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우아한 이별
“우울한 얼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10월의 어느 날 아침, 요안나는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유진에게 물어 왔다.
“어. 있어. 무슨 일…….”
유진이 힘없이 대답했다.
“음…… 보자. 비트코인이나 주가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한국에 관련된 일도 아니고…… 참! 어제저녁에 데이트가 있었지요? 에밀리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요안나는 촉이 좋은 여자였다.
“차였어.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네.”
유진은 바로 요안나의 추측을 긍정했다.
“어쩌다가요? 아! 하데스타운 공연으로 캐나다에 간다고 했었죠? 그 때문인 모양이네요?”
“뭐. 그런 거지. 캐나다 다음에는 런던이 될 것 같다는군. 아무래도 앞으로 2, 3년 동안은 계속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 모양이야.”
에밀리가 출연 중인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소규모 공연으로는 아주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제작진은 이제 공연을 메이저에 진출시키기 위해 규모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실력이 일취월장한 에밀리가 극의 여주인공 역할에 서브로 더블캐스팅 된 것이었다.
“단순하게 해외 공연 때문만은 아니겠군요?”
“그렇지. 이런저런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지.”
에밀리는 이번에 주연에 발탁된 것이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남자 친구 때문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제작진에게 주연 역할을 고사하겠다 했지만, 제작진으로서는 지금 역할에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 뒤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에밀리는 유진에게 이별을 고했다.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유진도 선선히 그녀의 이별을 받아들였다.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이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짐을 결심했다. 사실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진은 자신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었던 에밀리가 알지 못하는 그녀를 무척 잘 알고 있었고, 에밀리는 자신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여 주는 유진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서로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한 관계는 반면에 뜨겁게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많이 아끼고 있었지만, 진정한 애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사실 유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을. 지난 삶에서도 그러했듯이.
참 이상한 일이다. 언제고 이별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이별의 순간이 와서는 이미 한 번 겪었던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된다.
아마 이런 기분은 세상에서 오직 유진 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종일 유진은 그렇게 묘한 아픔 속에 허우적거렸다. 아무리 예견하고 있던 아픔이라도 역시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그렇게 잔뜩 찌푸린 얼굴로 사무실을 어슬렁거리지 말아요. 직원들 사기에 나빠요.”
보다 못한 요안나가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남들 다 하는 이별인데 그렇게 티를 내고 있을 거예요?”
“그렇기는 하지…….”
“차라리 나가서 바람을 쐬든, 아니면 쇼핑이라도 하든 하는 게 어때요?”
이번에는 모니카가 권유를 해 온다.
“쇼핑?”
“여자들은 그렇거든요.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에는 쇼핑만 한 것이 없다고요.”
“그렇기도 하겠네.”
하지만 유진은 그다지 물욕이 없는 남자였다. 지금까지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도, 고가의 자동차를 산다거나 비싼 시계를 사는 일은 없었다.
자동차의 구매는 철저하게 안전을 위한 것으로 알아보게 시켰고, 시계를 사는 것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초고가 시계를 대량으로 주문하는 것이 전부이다.
정작 유진이 차고 있는 시계는 건강을 위해 차고 있는 150달러짜리 핏빗 밴드에 불과했다.
“쇼핑이라…… 대체 뭘 사야 하는 거지?”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물건을 다른 사람을 통해 조달해 온 유진에게 모니카의 말처럼 기분 전환을 위해 무언가를 산다는 것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뭐. 보스라면 평범한 걸 사는 걸로 충족이 되기는 어렵겠네요.”
대체 무얼 충족시키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유진은 잠자코 모니카의 말을 경청했다.
“맞다! 요트라도 한 척 사는 건 어때요?”
“응? 그럴까?”
사소한 것에 돈을 쓰는 것은 관심이 없지만, 또 아예 확실하게 비싼 거라면 나름 즐기는 유진이다.
LA에서 당시 세계 최고가라는 저택을 구입하거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플라자 호텔을 사 버리기도 하고, 플로리다에 휴가를 간 김에 저택과 빌딩도 구매했던 그였다.
“비즈니스 젯은 구매했으니, 다음에는 요트 아니겠어요?”
모니카의 말처럼 지금까지 그의 쇼핑 리스트 중 가장 큰돈이 들어간 것은 역시 비즈니스 젯에 들인 돈이다.
미국의 부자라면 모름지기 비행기 한 대쯤은 소유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제일의 부자인 유진도 이미 2년 전에 비행기 한 대를 주문해 놓고 출고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비즈니스 젯이 아닌, 최고의 여객기인 747의 개인형 버전이다.
현존하는 비즈니스 젯 중 가장 고가인 747-8 VIP의 제작 가격은 대략 3억 7,000만 달러에서 시작했고, 여기에 이런저런 옵션을 추가하면 두 배 정도로 올라가는 것도 우스울 정도가 된다.
이 거대한 항공기를 자가용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국가 원수들이기에, 때에 따라서는 10억 달러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올해는 해당 모델을 미국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수십억 달러 수준의 예산을 잡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 경우는 외부에서 알 수 없는 다양한 첨단 보안, 통신 장비 따위를 잔뜩 장착하기 때문이다.
유진의 경우는 미 대통령 수준의 보안 장비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 놓도록 주문해 놓았다.
“지금까지 얼마가 들어갔지?”
최초 주문 이후로 내부 구조 때문에 몇 번의 조정이 있었다. 유진은 모니카가 내놓는 브로셔를 보고 선택만 했을 뿐, 얼마가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최종적으로 8억 9,980만 달러에요.”
모니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천문학적인 가격을 말해 준다.
“9억 달러짜리 비행기라니. F22 두 개 편대 가격이잖아.”
유진이 투덜거렸다.
세계 최고의 스텔스 전투기인 F22도 겨우 1억 5,000만 달러밖에 안 한다.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 가격에 비하면 ‘겨우’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인 것이다.
심지어 가장 은밀한 폭격기인 B-2도 8억 달러 수준이다.
“보스가 결정한 거잖아요. 여하튼 세계에서 제일 비싼 비행기로 하겠다면서.”
“그랬었나?”
사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비행기 내부에 장식되는 호화스러운 인테리어 따위는 유진의 관심사가 아니다. 유진이 원하는 것은 가장 비싼 전용기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러니까 요트도 한 대 사는 게 어때요? 보스 수준의 요트라면 적어도 5억 달러 정도에서 시작하니까요.”
“흐음…… 제일 비싼 요트가 얼마짜리지?”
모니카의 말을 듣고 보니 꽤 혹한다.
“잠시만요.”
모니카가 태블릿을 들고 휙휙 움직이더니 몇 개의 요트를 보여 준다.
태블릿 화면에는 적지 않은 대형 요트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미 작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6억 5,000만 달러짜리 배에요. 여기, 아부다비의 국왕 소유지요. 길이는 180미터이고, 잠수함과 헬리패드도 있어요.”
“180미터? 그게 요트야?”
거의 군함이나 유람선 수준의 배를 요트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중동 부자들의 스케일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큰 배들은 대개 아랍 거부들의 소유에요. 아랍 에미레이트 연방을 구성하는 각 왕실이나, 사우디, 오만 왕실 등에서 보유하고 있지요. 아마도 아랍 각국 왕실 간에 경쟁이라도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아랍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모니카의 추윽이었다.
“그럼 이참에 하나 사지.”
“이번에도 제일 비싼 걸로요?”
“당연하지. 10억을 넘겨 보자고. 길이도 200미터를 넘기도록.”
유진으로서는 요트 한 척을 위해 사용하는 10억 달러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당장 이해에만도 암호화폐 거래로 얻을 수익이 그 수십 배는 될 것이다.
10월로 들어서며 비트코인의 가격은 1만 3,000달러를 넘어섰고, 유진은 보유하고 있던 암호화폐들을 조금씩 매도하기 시작했다.
워낙 과열된 분위기라 유성의 거래소를 통해 꾸준하게 물량을 풀어도 하락은 커녕 오히려 시장에서는 거래량이 늘어났다는 이유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암호화폐 시장에 무슨 시그널이 중요하겠냐만은, 사람들은 그런 아전인수격 신호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모니카와 함께 새로운 요트 구매에 대해 논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니카 말이 맞았네. 확실히 쇼핑이 도움이 되는 거 같네.”
마침내 원하는 사양을 결정짓고 나서 유진이 말했다.
요트를 고르는 동안에는 에밀리와의 두 번째 이별에 대한 아픔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렇죠? 역시 실연의 아픔을 잊는데는 쇼핑이 최고라니까요.”
“당연하지 않아요?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10억 달러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요? 그리고 그 정도 액수를 하루에 벌어들이는 사람이 또 있겠어요?”
요안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하루에 10억 달러를요?”
모니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니까요. 요즘 장이 꽤 좋아요. 특히 넷플릭스하고 애플, 그리고 아마존이 아주 선방하고 있어요. 특히 아마존은 오늘 하루만 11%가 올랐다고요.”
“어? 잠깐만요! 그렇게나 올랐어요? 그럼 우리도 엄청 벌었다는 말이네요?”
유진은 모니카를 비롯한 직원들을 위해 FI 펀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직원들 모두는 이 FI 펀드에 상당한 자산을 투자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유진의 투자 성공을 직접 눈으로 보아온 사람들이니.
“와! 진짜네!”
모니카가 유진의 사무실 한쪽에 걸려있는 모니터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는 FI 펀드의 실적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모니카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은 언제라도 자신이 투자한 펀드의 실적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자산이 불어나는 것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직원 복지는 없을 것이다.
에이미와의 이별은 유진에게 며칠 동안의 아픔을 남겨 주었다.
그걸 보면 아마도 이번 이별은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뮤지컬 공연팀과 함께 캐나다로 떠난 에이미에게선 때때로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말하는 연락이 오고는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사귀고 있던 때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이별이 아주 적절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유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신도요.”
에밀리의 목소리에는 조금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이게 진짜 이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