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우상
“아니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랍니까?”
“저희 쪽에서도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맨해튼에 있는 그 사람과 특별한 커넥션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몇 번 만나고 온 의원이 있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아도 강 의원이 연락을 해 본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강유진이랑 본관이 같다고 그렇게나 떠들어 대더니, 어째 도움이 안 돼?”
“요즘 세상에 어디 그런게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강 회장이 아무래도 저쪽을 밀어주기로 한 것 같은데, 어쩌죠?”
유진이 한국에 이해에만 100조 원의 거액의 투자를 완료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후로, 한국의 정치계는 발칵 뒤집혀 버렸다.
여당에서는 이번 대선의 승기를 잡았다며 자축 분위기에 들어갔고, 야당에서는 벌써 패배를 자인하는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100억도 아니고 100조 원이랍니다. 한국 사람 전체로 치면 1인당 200만 원, 가구당으로 치면 721만 원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5년 동안이니, 가구당 3,500만 원 상당의 자산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가 찰 노릇이죠. 사실상 그자가 대통령 선거에 앞서 국민들에게 돈을 마구 퍼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이끌어 내고 있어요.”
“몇몇 대기업에 투자한다고 해서 그게 일반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렇지만 벌써 여론은 그렇게 된 거나 다름없다는 논조로 몰고 있습니다. 아니, 부가 가치의 창출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혜택이 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빌어먹을 언론들. 그놈들 전부 제일과 다산의 충복들 아닙니까?”
유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자리는 어느샌가 한국 언론에 대한 성토의 자리로 바뀌고 있었다.
“이 나라 언론들이 특정 계층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사이의 일입니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당면한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수무책입니다. 나부터도 기가 막힌데…… 100억 원도 큰돈인데, 100조랍니다. 작년 우리나라 예산이 400조가 안 되었어요. 터무니없을 만큼 큰돈입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말로 100조가 들어온 것은 맞답니까?”
“확인해 보니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 쪽으로 거의 600억 달러가 들어왔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최근 다수의 회사채를 발행하고, 새로 신주를 발행하는 것으로 대응하기로 했답니다.”
유진이 한국에 거의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액수를 투자한 것이 전부 비용으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사채와 전환사채, 그리고 신주인수권부사채와 주식을 담보로 다른 투자 기관을 통해 충분한 만큼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으니, 들어간 돈은 투자한 금액에 비하면 아주 적은 비율에 지나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로서는 강유진과 한국의 1, 2위 재벌그룹 양쪽 모두 자금을 회수하는 데 문제가 없다 보고 있었기에 부담 없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강유진이 한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SS파트너스와 SS벤처스에도 200억 달러가 들어왔고, 다른 몇몇 기업에도 적지 않은 자금이 투자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100조 원이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명백하게 대선에 개입하려는 거예요.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이걸 대대적으로 알리고 나선 이유가 뭐겠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5년 동안 한국에 50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공표한 것이 이미 한참 전의 일이고, 또 연말이 되어 약속을 지킨 것을 알리는 거라 볼 수 있으니 꼬투리를 잡기 애매한 문제입니다.”
“애매하기는 뭐가 애매해요? 하필 대선을 한 달 남겨 놓고 그 짓을 하느냐 말이야? 대선 끝나고 해도 되잖아!”
“여하튼 강 회장의 의사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책은 강 회장이 어떤 생각인지 듣고 난 뒤에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야당 측에서는 대책을 세우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온통 100조, 100조 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 당으로서는 강 회장님께서 대선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태평양을 건너 날아온 야당 의원이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에도 조심하며 유진에게 소심하게 항의를 표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같은 강씨 가문에 자신이 항렬이 높다며 편하게 말하던 야당의 강 의원은 이제는 아주 깍듯하게 회장님 소리를 하며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유진이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지 않은 탓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를 국회로 불러내어 망신 주기를 하는 짓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이제 와서야 한국 국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재계의 거물을 넘어 미국 대통령의 복심 소리를 듣고 있는 유진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허망한 생각 따윈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 같은 것은 아직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참 아쉬운 일이네요.”
유진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야당 의원의 항의를 묵살했다.
“어디까지나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물론 저희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대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보도가 나오니, 유권자가 보기에는 강 회장님께서 여당 후보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꼭 여당 후보께만 이득이 되는 거라니, 너무 편협한 생각이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요. 누가 강 회장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강 회장님의 의사를 왜곡해서라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시키려는 인간들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그렇다고 이제 와 투자 계획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유진의 발언에 강 의원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꾸 귀찮게 하면 야당의 압박으로 투자를 취소하겠다 발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충분한 말이다.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고…….”
강 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쳤다.
“사실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대선은 물론이고 한국의 어떠한 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제 뜻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물론이죠. 당연한 말씀이시지요. 하하…….”
어떻게든 여당에 대한 지지가 없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해 주길 바라던 강 의원으로서는 유진의 그런 말이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해 달라고 크게 압박할 수 있는 처지도 되지 못한다.
이미 유진의 입지가 한국의 일개 의원 정도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간 자신이 유진과 같은 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몇 번이나 방문해 나름 친분을 쌓으면서 유진에게 받은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뉴욕에 올 때마다 유진의 트럼프 타워 콘도에서 호화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사소하지만 이런저런 편의도 제공받았다.
더군다나 같은 당 의원들이 유진에게 200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받아 지금은 거의 3억 원 상당의 자산으로 불어난 것에 비해, 강 의원이 받은 암호화폐는 벌써 6억 원의 가치로 불어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에 받은 것은 겨우 수십만 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그간 유진을 지켜본 입장에선 이 정도로 불어날 것을 내다보고 미리 주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유진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현인의 눈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강의원은 이제 그와 적대를 했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이 닥칠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제 유진의 투자 발표가 대선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음 대통령 선거보다도 유진의 투자로 인해 한국 경제가 얼마나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인지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솔직히 이번 발표는 대선 개입 맞는 거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 두고 보고 있을 수만 없지 않습니까?”
모든 언론인들이 유진의 투자 발표에 대해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아무리 이번 투자가 한국 경제에 호재가 맞다 해도, 대선 개입의 여지가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의견을 내는 이들의 상당수는 여당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 강 회장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싣자는 거야?”
“그래도 써야 할 건 써야 하지 않습니까? 언론이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의혹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해 취재하고,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 기자는 지금 사람들이 몰라서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해? 국민들은 기자가 기사로 써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랭이들이야? 대체 언제 적 사고를 하고 있는 거야? 요즘은 신문이나 방송을 보지 않아도 엄청나게 다양한 통로로 뉴스를 접하고 서로 공유하는 시대라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다들 잘 알아. 김 기자만 똑똑한 사람 아니야.”
“아니,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의혹이 있으면 취재를 하고, 공론화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좀처럼 의견을 굽히지 않는 기자의 말에 편집장이 답답하다는 투로 답했다.
“그 공론화 아무도 안 바래. 다들 알아. 강 회장 지금 대선 개입 하는 거. 근데 아무도 신경 안 써. 왠지 알아? 돈이 들어오거든. 한국에 100조 원이. 그리고 앞으로도 매년 그만큼씩 말이야. 근데 지금 거기 초를 치자고? 미쳤어?”
“초를 치자는 이야기입니까? 그게? 하필 대선이 코앞에 닥쳐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 대통령의 실정에 대해 단죄하자는 말이 슬슬 줄어들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총대를 메고 강 회장을 비판하자는 기사를 쓰자고? 미쳤어? 목숨이 두 개, 아니 서너 개쯤 돼?”
“여기서 목숨이 왜 나옵니까? 강 회장을 비판하면 누가 죽이기라도 한답니까?”
편집장에게 대들던 기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모르지. 그렇게 될지도 모를 일이야. 누구든 지금 강 회장한테 딴지라도 걸면 아주 매국노가 되어 버릴걸? 진짜로 총은 몰라도 칼이라고 갖고 와서 난리를 칠 수도 있어.”
편집장과 열혈 기자 사이의 대화를 지켜보던 고참 기자가 한마디한다.
“맞아. 아니면 차를 몰고 우리 회사에 뛰어들 수도 있고 말이야.”
편집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기자가 올바른 소리를 한다고 칼을 들고, 차를 몰고 덮치다니요.”
“모를 일이지. 지금 사람들 분위기가 그래. 강 회장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이고, 강 회장이 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메시아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 참…….”
김 기자는 다시 한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그 또한 사회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이 처음 미국에서 부를 쌓을 무렵만 해도 유진은 그저 해외에서 잘 나가는 동포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때에도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유진의 팬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재산이 세계 제일이라는 보도가 있고부터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유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갔다.
그냥 부자라는 것과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고, 더군다나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짧은 시간 사이에 그런 커다란 위업을 이루어 낸 유진은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인에게 우상처럼 여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