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56화 (156/363)

156화 외교관과 정치인

“루벤스가 외교관이었다는 건 몰랐네요.”

유진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가로서의 루벤스는 익히 알려졌지만, 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이 그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사라 그린이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 후엔 그녀에게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이 그림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물론 유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그녀와 함께 이 메트로폴리탄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네. 루벤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봉사하면서도 왕가로부터 독립하려는 네덜란드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와 네덜란드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전쟁은 루벤스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지요. 전 이 그림에 루벤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인류의 지혜로 전쟁과 복수로부터 평화를 지키기를 바라는 거지요.”

“많은 지성들이 비슷한 것을 원해 왔었지요.”

“맞아요. 인류의 지성이 더 이상의 폭력을 멈출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루벤스가 그리던 꿈이 자신이 원하는 세상과 비슷했기에 사라 그린은 루벤스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외교를 단순하게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외교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라 그린은 후자에 속했다.

정치계에 입문하기 전 그녀는 자신의 삶을 외교관으로서 세상의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 바치려 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1차 걸프전에 참전했던 군인인 사라 그린의 부친은 그 후로도 계속 군에 복무해, 2차 걸프전은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에도 파병되어 근무하다가 탈레반의 테러에 희생되었다.

그녀의 모친은 구 유고슬라비아 사람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던 당시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 중 양친을 잃고 당시 파병을 나간 평화유지군에 구조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사라의 양친 모두 전쟁을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물론 부친은 전쟁을 수행하던 사람이었고, 모친은 전쟁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은 사람으로 차이는 컸지만, 두 사람 모두 전쟁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라 그린은 어려서부터 전쟁의 기억 때문에 종종 악몽에 시달리는 모친과 전쟁터에서의 충격을 떨치지 못해 때때로 폭력적으로 변해 버리곤 하는 부친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주 여러 의미에서 사라 그린은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참혹하기만 한 전쟁을 지구상에서 잠시라도 종식시키는 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상이 오랜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의 많은 전쟁에 관여해 온 미국의 상황에 질려 있던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게 된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상주의에만 빠져 단순히 전쟁이 절대악이라는 주장만을 고수하는 고리타분한 여자는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만큼 충분한 이성을 보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인류에게서 전쟁의 원인을 전부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했다.

나폴레옹의 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고 나서 100년 동안 적어도 유럽 내에서는 전쟁이 없는 시대를 마련하게 되는 기틀이 된 빈 체제를 완성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처럼, 그녀는 정치적, 경제적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최소한 수십 년 동안 만큼이라도 지구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 보자고 주장하게 된다.

총명한 사람이 평생을 걸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쪽으로든 결실이 있기 마련이다.

사라 그린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로 미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를 책임지게 되었고, 각국 정부를 상대로 미국의 이익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의 노력은 꽤 성과가 있어서, 그녀가 리더를 맡았을 때의 미국은 가장 이상적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어느 정도 완수할 수 있게 된다.

슬프게도 그건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지속되지 않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의 의견을 조율했던 그린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국무부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가요?”

유진은 아주 평범한 질문을 던져 본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국무부라면 어렵겠지요.”

사라 그린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한국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미국 국무부는 6명의 차관과 30명의 차관보, 그리고 무려 7만 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매머드급 부서이다.

주로 하는 일은 다른 나라의 외교부와 비슷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행정부 내 각 부처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 또한 맡고 있어서, 행정부 내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커다란 권한과 막대한 재정을 사용하는 기관이며, 미국에서는 대통령 다음으로 커다란 힘을 지닌 기관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세계에서 미국 대통령 다음으로 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은 중국 주석이나 러시아 대통령이 아닌 미국의 국무부 장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부의 위상은 애매해져 버렸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정계와 워싱턴의 행정부에 대해 큰 반감을 지닌 사람이다.

실질적으로 그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지지해 준 유권자들은 미국의 정계와 행정부에 대해 그렇게 여기고 있다.

때문인지 트럼프는 전통적으로 외교의 권한을 국무부에 넘겨줘 왔던 여느 대통령들과 달리 국무부가 아닌 자신의 보좌관들을 통해 외교를 진행하길 원했다.

심지어 두 자리의 부장관 중 한 명을 지금까지도 임명하지 않을 정도이다.

대통령이 국무부를 홀대하고 있으니, 당연히 국무부의 위상 또한 추락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 내내 국무부는 대통령의 외교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평을 받게 된다.

유진의 질문에 사라 그린이 그렇게 불편한 표정을 지은 것은 국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진이 바로 그 트럼프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그녀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진은 더 이상 그녀에게 그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그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참, 어젯밤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알렉세이 말이로군요.”

사라는 유진이 하려는 말을 금세 알아차렸다.

“알렉세이 표도르프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이지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는데 방해를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었어요.”

키가 2미터가 조금 안 되고, 멋진 금발의 미남에 부유한 티가 잔뜩 흐르는 사내이다.

유진은 솔직히 그녀가 어제 그 남자에게 빠졌던 것이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죠. 그리고 러시아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위험한 남자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사라 그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유진은 매우 놀라고 말았다. 이 여자는 그가 걱정했던 것을 이미 전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어제저녁의 일은 고의적이었던 모양이네요. 내가 그 남자와 연관되는 것이 걱정되셨던 모양이로군요?”

사라 그린이 웃으며 물었다.

“괜한 짓이었던 모양이군요.”

유진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사라 그린의 태도는 아마도 위장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젊고 멋진 남자와 여자의 만남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뇨. 오히려 감사드릴게요. 적어도 저한테 신경을 써 주신 거잖아요? 전 언제나 결과보다는 의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나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보다, 선한 의도가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것이 좋다는 거군요?”

“맞아요. 모든 결과가 항상 원하는 것처럼 흘러가는 일은 드무니까요. 하지만 항상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좀 더 나은 결과를 바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내 실수를 덮어 주니 고맙군요.”

유진이 감사의 뜻을 표하자 사라 그린은 손을 내저었다.

“실수 아니에요. 그리고 결과가 나쁘지만도 않고요. 어젯밤에 알렉세이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언제 다시 만나자고 하더군요. 유진 씨 때문에 경황도 없이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 했어요. 다음번에는 제가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선한 의도에 좋은 결과가 따른 셈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어떤 일인지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사라 그린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원래 위험하다 싶은 일에는 호기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서요.”

“위험한 건 하나도 없는데요?”

“그런가요?”

“네. 알렉세이와 가까워지려던 것은 그가 러시아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어요.”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말이로군요.”

어쩐지 유진은 이 여자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가 알고 있던 미래의 대통령은 쉽사리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고, 상대가 궁금해하도록 실마리를 남기는 것을 선호했다.

“네. 본질적으로는 그게 원인이 되기는 하겠지요. 알렉세이가 러시아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유진과 그런 친분을 쌓았을 리 없을 테니까요.”

말을 조금 돌려서 상대가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외교관이나 정치인들의 특기이다.

그런 면에서 사라 그린은 무척이나 훌륭한 외교관이며 또 정치인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치인으로서 훌륭한 외교관이 된 경우는 종종 있지만, 외교관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녀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알렉세이에게 다가간 것은 나와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거로군요?”

“맞아요. 어찌어찌해서 유진의 그 유명한 파티에 참석은 하게 되었지만, 유진을 직접 대하기는 쉽지 않았거든요. 너무도 대단한 사람들이 잔뜩 있었고, 모두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아무래도 내 차례는 오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그런데 마침 알렉세이가 눈에 띄더군요. 러시아 짜르의 숨겨진 양아들이며 굉장한 여성 편력으로 이름난 사람이지요.”

사라 그린이 이번에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남자에게 조금 웃어 주면 금세 넘어오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생각처럼 되었고요. 알렉세이와 인연을 만들어 두면 언제고 당신과 만날 기회가 생길 것 같았어요.”

“멋진 계획이었군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렇게나 한 번에 성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대단한 유진이 나처럼 이름 없는 여자를 위해 나서 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냥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봐요.”

유진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그랬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거예요. 알렉세이가 꽤 끈질긴 사람인 거 알고 계신가요?”

“어떤 의미에서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기필코 손에 넣는다고 하더군요. 뭐, 그럴 만한 배경이 충분하잖아요?”

“사라 양은 알렉세이가 남자로서 충분히 매력 있다 생각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매력 있는 남자 맞아요. 하지만 그 매력은 너무 위험해요. 알고 계세요? 알렉세이 표도르프에게 적지 않은 범죄 혐의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요?”

줄곧 밝은 표정이었던 사라 그린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미국에서 말인가요?”

“아뇨. 미국에서는 꽤 자중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러시아에 있을 때는 무척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여자들은 위험한 남자를 선호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어떤 위험이냐에 따라 다르지요. 진짜로 폭력을 사용하는 상대에 대해 판타지를 지닌 여자는 드물다고요.”

사라 그린은 지금까지와 달리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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