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19대 대선
가을로 들어서며 한국 정계 인사들에게 오는 연락이 부쩍 늘어났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당은 물론 야당의 주요 인사들까지 전화를 걸어 오고 있었고, 심지어 미국의 한국 대사까지 심심치 않게 연락을 해 오고 있었다.
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의 정계 인사들과 연관되는 일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유진으로서는 그런 연락에 대해 모니카 등을 통해 의례적인 답변을 보내는 것으로 대충 끝내고는 해 왔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국회의원이라도 찾아온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주었지만, 1년 사이 유진의 위상은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겨우 1선이나 2선급 의원들은 유진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적어도 각 당에서 계파를 이끌 정도가 아니라면 가벼운 만남도 가지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때때로 유진으로서도 마냥 홀대하기 어려운 사람의 방문 요청이 오면 환대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그동안 강 회장님께서 국가 경제에 대해 공헌해 오신 것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천만에요. 어디까지나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봤기에 진행하는 일인걸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강 회장님 덕분에 국가 경제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근 10여 년 동안 올해처럼 괄목할 만한 성장세가 나타난 적은 없으니까요.”
“다행이로군요. 비록 지금은 국적을 포기했지만, 한국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니 기쁘네요.”
“참. 국적 문제는 앞으로 1년 안에 다시 회복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원래라면 앞으로도 4년은 더 있어야 특례로 국적 회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유진에게 다시 한국 국적을 주기 위해 일심동체로 노력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는 해당 법안을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에서 새로운 법안을 내놓거나, 기존 법안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품이 가는가를 생각해 보면, 정치권의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굳이 특별법의 개정까지 필요할까 싶더군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인데요.”
하지만 당사자인 유진으로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요란스러운 행사가 필요했는지 의문이라는 점을 밝혔다.
“뭐, 사실 강 회장님께서 한국 국적을 회복하셨으면 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열망이니까요. 하하!”
칭찬이라도 들을 요량으로 말을 꺼냈던 의원이 너털웃음으로 화제를 넘긴다.
“김환용 후보님께서 강 회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나시면 한 번 찾아오셨을 텐데, 요즘 너무 바빠 미국까지 건너올 여유가 나지 않으셨습니다.”
“김 후보님께서 바쁘신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인데,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야 없지요. 아무튼 김 후보님께서 선전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날 찾아온 사람은 여당 대통령 후보의 측근인 다선 의원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서 여당 후보는 근소하게나마 지지율에서 앞서고 있었다.
국민들이 대선에서 투표하는 기준은 사실 굉장히 단순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늘 찍던 정당의 후보에 변함없이 표를 던진다.
그리고 실상 대통령 선거를 좌우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 정권의 실책이나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번 대선의 경우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복잡하게 연관되어 선거의 결과를 예측하기 무척 어려운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정권의 경우 이런저런 실책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정권 말기로 들어서며 대통령과 그 인척들의 전횡이 외부에 알려져 큰 논란을 만들었다.
이미 검찰에서는 대통령 주변인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고, 때에 따라서는 대통령까지도 불법, 혹은 탈법 행위로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에 들어와 유진의 투자 약속 덕분에 경제 실적이 상당히 호전되며 경제 분야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냈다.
유권자들은 정권 말기에 터져 버린 대통령의 실책에 책임을 묻는 투표를 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경제 실적이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며 같은 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언론에서는 여당 후보의 선전에 약간의 우세가 실릴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안개 속이라는 전망이 훨씬 더 우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의 향방을 가를 만한 매우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이제는 한국인도 아닌 유진이다. 만일 그가 두 후보 중 한 명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중도층의 반응이 명확하게 갈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었다.
현재까지의 스코어로는 여당 후보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지만, 만일 유진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말이라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유진은 영국의 브렉시트에서부터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지 않았던 결과를 예측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왔다.
예언자의 말에는 그가 한 말을 이루게 만드는 자기 실현성이 생기기 마련이고, 지금의 유진이 그러했다.
만일 이번 한국 선거에 대해서도 그가 어떠한 식으로든 예측을 내어 놓는다면, 그대로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
유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유진의 지지가 대통령 선거의 향방을 가를 것이 너무나 뚜렷했다.
이제 선거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각 당의 후보들이 유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당 대선 후보의 최측근이 찾아온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가 선거에 개입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만일의 경우라면 자신들의 손을 들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대선도 상당히 치열한 것 같더군요. 김 후보님의 인망과 능력에 대해서는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은 듯싶더군요.”
“네. 사실 우리 당 김환용 후보님께는 한 점 티끌만 한 오점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유권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단지 같은 당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현 정권의 실책까지도 후보님께 책임을 묻는 이들도 있으니 걱정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 번 이야기를 꺼내자, 찾아온 의원은 거침없이 유진의 지지를 원한다는 말을 꺼내 놓는다.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지금 저야 투표권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강 회장님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김 후보님,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나만은 진짜배기입니다.”
상황이 급하기는 한 모양인지 대선 후보의 최측근이며, 여당 4선 의원은 허리까지 깊게 숙이며 유진의 지지를 요청했다.
“사실 오 의원 측에서도 몇 번이나 찾아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유진 또한 거침없이 자신에게 상대방 진영의 요구가 있었음을 밝혔다.
“무, 물론 그랬겠지요.”
상대방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간다. 그럴 거라는 거야 얼마든지 예측하던 일이지만, 이렇게 명백하게 꺼내놓으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저로서는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적인 문제에 끼어드는 일이 반가울 수는 없습니다. 투자자로서뿐 아니라, 외부자로서도 정치적인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니까요.”
“물론 그러시겠죠…….”
“만일 이번에 제가 김 후보님께 도움을 드렸다가, 후일 야당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에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곤란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강 회장님께서 국가 경제에 얼마나 커다란 이바지를 하셨는데, 누가 감히 강 회장님께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뭐, 미래의 일은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선거에 어떤 역할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진이 완곡하게 거절을 표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강 회장님께서 그리고 계신 한국 재계의 미래에 최대한의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강 회장님과 가족분들께 잘못을 한 전 대양 그룹 관계자들 모두 합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대방은 준비해 온 다양한 카드를 꺼내 놓았다.
그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닌지라, 유진이 원할 만한 대가들을 충분하게 준비해 놓은 모양이다.
유진의 과거에서 미래까지 그가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망라한 청사진을 들고 왔다.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한국 경제에 대한 유진의 큰 그림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표시였다.
물론 현시점에서의 한국 경제는 단순히 정치권에서의 의사만으로 구조를 바꿀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유진의 재력과 정권의 의지가 함께한다면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유진이 마침내 설득되었다는 듯 답변을 주었다.
“아무래도 이번 대선에서는 김 후보님께서 승리하셔야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진이라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끼어들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하고, 적당한 말로 상대의 요청을 넘겨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유진에게 이번 대선의 향방을 가를 만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고,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행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이지요.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위치해야 합니다.”
며칠에 걸친 회담 끝에 전령은 마침내 감격스러운 답변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정치권과 경제 권력 사이의 유착일 테지만 이런 유착은 언제나 있어 왔고,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투자 회사를 운영 중인 한국계 미국인 강유진 회장이 연초에 약속했던 500조 원의 투자금 중 1년 차 투자금인 100억 원을 한국으로 송금해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은 물론이고 재계 다양한 기업에 투자를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제일전자와 다산자동차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거침없이 시행된 이번 투자로 한국 증시는 연일 폭등에 가깝게 오르고 있습니다. 500조 원의 투자금은 한국의 GDP의 30%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로, 올해 국내총생산에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제일전자와 다산자동차는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새로운 직원의 채용을 20% 이상 늘릴 계획이라 밝혔습니다. 다른 기업들 또한 적지 않은 채용 계획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며 한국 언론들은 연일 유진의 투자 계획에 대한 새로운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500조 원이라는 유례없는 투자 계획으로 인해 한국 경제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는 소식은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였고, 정부 여당으로서는 경제적인 성과에 대한 치적을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으로 언론으로서도 유진이 직접 밝힌 사실을 보도하는 것을 꺼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모두들 하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유진이 직접 기자들을 뉴욕으로 초대해 인터뷰까지 하며 투자 진행 상황을 공개한 이유가 대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