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52화 (152/363)

152화 옐로우 페이퍼

중국에서 온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며칠 뒤, 유진은 다시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마티아스 도프너입니다.”

“먼 곳까지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이틀 전 뉴욕 방문을 알려온 독일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사업가인 도프너의 요청에, 유진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 번쯤 만나 볼 생각이었기에 흔쾌히 자택으로 사용하는 플라자 호텔 펜트하우스로 그를 초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좋은 친구라고 하시던데, 요즘에는 트럼프 타워에는 안 가시는 모양이지요?”

도프너가 웃으며 물어 왔다.

“아무래도 요즘은 살 만한 곳이 못 되어서 말이지요. 내 집에 들어가는 데에도 신원 확인을 해야 하니 귀찮기 짝이 없어요.”

“그렇기는 하겠군요. 그런데 도널드한테 요즘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글쎄요?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신 게 있으신가요?”

“유럽 사람들에 대해 골이 나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그런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뭔가 트럼프가 프랑스 선거에 관련해서 극우주의자인 마리 르펜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굳이 이 남자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도프너가 바로 그 악명높은 빌트 지의 발행사인 악셀 스프링거의 CEO이며 일간지인 더 벨트의 전 편집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누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벨트나 빌트에 기사로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 빌트가 해 왔던 만행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기사가 오르는 것도 각오해야 했다.

“유진은 이번 프랑스 대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언론인 출신이기 때문인지, 도프너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어 왔다.

“아주 뜻밖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오! 역시 유진은 다른 사람들과 늘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역시 르펜의 승리가 확실한 모양이에요?”

“글쎄요? 누가 승리자가 될지는 그날 결과를 봐야 알겠지요. 하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건 틀림없이 프랑스 국민들의 승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유진은 능글능글하게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유럽은 급격하게 극우로 빠질 가능성이 있어서, 이 시점에서는 세계의 관심이 온통 프랑스 대선에 쏠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 번이나 정확한 예측으로 진가를 보여 온 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는 어떠한 파급력을 가질지 알 수 없다.

굳이 도프너가 아니더라도, 유진은 자신의 의견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프너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유진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유진은 노련하게 말을 돌려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대답해 주길 바랍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도프너는 조금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유진은 악셀 스프링거 SE의 주식을 매수하고 있는 겁니까?”

이 한 가지 질문을 위해, 세계 유수의 언론 기업 총수가 대서양을 건너 찾아왔다.

“악셀 스프링거 SE는 아주 매력적인 출판 기업이지요. 다양한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독일에서 가장 멋진 투자 대상으로 보였거든요.”

여전히 능글거리며 유진이 대답했다. 이미 그가 찾아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주제라면 몰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진심으로 유진은 악셀 스프링거 SE가 독일에서 가장 매력적인 기업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셀 스프링거 SE는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인 빌트(Bild)를 발간하고 있는 기업이다.

한편 빌트지는 영국의 더 선과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한다.

더 선과 함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빌트는 정론지라기보다는 황당한 기사나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무기명의 소스를 통해 마음대로 내놓는 황색 언론,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찌라시의 대표적인 매체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와 벌거벗은 여자 사진을 가장 큰 무기로 하는 빌트지는 독일에서만 무려 1,200만 명에 달하는 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황색 언론이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독일 정치계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악셀 슈프링어에 의해 창간된 빌트지는 선정적인 기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정치적으로는 반공, 친미, 보수적인 논조를 펼쳐 왔다.

주로 저학력, 저소득층이 즐겨보는 이 황색신문은 한편으로 정치적인 기사 또한 거침없이 실어 보수 정권에 큰 도움을 주어 왔다.

“투자의 대상으로 보기에는 출판 언론이 황혼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다른 신문이라면 몰라도 빌트는 아니지요.”

인터넷의 시대가 왔어도, 전통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의 여론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그리고 빌트나 영국의 더 선처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실는 매체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SNS에서 다양한 가짜 뉴스와 편향적인 목소리가 판을 친다 해도, 오랜 기간 헛소리로 거대한 비즈니스를 이어 온 빌트와 더 선을 넘어설 수는 없다.

‘멕시코의 농부가 외계인 아기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 따위의 정론지라면 절대 싣지 않을 기사들을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발행하는 곳이 바로 빌트지이다.

말하자면 헛소리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급격하게 선정적으로 되어 간다는 한국의 언론들은 이런 유럽의 황색 언론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점잖기 그지없을 정도이다.

“유진이 지금까지 투자한 기업들은 짧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보여 온 기업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악셀 스프링거가 그런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보는데요?”

도프너는 순순히 유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빌트지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겁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판매 부수가 줄어든다거나 독자가 줄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경영상의 활로만 찾는다면 과거보다도 오히려 더 큰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투자 목적이라는 말이지요?”

“물론이죠. 당연히 투자가 목적이지요. 하지만 단순히라는 수식이 붙을 이유는 없겠군요.”

“투자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지난 1년 동안 유진은 악셀 스프링거의 주식을 천천히 모아 왔고, 도프너가 방문한 지금은 벌써 43%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악셀 스프링거 SE의 창업자인 악셀 스프링거의 미망인인 스프링커 부인이 보유하고 있는 42.6%와 도프너가 가진 2.8%의 지분에 거의 필적하는 양이다.

악셀 스프링거 SE의 사주로서 유진의 매수가 충분히 우려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꽤 많은 지분이기는 하죠. 내가 가진 지분과 스프링거 부인의 지분을 합치면 90%에 가깝군요. 공개 매수를 통해 악셀 스프링거 SE를 비공개 회사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유진은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밝혔다. 어차피 언제고 상대와 협상의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결국은 단순한 투자라기보다 매수에 가까운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거로군요.”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친다면, 악셀 스프링거 SE의 모든 간행물들이 더는 주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대신 당신의 눈치를 보아야 할 테지요.”

“딱히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걸로 어떤 이득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당신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군요.”

“이렇게 생각해 봐요. 내가 빌트지에 100억 달러 정도를 더 투자해서 빌트지를 프랑스에서 제일 유력한 신문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지요.”

“호오! 그건 내가 요즘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도프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악셀 스프링거 SE는 독일에서 가장 큰 미디어 그룹이지만, 시가 총액은 그다지 대단한 규모는 아니다.

유진이 매수한 지분의 가격으로 환산하면 시가 총액이 겨우 60억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이다.

여기에 유진이 100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도프너가 원하는 만큼의 사업을 마음껏 벌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진이 제안했던 프랑스에서 빌트지를 유력 신문으로 만든다는 말에 도프너는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앙숙으로 지내왔다는 사실도 있겠지만, 프랑스가 유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황색 언론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언론에선 독일의 빌트지나 영국의 더 선, 데일리 메일 같은 선정적인 기사를 싣는 언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좌파를 대표하는 르 몽드이던, 우파를 대표하는 피가로이건 정론지 위주이다.

중요한 선거의 시기에서도 자극적인 기사를 찾기 어려우며, 심지어 신문에 만화도 싣지 않을 정도로 경건함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프랑스에서의 빌트지는 꽤 구미가 당기는군요.”

유진의 말에 도프너는 사실상 반색을 한다. 유진이 약속한 100억 달러라면, 그 고리타분한 프랑스인들에게 황색 언론의 제맛을 보여 주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겠어요.”

도프너는 수십 년 동안 유력 신문사를 이끌어온 언론인인 만큼,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던져졌다고 해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 정도로 욕심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았다.

“언론사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영향력이지요.”

“그렇군요. 영향력이로군요.”

유진의 솔직한 대답에 도프너는 오히려 납득해 버렸다.

그렇다. 각국의 신문사들은 회사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각 사회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어느 언론사도 단순하게 사회 구성원들의 여론을 기계적으로 싣는 곳은 없다.

어느 신문사이든 내부 구성원들의 사고와 철학을 지면을 통해 외부에 투사하는 것이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그리고 더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신문사일수록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우리가 가진 영향력은 독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내가 투자하는 모든 자금은 전부 독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될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설마 외국인의 투자라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유진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원래라면 빌트지는 앞으로 3년 뒤쯤 미국의 사모펀드인 KKR에 의해 인수될 운명이다.

미리 손을 써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다.

창업주인 악셀 스프링거가 사망하고 20여 년, 그리고 미망인인 스프링거 부인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싶어 할 시기다.

“스프링거 부인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저도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유진이 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사업을 같이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도프너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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