때이다.
하지만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이다. 유진이 말한 것처럼 엄청난 액수가 투자된다면, 한국 경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경제의 활황은 대통령의 성과로 직결되고, 다음 선거는 여당에게 유리해진다.
“그런 큰일을 왜 정치권이랑 논의 한번 없이 추진하는 건데? 누구 아는 사람 없어요?”
“강유진이 그 사람이 우리 쪽에 먼저 연락을 주는 일은 좀처럼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떻게든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 없잖아?”
“들리기로는 조만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도 오히려 더 상대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뭐야? 그게 진짜야?”
“네. 미국 대사관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허, 당장 언론에 돌려. 우선 그 이야기부터. 검은 머리 외국인이 한국 경제를 집어삼킨다고.”
“알겠습니다. 우리 쪽 말이 통하는 곳에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