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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57화 (157/363)

157화 대통령과 빌런

확실히 그녀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알렉세이 표도르프는 절대로 그녀의 타입이라 할 수 없는 남자이다.

“그런 위험한 남자에게 접근하면서까지 나와 만나고 싶었다는 말이로군요.”

그러니 사라 그린이 그렇게 해서까지 유진과의 만남을 원한 것은 아마도 그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정말로 궁금했으니까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가 말이에요.”

“변화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난 단순히 그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일 뿐인데 말이죠.”

“단순히라고요?”

사라 그린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음…… 조금 복잡하게라고 할까요?”

“아뇨. 당신의 투자 전략 같은 것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뭐라 평가할 수 없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에요.”

“흠, 영향력이라면 확실히 내가 꽤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죠.”

유진은 이제 와 자신이 그다지 영향력 같은 것이 없다거나, 혹은 그걸 어떻게 행사하지 않는다는 말로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가 트럼프 행정부에 이런저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거나,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자산을 불려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무부는 산하에 정보조사국(INR)이라는 정보 조직을 두고 있고, 한편으로는 미국 내 정보 공동체의 핵심 부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아직 젊지만 국무부에서 상당한 고위직에 있는 사라라면 유진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맞아요. 당신의 많은 친구들 말이죠.”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는 달리 무척이나 진지한 눈빛이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는 수많은 거물이 등장해 왔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 사람들과 달리 당신은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을 성취해 내었어요. 우리 생에 다시 한번 볼 수 있을지 모를 거대한 부의 제국이지요.”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D. 록펠러, J. P. 모건…… 그리고 빌 게이츠에서 제프 베이조스까지.

사라 그린은 미국의 현재를 만들어 온 재계의 거물들과 함께 유진을 거론했다.

미국의 근현대사는 사실 이런 위대한 사업가들의 일대기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라 그린의 말처럼 그 누구도 이렇게나 짧은 시간 동안에 부의 제국을 일구어 내지는 못했다.

“진짜 문제는 당신의 제국이 이제 겨우 시작 단계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쁠 뿐이군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다른 거인들과 달리 당신은 다른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지요. 당신이 쌓아 올린 부는 오로지 당신의 명석한 예견으로 얻어 낸 거잖아요? 특정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그 사업 분야의 부침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국가 정책이나 세계 정세에 따라 흥망이 갈리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오롯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지요. 국가 정책이 바뀌는 것이나, 전쟁이나, 흉년이나 상관없이 말이에요.”

사라 그린은 유진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유진에 대해 말했다.

유진은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스스로가 말한 내용이 옳은지 알아보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애플도 중국의 눈치를 보고, 아마존은 국가 경제의 부침에 큰 영향을 받아요. 테슬라는 유럽의 환경 규제 여부에 따라 주가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죠.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사라 그린이 말을 하는 동안 유진은 묵묵히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혹은 그저 대화할 때의 태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유진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확신을 주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마주 보는 걸 택할 뿐이다.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반대로 외부에는 마음껏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미래는 둘 중 하나이겠죠.”

“두 가지뿐인가요?”

“네. 빌런이나 정복자요.”

사라 그린이 다시 한번 확신에 차서 말했다.

“사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오랜만에 미소를 띠었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난 그저 많은 돈을 벌고, 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빌런이나 정복자도 아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어요.”

“한 가지 다른 선택이 있지 않을까요? 은둔자라던지? 많은 거물들이 여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냈으니까요.”

유진이 으쓱해 보았지만, 사라는 확고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신은 아직 아주 많이 젊거든요. 사실 너무 젊지요.”

“이 시대에 젊은 거물이라면 나 말고도 얼마든지 있지요. 마크 저커버그는 젊고 영향력 있고, 또 자신의 이상을 외부에 투사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니 오히려 나보다 당신이 말한 사람에 훨씬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만일 페이스북이 20년쯤 뒤에도 여전히 10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말이지요.”

사라의 말이 맞다. 그때 즈음이면 페이스북은 4, 50대 중년들이 추억을 기념하는 이른바 ‘올디스 벗 구디스’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사라가 원하는 것은 뭔가요?”

“당신이 바꿔 갈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요. 명백하게 당신의 존재로 이 세상은 전과 다른 곳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세상이 과연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이 잘못된 탐욕을 지니고 있다면, 재앙에 가까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린 시절부터 본드를 무척 좋아했었거든요.”

사라의 작은 위트에 유진도 화답해 준다.

“아쉽게도 난 스펙터도 아니고, 그런 걸 꿈꾸지도 않는답니다.”

“스펙터라면 훨씬 덜 위험하겠죠.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 스펙터 이상이에요. 이 나라의 대통령과 친구이며 러시아의 짜르와 중국 주석과 친분 있는 사람이 겨우 범죄 조직 따위와 비교가 되겠어요?”

“러시아 대통령도 중국의 주석도 만나 본 적 없습니다.”

“알렉세이 표도르프나 장시웨이와의 친분이면 충분해요.”

유진은 사라 그린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린 양이 원하는 것은 무언가요?”

“당신이 그리는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래야 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유진은 사라 그린이 미국의 대통령에 닿기까지의 여정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

그녀가 이미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꿈꿔 왔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커다란 청사진을 그려 놓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진의 등장으로 인해 그녀의 계획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음. 난 아주 불안정한 나라에서 왔어요.”

“그렇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전쟁 중인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요.”

유진이 입을 열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심지어 국가의 수도가 전쟁의 최전방에서 한 시간 거리도 안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들은 적군이 포탄을 날리면 떨어지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 전쟁이 이어지는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포탄이 떨어진 적은 없고요. 굉장히 모순적이지요?”

“비슷한 상황인 이스라엘과 너무 다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미 안정되어 있다는 양가적인 심리 상태를 갖고 있어요. 아마도 그런 감정이 내가 이어 가는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에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친구들이 안전할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아마도 내가 영향력을 외부에 행사한다면 그 때문일 거예요.”

한동안 사라 그린은 유진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로군요.”

그녀가 다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당신에게 뭐든 명확한 답변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첫 만남이잖아요?”

“그렇죠. 첫 만남이죠.”

“다음번에도 만날 기회가 생기면, 그리고 조금씩 더 친해질 수 있다면, 알 수 있겠지요. 당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서.”

어쩐지 사라 그린은 유진이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당신에게는 솔직하게 대답을 해 드리지요.”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언제라도 사라 그린 양이 원하면 시간을 내지요.”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당신의 지위나 영향력으로 보면, 나 같은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건 시간 낭비에 가깝지 않나요? 능력 있고, 영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잠깐이라도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여자라면 얼마든지 매력적인 여자들이 당신의 한 마디라면 당장 침실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을 거구요.”

“인연(因緣)이라는 거겠죠. 어쩌다가 우리는 만나게 되었고, 인연이 시작되어 친구가 되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 말이에요.”

아쉽게도 영어로는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기 어려웠다. 유진은 어쩔 수 없이 tie라는 단어를 쓰고, destinity라는 단어도 한 번 언급해야 했다.

“예전에 동양에서 온 한 친구가 비슷한 말을 해 준 적이 있어요. 그때는 카르마라는 거였었죠.”

유진의 설명에 사라 그린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사실 유진으로서도 인연이나 업보같이 흔히 말하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나, 또 스스로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외부인인 사라가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역시 동양의 사상은 어렵네요. 여하튼 운명적으로 친구가 되어간다는 말이라 이해할게요.”

그나마 다행히도 사라 그린은 대충이나마 유진의 말의 숨은 뜻을 이해한 모양이다.

“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군요.”

유진이 손을 내밀자, 그녀도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카르마가 당신을 어디로 이끌지 모르지만, 원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보통의 자리로는 어렵겠어요.”

“그렇겠죠.”

“적어도 이 나라를 이끄는 리더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음…….”

여전히 손을 맞잡은 상태로, 사라는 유진을 조금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미스테리한 사람이에요.”

그리고는 다시 웃는다.

“어쩌면 스펙터가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그새 빌런으로 떨어져 버리나요?”

“그저 미래를 읽을 줄 알고,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도자가 되어 버릴 수는 있지요. 하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읽는다면 단순한 리더 이상의 무언가가 될 거예요.”

유진을 무서운 사람이라 평가하면서도, 사라 그린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어쩐지 무섭지는 않네요. 빌런이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좋은 의도가 세상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요. 어리석은 지도자보다 무서운 일은 없어요. 천혜의 땅 우크라이나를 끔찍한 기근으로 몰아넣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지도자들이나 중국 인민들을 굶주리게 만든 혁명가들의 의도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었죠. 그리고 당신은 절대 그럴 사람은 아닐 것 같아요.”

유진을 보는 사라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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