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나비효과
플라자 호텔의 연회에서 유진은 수많은 사람과 만나며 인맥을 넓혀 나갔다.
매번의 연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롭게 찾아와 유진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유진이 구축하고 있는 부의 이너서클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예전과 달리 이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진의 이름값과 연회의 무게감이 높아짐에 따라 경호 차원에서라도 초대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고, 애초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부터 철저하게 신원을 파악하고 나서야 초대장을 발송하기에 이제는 누구나 쉽게 참석할 수 있는 가벼운 사교 파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유진은 이제 그다지 영향력 따윈 찾기 어려운 젊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조금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날의 연회에서도 드넓은 연회장을 메우고 있는 저명한 인사들 가운데는 2, 30대의 젊은 사람조차도 각자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뿐이었다.
한동안 장시웨이와 아서 델비안을 비롯한 사람들과 친분을 다지던 유진은 자리를 옮겨 파티장의 한쪽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쌍의 젊은 남녀 곁으로 다가갔다.
“어떠신가요? 파티는 즐거우신가요, 알렉세이?”
“물론이죠. 그 유명한 유진의 파티에 참석한 일은 아마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이제 막 서른을 넘어서는 알렉세이 표도르프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어 유진에게 악수를 청해 오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금칠을 해 주실 것까지야. 파티를 즐기신다니 다행이로군요.”
“진심입니다. 여기 참석한 덕분에 이 멋진 여자분과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죠. 이쪽은 사라 그린입니다.”
“반갑습니다. 사라 그린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유진과 인사라도 한번 나누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알렉스 덕분에 드디어 인사할 수 있겠네요.”
알렉세이의 소개를 받은 사라라는 여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사해 왔다.
“반갑습니다. 국무부에서 일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와우! 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다고요?”
그녀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이 연회에 참석하시는 손님들께 보내는 초대장은 전부 날 거치거든요. 거기서 사라 양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라가 이날의 연회에 나타나게 될 것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었던 일이다.
유진은 단순히 국무부에서 일하고 있는 정도의 인사까지 챙길 만큼이나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 때문에 유진은 조금 전 사라 그린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의 젊은 모습에서 20년쯤 뒤의 그녀를 떠올리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렉세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두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호감의 눈빛이 워낙 눈에 띄었기에, 이 연회가 끝나면 무언가 일이라도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보통이었다면 젊고 아름다운 남녀 사이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을 테지만, 미래에 이 나라를 이끌지도 모를 여자인 사라 그린에 대한 일이라면 조금 달랐다.
특히 그 상대가 러시아 짜르의 숨겨진 비자금을 관리하는 아주 수상쩍은 남자라면 말이다.
알렉세이 표도르프는 러시아 대통령의 숨겨진 자산을 관리하는 어떤 기업의 뉴욕 출장소 대표이다.
그리고 러시아 대통령의 수많은 측근들처럼 이런저런 수상한 경력을 잔뜩 지니고 있었다.
“알렉세이. 그때 말했던 사업에 대해 잠깐 생각이 났는데 말이지요.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유진은 사라 그린이 이날의 연회에 참여한 것이, 그리고 알렉세이라는 위험한 남자를 만나게 된 사실이 마땅치 않았다.
어쩌면 자신 때문에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삶에서도 사라 그린이 알렉세이와 사귀었던 것인지, 아니면 유진의 연회 때문에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두 사람 사이에 일이 진전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오! 그렇다면 투자가 가능하겠습니까?”
유진의 말에 알렉세이가 사라 그린에게서 몸을 돌리며 다급하게 물어 왔다.
아무래도 사라 그린에 대한 관심보다 유진의 제안 쪽이 훨씬 더 중요한 모양이다.
유진이 걸음을 옮기자, 알렉세이는 사라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알렉세이의 태도에 사라 그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어쩐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 같은 표정을 보니 유진의 가벼운 계획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한 듯했다.
불편한 얼굴로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는 사라 그린 곁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연회는 마음에 드시나요? 반가워요. 모니카예요.”
“멋진 연회에요. 나하고는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함께 즐겨 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우리 보스가 상대를 빼앗아 갔군요.”
모니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된 거 같네요.”
“보스가 사과의 뜻으로 내일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한테요?”
사라 그린이 무척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네. 함께 메트로폴리탄이라도 가 보시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메트로폴리탄이라면 물론 나도 좋아하는 곳이기는 한데…… 이건 데이트 신청인가요? 그렇다면 왜 직접 하지 않고?”
“글쎄요? 우리 보스가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서요. 어쩌면 너무 샤이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모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샤이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던데요?”
“직접 만나서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궁금하기는 하네요.”
사라 그린은 조금 전 알렉세이 표도로프에게 받은 상처를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다음날, 유진은 약속 장소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그가 잠시 시계를 보고 있는데, 사라 그린이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한다.
유진은 사라 그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정말 큰 박물관이로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지금까지 적지 않게 와 봤지만, 아직도 전부 다 보지 못한 거 같아요.”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뉴욕에는 그에 걸맞게 문화를 즐길 만한 시설도 잔뜩 있다.
유진의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센트럴파크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뮤지컬 극장들과 다양한 박물관,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미술관도 열 개가 넘어선다.
그중 센트럴파크의 북동쪽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유진도 종종 산책 삼아 들르고는 하는 곳이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며 뉴욕 최고의 박물관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명성에 걸맞게 중세 성당을 통째로 뜯어다 놓는다거나, 이집트 신전을 통째로 가져다 전시하는 따위의 넋 나간 스케일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주 방문하신다면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라도 있나요?”
유진은 사라 그린이 이곳에 전시된 그림 중 특별한 화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봤다.
“관심 있으시면 함께 가 보시겠어요?”
사라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확실하게 사라 그린은 지난 삶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여자가 맞다. 물론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은 유진이라는 남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열심히 미국의 국무부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고 있는 사라 그린은, 젊은 나이에 백악관에 스카우트되어 국무부 장관을 거쳐 마침내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대로 유진이 알고 있는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까지 이제 겨우 십몇 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과 이 시점에서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은 유진으로서는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선택이다.
물론 지금도 유진은 이미 세상의 수많은 일들에 관여하고 있고, 또 앞으로는 더욱 크게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 10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유진 자신도 자신할 수 없기에, 사라 그린이 반드시 미국의 대통령이 되리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미래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아주 대단한 인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유진은 그녀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유진이 해야 할 일은 잔뜩 있었고, 그 많은 일들을 문제없이 추진해 나가려면 거기에 걸맞는 인재가 필요했으니까.
유진에게 돈을 버는 것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돈만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세계 제일의 부자 소리를 듣는 미국 부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나 통용되는 수준에 불과할 따름이다.
진정한 권력은 돈에서 나오지 않는다.
IT업계의 수많은 슈퍼 부자들이 워싱턴에서 로비로 적지 않은 돈을 사용하지만, 그걸로 얻어 내는 것은 겨우 자기 회사가 손해를 조금 덜 볼 수 있게 하는 정도에 그친다.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부를 쌓는 것 이상으로 인연과 인연을 맺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라 그린은 유진이 포섭해야 할 인물 중 최상위에 놓여 있었다.
“루벤스라고 했죠? 어떤 그림이에요?”
유진과 사라 그린은 마침내 사라가 보기 원하는 그림 앞에 도착했다.
“아레스로부터 에이레네를 보호하는 아테나라는 작품이에요.”
사라 그린은 꽤 긴 이름을 가진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쪽에 있는 지혜의 신 아테나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복수의 여신 알렉토로부터 평화를 상징하는 에이레스를 보호하고 있어요.”
그림에는 열 명도 넘는 등장인물이 있었다.
사라 그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유진은 대체 무슨 그림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7세기 유럽은 온통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였지요. 종교 때문에, 그리고 영토 때문에 여기저기 쉴 새 없이 전쟁이 일어났어요. 루벤스의 고향인 네덜란드 또한 수십 년 동안의 전쟁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고요.”
사라 그린은 그 그림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지, 작품 설명부터 시작해 작가의 배경까지 긴 설명을 지치거나 귀찮은 기색 없이 열정적으로 이어 갔다.
“루벤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자라났어요. 독일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확실하게 네덜란드 사람이라 할 수 있었지요. 그는 네덜란드를 사랑했지만, 당대 유럽 왕실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던 루벤스는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실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어요.”
“외교관이요?”
“당대 제일의 화가이던 루벤스는 동시에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어요. 어느 왕실에서도 위대한 화가 루벤스를 환영했으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멋진 그림을 그려 주고 왕실 사이의 이익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에 적합했던 거지요.”
유진은 적절히 맞장구를 쳐 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