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53화 (153/363)

153화 대격변의 예고

“강유진이 한국 경제계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겠다는 오만한 발상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돈을 좀 벌었다고 이런 식으로 한국 재계의 수많은 선배들을 무시하는 것을 좌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유진이 한국에 투자하기로 한 5,000억 달러의 대부분이 한국 제일의 기업집단인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에 투입된다는 사실은 제일과 다산을 제외한 다른 재벌 기업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일, 다산, 대양과 명성까지 네 재벌 그룹의 경제 집중도가 과한 면이 있었다.

여기서 대양 그룹이 붕괴하고 제일과 다산에 인수될 것이 가시화되며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5,000억 달러의 투자 유치는 그렇지 않아도 끓고 있는 기름에 물을 쏟아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다른 재벌 그룹의 반발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특히 당장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명성, 성진, 삼호 세 그룹을 중심으로 재계의 인사들이 연일 모여 유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 5,0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대양 그룹을 제일과 다산 두 그룹이 나누어 먹은 거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사태로 국가 경제의 쏠림 현상이 더욱 커질 겁니다.”

“양당의 의원님들도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를 그렇게 쉽게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여당과 야당의 중요 인사들에 대한 로비도 이어지고 있었다.

대양 그룹 해체 문제는 단순히 재계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경제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중대한 사건이었다.

하물며 IMF라는 격변기에서도 재계 순위 10위 권 내의 상위 그룹이 해체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3위에 해당하는 대양 그룹이 해체되어 1, 2위 그룹에 분할 합병된다면 한국 경제계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는 경제에 문외한이라도 능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한국 경제가 제일과 다산 두 재벌 기업에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두 그룹이 대양 계열사를 합병하는 문제를 허락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권 내에서도 찬반이 오가고 있었다.

주로 제일과 다산 두 기업의 스폰을 받지 않던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대양 그룹 계열사의 합병 문제에 대해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 대양 그룹 계열사를 이렇게 합병시키면 한국에 제일과 다산 두 공룡 재벌만 남겨 두자는 말밖에는 안 됩니다. 이래서야 국민 경제가 얼마나 힘들어질지 가늠도 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독점은 철저하게 막고 있습니다.”

단순히 소장파 의원들뿐 아니라 명성 그룹을 비롯한 그룹들의 지원을 받은 의원들도 제법 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립니다. 한국 경제가 발전을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해요. 사실 제일과 다산 두 그룹이 해외에 반도체를 팔고 자동차를 팔아 얻는 이익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다른 재벌 그룹들은 거의 내수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아요? 이래서는 미래가 암울합니다. 국가 경쟁력 재고 차원에서 제일과 다산 두 그룹으로 힘을 집중해 해외 기업들과 싸울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다산과 제일만 남기고 전부 고사시키자는 말입니까? 그럼 이 나라가 제일민국, 다산민국이 되는 거 아니에요?”

제일과 다산을 제외한 다른 그룹에서 총력을 기울이는 만큼, 정치권의 여론도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비슷한 논쟁은 각 방송사와 신문 지면에서도 쉬지 않고 거론되고 있었다.

종편 프로그램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토론이 열려 다양한 패널들이 참여해 이 문제에 대해 난상 토론을 펼쳤다.

과연 이제 미국인이 되어 버린 강유진이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냐부터, 제일과 다산으로 양분화되어 버리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되겠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시나리오를 거론하며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청와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주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다산 그룹 창업주의 고택에서는 아침마다 덩치 좋은 사내들이 식탁에 모여앉아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대로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다산 회장 집안의 첫째인 다산자동차 사장이 조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진의 제안에 따라 한국 경제 분할안에 찬성해 반세기 만에 제일 그룹과 손을 잡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런 거창한 일에는 다소의 부침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 않아요? 자기들 목에 목줄을 매겠다는데 알아서 하십쇼, 할 건 아니지 않겠어요? 흐!”

다산 그룹 회장의 차남이며 다산전자를 맡고 있는 김수호 사장이 입가에 걸린 미소를 감추지 않고 형의 말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재벌 기업들을 자극하며 일을 추진하는 것에는 저도 상당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삼남인 김철호는 김수호와 달리 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재계는 개별 기업 간의 경쟁에서는 서로 견제도 하고 치열하게 싸워오기도 했지만, 큰 축에서는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아 왔지 않습니까? 그 덕에 지금처럼 안정적인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고요. 한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런 생태계를 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놓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재계가 분열하고 말 겁니다.”

김철호가 한참을 우려의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분열하는 게 당연하지. 재계가 모두 한 목소리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우스운 일이야. 재계란 무슨 친목 모임 따위가 아니라 서로의 목줄을 노리고 진검 결투를 벌이는 투기장이어야 한단 말이야. 지금까지가 오히려 이상했던 거지.”

김수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맞는 말이야. 솔직히 말해 이번 기회를 놓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강유진 그 친구가 내놓는다고 하는 500조 원과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우리와 제일이 한국 경제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그건…….”

“강유진이 트럼프 가문과 둘도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다들 알고 있지? 한국 정치권에서 감히 미국 대통령의 비위를 건드릴 만큼 겁대가리 없는 정치인 따위가 있을 것 같아? 지금이 유일한 기회야. 트럼프가 대통령에서 물러나면 강유진 그 친구도 지금 같은 기세를 내지는 못할 거야.”

처음엔 우려의 말을 꺼내놓았던 장남도 이야기가 깊어지자 김수호의 말에 힘을 실었다.

“500조 원 중 우리 쪽에 절반, 제일에 절반을 지원하기로 했으니, 그 돈이면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해 볼 수 있겠지. 더군다나 그 친구 말대로라면 앞으로 5년 동안은 반도체 가격도 쏠쏠하다고 하더군.”

“형님은 그 친구를 몇 번 만나시고는 그 친구가 하는 말이라면 아주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으시겠습니다.”

김철호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김수호에게 말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 친구가 크게 한 번 실패할 때까지는 그 친구가 하는 말은 우선 믿어 보기로 했어. 사업에서는 대세를 따르는 것도 중요하니 말이야.”

“맞는 말이야. 적어도 이 몇 년 동안은 그 친구가 대세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거다.”

차남과 장남 모두 유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도 결국은 강유진 그 친구가 우리 다산의 2대 주주가 된다는 위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일이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사실상 그 친구가 언제라도 우리를 뛰어넘어 다산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김철호의 가장 큰 걱정은 그것이었다.

제일과 함께 한국의 재계를 양분하고 난 뒤에도 실질적으로 유진이 다산을 좌지우지할 것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했다.

“한국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어디 지분만으로 되는 줄 알아? 택도 없는 일이지.”

김수호는 아까와 비슷한 묘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말했다.

“지분보다 회사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이나 정계, 그리고 관계와 사법계에 가진 영향력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상대는 그 강유진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뒤에 달고 있다고요.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미국 대통령도 겨우 4년이야. 그리고 4년 뒤에 한국 경제가 완전하게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확신도 없고.”

김수호는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시작부터 워싱턴의 기존 정치인들과 부딪치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럽을 비롯한 각국 정치인들과도 결코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불가사의한 인기로 정권을 획득한 아마추어 정권이 다시 선거에 승리할 가능성은 이미 정권 초기부터 한없이 낮아 보일 뿐이다.

“미 통령을 뒤에 업지 않아도 그가 가진 자금은 진짜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걸 잘 이용해 주면 되지. 미 대통령을 뒤에 업지 않은 강유진은 그저 돈을 많이 투자한 외국인에 불과할 뿐이고 말이야. 흐흐흐.”

제도 다산도 한국의 정관언론에 내린 뿌리 깊은 영향력에 대해서는 자신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치트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제일이나 다산 그룹 사주 일가에게서 경영권을 빼앗아가는 일은 어림도 없다 자신했다.

* * *

“우선 내년에는 명성 그룹과 일전을 치르게 될 터이니 만반의 준비를 하거라.”

제일 그룹에서는 다산에서와 같은 격렬한 논의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산 그룹의 김 회장이 자식들에게 사태에 대해 각자 주도권을 쥐고 일을 펼쳐가도록 자율권을 내어 준 데에 비해, 제일 그룹은 여전히 한 회장 독주 체제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 아들과 두 딸은 각자 그룹의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었지만, 한 회장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간 관리직에 가까웠다.

“올 한 해 지금까지 없었던 투자를 집행해 내년에는 명성전자의 가전 부분을 두 배 이상의 격차로 누를 수 있도록 임원들에게 명심시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회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장남 한정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주 뿌듯한 표정이 서려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일 그룹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계의 지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거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있을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장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한정훈 자신이 아니던가? 이젠 더 이상 후계 논의는 필요 없을 터이다.

강유진을 끌어들인 사람도 그 자신이고, 강유진과 가장 친분이 있는 사람도 자신이다. 후계 경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KF엔터도 내년에는 삼호시네마를 확실하게 끝장내도록 할 수 있겠지?”

한 회장이 이번에는 둘째 딸을 보며 물었다.

“네.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강 회장님께서 배급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우리가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삼호시네마가 크게 흔들리고 있어요.”

제일 그룹에서 가장 처음 강유진에게 접근했던 사람은 KF엔터 대표이사인 한정아였다.

그러니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녀 또한 자신의 공을 주장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녀 또한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이날의 회의에 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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