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한국 문화의 장밋빛 전망
“강 회장님께 몇 가지 여쭙고 싶은 일들이 있어서요. 뭐라고요? LA요? 거기는 언제…….”
편집장의 허락을 받자마자 화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날아온 기자는 유진과의 만남을 요청하기 위해 그의 홍보팀에게 전화했다가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들었다.
유진이 이미 대륙 서쪽으로 날아가 버린 뒤라는 이야기였다.
이번에 찾아온 것은 단순한 신변잡기식 인터뷰가 아니라 유진이 추진 중인 쇼에 대한 것이니 그래도 만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일정을 잡지도 않고 날아온 것이 실책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객기에 가깝기도 하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기약이 없다고요? 아…… 그러면 혹시 제가 LA로 가서 뵐 수 있을까요? 네. 푸드 네트워크에서 방영 중인 트럭 쇼와 넷플릭스의 푸드트럭 배틀에 대해 취재 중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그분들을 만나 뵙고 취재하겠습니다.”
다행히 그의 성의가 전해진 덕인지, 푸드 네트워크와 넷플릭스 제작팀을 취재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날아온 주목적인 강 회장과의 만남은 여전히 미지수였다.
사실 한국 언론들의 유진에 대한 관심은 아주 열렬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적지 않은 언론사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을 직접 만나 인터뷰까지 성공한 경우는 몇 년 동안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나 공개 인터뷰를 자청하곤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강 회장이 애착을 갖고 직접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기대가 있었는데, LA까지 날아가 버렸다니 아쉬움이 컸다.
더군다나 뉴욕에서와 달리 LA에서는 사생활을 중요시하기에 기자를 저택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니, 더욱 난감할 뿐이다.
뉴욕으로 날아온 기자가 그렇게 실망하고 있던 시간, 로스앤젤레스 최고급 주택가인 벨에어에서도 가장 넓고 비싼 저택으로 널리 알려진 유진의 자택에서는 조금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쪽은 한국의 톱스타 강동우 씨,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명 배우인 장유라 씨입니다.”
LA에 방문할 때면 유진은 하루가 멀다 싶게 다양한 무비 스타나 팝 스타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여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주로 초대받는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는 조금 낯선 사람들이 파티의 주빈으로 초대되어 다른 스타들에게 공개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유진의 친구인 마이클입니다.”
유진의 소개에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하나둘씩 한국에서 온 스타를 반갑게 맞이하고 인사를 나눈다.
그저 평범하게 파티에 참여한 정도였다면 이런 환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직접 소개를 해 주니, 그들로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할리우드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뉴욕에서의 그것에 비해서도 훨씬 더 직접적이고, 광범위하다.
월 스트리트의 많은 은행가들은 유진과의 거래를 반기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이쪽은 무조건적인 환영뿐이다.
지금까지 유진이 투자해서 성공하지 못한 영화는 한 편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투자 분야와 달리 영화의 경우라면 이미 그가 보았거나 흥행 여부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투자를 집행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언젠가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며 그의 앞에 놓인 제작 예정 영화 리스트에서 하나씩 꼽아 올리면 그걸로 그만이다.
그리고 유진의 재력은 할리우드에서 매년 제작되는 영화 전체에 투자하고도 남을 정도이니, 그의 투자를 거절한 제작사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큰 액수의 투자를 하면서도 귀찮은 요구를 하는 일도 한번 없었다.
기껏해야 그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을 보내거나, 영화 촬영을 전후해 파티를 열어 주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이 전부이다. 하나같이 오히려 환영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니 배우든 감독이든, 제작자든 당연히 유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했고, 그의 파티에 참석하길 원했다.
이제 할리우드의 누구도 유진이야말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반가워요. 샐다나에요.”
“아! 정말 반갑습니다. 올해 개봉한 가디언즈는 아주 잘 봤습니다.”
그런 유진의 소개로 나타난 사람이다.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다.
유진이 한 번 소개시켜 주고 나면 배우든 감독이든 제작자든 하나씩 모여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루이스 헤스토르입니다. CAA에서 헤드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에이전시 또한 빠질 수 없었다.
“아! 반갑습니다. CAA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명 배우와 인연을 맺는 것만큼이나 에이전시 고위 임원과의 만남도 도움이 될 것이다.
CAA(Creative Artists Agency)는 WME(William Morris Endeavor)와 함께 미국의 양대 에이전시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배우나 가수뿐 아니라 스포츠 스타에서 감독, 작곡가는 물론이고 작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분야의 프리랜서들을 대행해 주는 곳으로, 할리우드 대형 작품의 경우 출연 배우와 감독까지 거의 CAA와 WME에 소속된 인원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을 정도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몇 년쯤 뒤에는 적지 않은 한국의 배우와 가수들이 이 양대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게 될 것이다. 유진은 그 시간을 조금 앞당겨 주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한국의 배우나 가수들이 할리우드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멀찍이 물러나 한적한 곳을 찾았다.
그런 유진의 곁으로 술잔을 든 요안나가 다가왔다.
“보스가 한국에 대해 그렇게 큰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이번에는 오랜만에 LA까지 함께 온 요안나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유진과 최근 그의 행동은 조금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굉장한 애정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 보스의 행보를 누가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는걸요? 한국의 대기업에 대한 투자야 얼마든지 경제적 관점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외에 코리안 푸드 컬쳐를 미국에 뿌리내리게 한다거나, 한국의 셀럽들을 미국에 자리 잡게 도와주는 일 같은 것은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보면 돼. 내가 미국에서 돈을 잔뜩 벌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벌써 상당한 지지를 보내고 있지. 거기에 여기서 한국 문화의 미국 진출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런 지지는 좀 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유진의 말에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정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는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가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그 역시 전부 내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아무리 포춘지가 발표한 1위 부호라고 해도, 여전히 난 미국 사람들의 주류에는 들어갈 수 없을 거야. 아! 물론 사교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 전체적인 인지도라는 면에서 그렇다는 거야. 일반적인 미국 시민들에게 난 그저 동양에서 온 낯선 부호에 불과할 뿐이니까.”
평범한 미국인들은 유진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아니면 인도인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미국인이 자국 외의 세계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는 미국인들보다 오히려 외국인이 더욱 잘 알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거의 외계처럼 느껴질 뿐이다.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 주민들을 제외하고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세계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 보라고 하면 대개는 전혀 엉뚱한 곳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한국이 미국인들에게 알려지는 게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그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차라리 푸드 컬쳐라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문화가 미국인들에게 친숙해질 수 있을까요?”
요안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동양, 조금 더 넓히면 아시아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미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프리카보다도 오히려 더욱 멀게 느껴진다.
이미 흑인들이 미국의 주류에 어느 정도 합류하고 있다 할 수 있으니, 아프리카는 심정적으로 아시아에 비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문화라니. 물론 일본의 문화가 어느 정도 미국에 뿌리내리고는 있지만, 한국 문화가 그렇게 될 거라고 보기에는 너무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투자하고 있는 거지.”
“아! 그렇군요.”
요안나는 잠시 자신이 보스를 의심했던 것을 반성했다. 지금까지 유진의 선택이 틀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지만…… 이건 경제적인 투자가 아니잖아요? 솔직히 한국 문화라는 건 미국에서는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에요. 물론 보스가 대단한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문화적인 부분을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리 요안나라고 해도 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한국 문화는 미국에서는 변경 중의 변경이다. 인도나 중국, 아니면 베트남 문화보다도 오히려 덜 알려진 것이 한국이고, 한국 문화이다.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는 촌스러운 옷을 입고 이상한 언어로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는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은 최변방에 불과하다.
그런 한국 문화를 미국에 뿌리내리겠다는 말을 듣고 납득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앞으로 5년.”
하지만 유진은 너무나도 자신만만했다.
“네? 5년이요?”
“어. 5년 안에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게 될 거야. 한국 영화를 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게 될 거야. 한국 영화가 오스카에서 작품상, 감독상 같은 주요 분야를 휩쓸고, 미국의 청소년들은 빌보드에서 1위한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고, 미국인들 천만 명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거기 나오는 행동들을 따라 하게 될 거야.”
“하하! 아무리 보스라도 그건 좀…….”
요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과거의 유진도 누군가가 이맘때에 5년 뒤에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보스가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고 해도, 문화는 그렇게 자본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요.”
“내기라도 해 볼까?”
“네? 내기요?”
유진의 제안에 요안나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보스는 아직 단 한 번도 틀린 선택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건 정말로 전혀 다른 일이다. 미국의 틴에이저들이 한국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아카데미 영화제에 한국 영화가? 천만 명이 보는 한국 드라마? 어느 것 하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
“좋아요! 해요! 그 내기.”
요안나는 처음으로 보스를 이길 만한 거리를 찾아냈다.
“이기는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 어때?”
“뭐든지요?”
“그래. 뭐든지.”
“좋아요! 그 내기 절대로 잊으시면 안 돼요! 방금 보스가 말한 거 전부 이루어져야 해요! 오스카 감독상, 빌보드 1위, 천만 드라마!”
요안나가 의기양양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진 걸로 하지.”
“보스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룰 수는 없다고요.”
“그래. 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말이지. 하지만 언제 내가 내 스스로 이룬다고 했던가? 한국 문화가 가진 힘이 그때쯤이면 그 정도의 성과를 이루게 될 거라는 말이야.”
유진이야말로 자신만만했다. 그가 뭔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