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디딤돌
“반드시 처음부터 주연으로 나올 필요는 없어요. 꼭 중요한 조연이 아니어도 되고요. 하지만 등장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배역들이 있지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계속 뇌리에 남아 있는 그런 멋진 등장인물들 말이에요. 잠깐 나와서 주인공의 위기를 구해 준다거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임팩트 있게 사라지는 캐릭터 같이요.”
“멋지네요. 그런 역할이라면 작은 배역이라도 참여할 보람이 있겠어요.”
유진의 말에 장유라가 열정적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영화에서는 한두 장면만 나오지만, TV쇼에서는 줄창 출연하며 그 배역에 관해 설명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거예요. 영화가 개봉되면 언론에서 그 작은 역할을 한 배우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 댈 터이고, 코난 쇼나 레이트나이트 쇼에서 두 분을 섭외할 테니까요.”
“아!”
유진이 하는 말은 그저 공상에 불과한 말이 아니다. 그는 매년 박스오피스 순위의 1위에서 20위까지를 차지할 작품들 대부분의 주요한 투자자였다.
각 영화에 그런 작지만 임팩트 있는 역할을 부탁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주요 방송국인 폭스나 NBC, CBS, ABC의 주요 주주이기도 하며, 적지 않은 출판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멋진 배역을 주는 것도, 그 배역에 대해 언론에서 띄워 주는 것도, 수천만 명이 보는 심야 토크쇼에 초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유진이 원하는 것은 한국 출신 배우들이 블록버스터 영화에 출연해 대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촉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한국인은 섹시하고, 잘생기고, 미인이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게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시청자들이 소비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이미지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이 촌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거기 속한 특별난 누군가가 세련된 이미지를 갖고 있어도 원래의 소속에서 기인한 선입관을 깨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선 그 이미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섹시하고 쿨하게라…….”
“섹시하고 사랑스럽게요…….”
두 남녀 톱스타는 유진이 했던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유진이 선택한 남녀 배우나 가수, 그리고 지망생들 대개가 그런 사람들이다.
남자들은 선이 굵고 강인하면서도 섹시했다. 여자들은 키가 크고, 개성 있는 마스크의 소유자들이다.
사실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선호하는 외모라기보다는 훨씬 더 강렬한 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
철저하게 미국에서 바라보는 섹시한 이미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유진의 기억 속에서 몇 년 뒤에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배역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곳 사람들의 문화에 친숙해지는 거지요. 토크쇼에서 제대로 된 유머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 평범한 영화 주연을 맡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람들을 만나고 파티를 즐기라고 하셨던 거군요. 자연스럽게 여기 사람들에 녹아들어 가라는 거였어요.”
“유머라…… 확실히 그건 그냥 연습만으로 되지는 않겠군요.”
그제야 두 사람은 비로소 유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진은 그가 불러온 사람들이 미국 문화에 침투하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겠어요. 무척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물론이지요. 미국 사람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친근하게 받아들이려면 한두 번이나 1, 2년의 시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한국의 문화와 한국 출신 배우, 가수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단순한 일회적인 이벤트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세심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일개 개인이나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적어도 국가 규모의 역량을 지닌 세력이 중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뚝심 있게 밀고 가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대형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그걸 하려는 것이 중국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무기로, 다양한 블록버스터 영화에 자국 배우들이 출연하게 만들고, 중국 친화적인 시나리오를 작성하게 권유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의 압력은 그 어떠한 외압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할리우드의 어떠한 제작사도 중국 국민이나 중국 정부에 거스르는 시나리오를 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최대한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국의 그러한 노력은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중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소망은 소망에 불과할 뿐이다.
다행히 유진에게는 일개 국가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자본도 충분하고, 그의 계획은 중국의 그것처럼 억지로 주요 배역이나 제작을 자국 배우에게 맡기려는 따위가 아니다.
그저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재고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렇게 이미지를 바꾸는 정도로 끝난다면 큰 의미가 없다.
섹시하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활용할 제대로 된 콘텐츠가 필요하다.
아쉽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은 유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유진이 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힘차게 솟구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판을 딛고 위로 뛰어오를 것은 바로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지닌 잠재력이다.
유진은 앞으로 2, 3년쯤 지난 뒤에는 제대로 된 한류 붐이 미국에서도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는 유진의 포석이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아이돌이 미국의 십 대를 열광시키고 한국의 드라마가 미국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무렵, 이미 유진이 진출시킨 배우들은 이미 미국인들에게 낯선 인종만은 아닐 터이다.
“물론 그렇게 작은 역할만을 할 것도 아니고요. 차츰 문화의 저변을 넓히다 보면 충분한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라고 하시는 거겠죠?”
이제 두 사람은 유진이 말하지 않은 것도 스스로 잡아 내고 있었다. 그건 이미 두 사람이 유진에 대해 깊은 신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이 소개시켜 준 사람들은 모두 할리우드와 음악계에서 각기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국이 그러하듯, 미국에서도 인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결국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을 먼저 고려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름 바쁘면서도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유진에게 한국의 기자가 찾아왔다.
유진이 추진 중인 한국 음식의 미국 진출 사업에 대해 심도 깊은 취재를 한 기자는, 기어이 LA까지 따라와 인터뷰를 청했다.
“강 회장님께서 다방면으로 한국의 음식 문화가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확인해 보니 한국 연예인들의 미국 진출에도 도움을 주시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의 멋진 배우와 가수들이 이곳에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배우나 가수, 그리고 기획사에서 열심히 미국의 주류 문화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요.”
“네, 아쉽게도 그랬죠.”
“그걸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뭐든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한국의 연예인들은 언제고 여기서도 성공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요. 다만 좀 더 체계적인 뒷받침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그리고 더 빠르게 성공의 기록을 써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저한테는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고요.”
유진이 늘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편하게 꺼내놓았다.
그 자신의 이익에도, 그리고 한국 사람들 모두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일이니, 숨기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렇군요. 강 회장님께서 그렇게 한국 문화의 미국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강 회장님께서 이렇게까지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노력하고 계신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신이 났다. 단순히 한국 음식에 대한 것만으로도 기삿거리는 풍부했는데, 오늘의 이야기는 그걸 훌쩍 넘어서고 있다.
“한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10대 강국에 속하고 있지요. 하지만 세계적인 영향력은 그에 비해 훨씬 못하다고 할 수 있어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같은 10대 강국에 속하는 다른 나라들, 미국이나 중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유럽의 선진국에 비해서도 한국이 그 위상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지는 방향으로 영향력이 커질 것도 아니고, 경제력으로 보아도 인도나 브라질,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가 점점 성장하고 있으니 10대 경제 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한국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소프트 파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로 하여금 어떠한 요구를 강제하는 힘인 하드 파워(Hard Power)는 군사력, 경제력 등의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프트 파워(Soft power) 또는 연성권력(軟性權力)이라 불리는 것은 상대방이 스스로의 의지로 가까워지고 싶거나, 닮고 싶어 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먼저 하게 만드는 어떠한 매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의 예로는 정신적, 종교적, 혹은 윤리적 가치나 문화, 그리고 외교 따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나 주로 문화의 힘을 그렇게 일컫는다.
한 나라의 특유한 매력에 감화된 다른 국가의 국민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그 문화의 창출국과 닮고 싶어 하며, 우호적인 시선을 가지고 따르고 싶어 한다.
이건 상대에 대한 비호감이나 더 나아가 혐오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군사력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결코 얻어 낼 수 없는 본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힘이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그 힘이 사라지면 영향력 또한 감소하기 마련이지만, 한 번 문화에 감화된 세대는 계속해서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하도록 하는 힘이라는 표현까지 가능한 이러한 소프트 파워야 말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건 백범 김구 선생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군요.”
“그렇죠. 그분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말씀을 하셨던 거예요. 겨우 밥도 챙겨 먹기 어려웠을 시대에, 문화 강국의 필요성을 역설하셨으니 얼마나 위대한 선지자이셨는지. 이제야 비로소 큰 뜻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한국의 문화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점점 더 그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선견지명을 다시금 헤아리게 되는군요. 하지만 아시아는 어느 정도 문화적인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미국 시장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전히 이곳에서는 아시아 사람에 대한 차별이 굉장히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 회장님께서 의도하시는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상당히 많을 것 같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문화는 이미 수십 년 동안의 성숙기를 거쳐 왔고, 이제 그 꽃을 피워 나갈 때가 다가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전 그때를 대비해서 자그마한 디딤돌이라도 만들어 보려는 겁니다.”
유진은 무척 겸손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이 인터뷰가 기사로 나간 뒤에는 충분한 파장을 몰고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