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거인의 후회
이태원에 위치한 대양 그룹 사주 저택은 벌써 1년이 넘게 드나드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여전히 몇몇 저택을 관리하는 이들은 남아 있었지만, 대양 그룹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들도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한데 이날 그 집이 오랜만에 부산해졌다.
1년 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던 회장이 오랜만에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부인이 급히 병원으로 찾아갔고, 회장은 이제 다시 쓰러지면 아마도 다시는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을 거라며 집으로 가겠다 고집을 부린 것이다.
노 회장의 고집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기에 기어코 엠뷸런스에 회장을 태우고 저택으로 돌아와 회장이 좋아하던 몇 가지 음식을 차리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식솔들이 그렇게 오랜만에 떠들썩한 사이, 회장은 침실에서 부인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듣고 있었다.
“근호는 감옥에 갇혀 있고, 근일이는 사고로 죽었단 말이지? 근수는 유럽 어디에선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고?”
류 회장은 의외로 침착하게 물었다.
“네. 상황이 너무 좋질 않네요. 회장님.”
“그래…… 많이 안 좋구나.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느냐?”
“다들 몸을 사리는 중입니다. 정권에서 강유진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자칫하면 다른 식구들도 검찰의 수사를 받을 수 있는 형편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하…… 그래. 거기다 오 비서는 돌연 그 녀석한테 빌붙었단 말이지?”
“네. 대양홀딩스를 만들어 알짜배기 계열사만 따로 모아 놓았어요.”
충격적일 수 있는 소식에도 회장은 여전히 여상한 표정이었다.
“녀석의 지분이 그렇게나 되던가?”
“사실은 제가 오 비서에게 위임했어요. 그때는 그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거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죄송해요, 회장님.”
“아니. 잘했네. 어차피 그 녀석이 딴마음을 먹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어야지. 차라리 잘된 일이야.”
“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그룹을 살리기는 아예 그른 판국이야. 정권까지 나섰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은 당시 근호 사장이 홀딩스를 통째로 한규와 대규한테 넘겨주려 했었어요.”
여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남의 부당한 행동을 남편에게 고자질한다.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욕심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놈이니 말이야.”
“다른 가족들도 생각을 해 주셨다면 저도 그리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필 그런 상황에서 오직 한규와 대규만 챙기면…….”
“그래.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 잘했네. 어찌 되었던 홀딩스라는 이름 아래 살아남은 계열사들이 있으니 그걸로 되었어.”
“그럼 회장님은 지금이라도 그걸 찾아올 방도가 있으신 게로군요?”
여인이 화색이 되며 물었다.
“아니. 그건 포기해야겠어. 그보다 변호사 좀 부르시게나.”
“네? 변호사요? 알았어요.”
“그리고 종이와 펜을 주게나. 받쳐 쓸 수 있는 것도 주고.”
침대에 등을 기대며 회장이 말했다.
부인이 화급하게 흰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니, 회장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고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가 쓸 테니 회장님께서 부르셔요.”
“아니. 이건 내가 직접 해야겠네. 어서 변호사나 부르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으니.”
“네.”
부인이 변호사를 부르는 전화를 하는 동안, 회장은 계속해서 종이를 메워 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변호사가 도착할 무렵 회장은 흰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워 놓았다.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회장님.”
변호사가 침실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쾌차는 아닐세. 이제 시간이 다 된 모양이야.”
회장은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리 정정하신데 말입니다.”
“지금 그런 인사치레 할 시간 없네. 내가 부르는 대로 빨리 적어 유언장이나 작성하세.”
“네? 아, 그러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시작부터 말문이 막히는지 겨우 두 마디를 내뱉은 회장은 잠시 자신의 부인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저택과 논현동, 여의도의 빌딩은 이 사람에게 주겠네.”
“네.”
“그리고 오산의 농장은 첫째 며느리에게…….”
회장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이나 기타 자산들을 대개는 기억하고 있었는지, 생각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상속받을 사람을 정해 주었다.
변호사가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울 만큼의 리스트를 써 내려가고야 회장의 구술이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보유하고 있는 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은 전부 각 계열사에 출연하겠다.”
마지막에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방 안에 있던 나머지 두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회장님!”
먼저 입을 연 것은 변호사였다.
“뭘 하나? 어서 받아 적게.”
“네? 아! 네…… 하지만 아직 회장님의 지분은 적어도…….”
“자네가 내 집사인가?”
“아, 아닙니다.”
변호사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걸 받아 적었다.
“나와 내 자식들이 불민해서 회사에 적지 않은 누를 끼친 것 같아 송구스러울 뿐이야. 회사의 임직원들은 물론이고 주주들에게까지 손해를 끼쳤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지.”
“네? 아, 예…….”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으로 각 계열사의 부채를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자 하네.”
“알겠습니다. 그리 밝히겠습니다.”
변호사는 회장이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만큼의 센스는 있었다.
당장 이 유언장에 대해 발표하면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세간의 비난도 조금은 잦아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양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세력들에게 백기를 드는 것으로 선처를 바란다는 성명을 내놓는 것과 다름없다.
“아들 하나는 감옥에 있고, 또 하나는 외지를 떠돌고 있는데, 그냥 둘 수야 없지. 이렇게라도 해서 정권이든 그 강유진이든 만족하게 만들어 이 상황을 끝내야겠네. 거의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하면 그들도 더는 독하게는 굴지 못할 게야.”
회장은 이번에는 살짝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의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기업 사주가 사재를 출연하는 것에는 그렇게 선처를 바란다는 의미가 컸다.
이제는 많이 희석되었다고 해도, 회장이 지닌 지분의 가치는 얼추 조 단위를 넘나든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기에 그 지분은 회장 일가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식솔들에게 나누어 준 지분도 적은 편은 아니지만, 류 회장은 아직도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지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회장의 가장 큰 재산을 헌납하겠다는 말에도 부인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네와 근석이가 살아가는 데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말게나.”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요.”
적어도 회장 앞에서 그녀는 현숙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다 끝났나?”
“예. 여기 날인만 하시면 됩니다.”
변호사가 급하게 작성한 유언장을 내놓았다.
“그래. 이제 그만 가 보시게.”
날인이 끝나고 회장은 변호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고맙네. 이해해 주어서.”
회장은 폭탄 같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동안 묵묵히 지켜보던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니에요. 회장님 말씀이 옳으세요. 그 사람의 분노를 누르지 못하면 우리 식구 모두가 편하게 살지는 못할 거예요. 그걸로 그쪽이 이해해 주면 오히려 다행이지요.”
“듣기로 그리 막힌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너무 심려 말게. 전 재산을 내놓았는데, 근호를 계속 가두어 두지는 않을 게야. 그리고 현규도 이제 맘 편히 들어올 수 있겠지.”
“그리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일어나 갑작스레 이런 일을 벌이는 남편이 어쩐지 약해진 것으로만 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녀라고 지난 1년여 동안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마지막을 남겨 두고 보니 후회가 많아. 내가 무얼 위해 그렇게나 아등바등 살았던지 모르겠어.”
“그런 말씀 마세요. 회장님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에요. 비록 대양 그룹에 위기가 왔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대양은 회장님께서 손수 일궈 오신 커다란 업적으로 계속 남을 거예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요. 회장님께서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 내셨는지요.”
“하하. 그래. 내 손을 떠났다고 대양이 대양이 아닌 것은 아니지.”
노인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근석이를 위해서는 나름 준비를 해 두었네. 한국에서 계열사를 경영해서 이름을 남기는 것만큼은 못하겠지만, 근석이 녀석은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미국 땅이 나을 게야. 자네도 그리로 건너가 이젠 마음 편히 살아 보게나.”
회장의 막내아들은 미국에 있으면서도 끊이지 않고 사고를 저질러 왔기에, 어차피 한국에 들어와도 문제만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계속해서 회장님 곁을 지킬 거예요.”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그리고 두 내외는 잠시 두런두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곧 그룹의 실정과 자식들에 대한 염려로 돌아오고 만다.
“요즈음 여기를 출근하는 비서는 류 비서 하나뿐이라고 했었지?”
“예. 참 듬직한 사람이더군요. 대양이 그렇게 되고서야 아무 득 볼 것도 없는 일인데, 전과 다름없이 새벽녘에 출근해 묵묵히 일을 수행하네요. 젊은 사람이 아주 진국이에요.”
“자네도 알아야 할 게 있네.”
“네. 말씀하세요.”
“그 친구…… 내 아들이네.”
“네에?”
여간해서는 회장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던 여인이 남편의 폭탄 같은 말에 경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자넬 만나기 몇 년 전에 잠시 거두었던 여자가 있었네.”
회장은 잠시 짧게 류 비서의 출생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재계에서 손꼽히는 그룹의 회장이 그렇게 여자들을 거느리는 일이야 한국 사회에서야 흔한 일이다.
여인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당장 남편의 유산을 나누어야 할 경쟁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셨군요. 미리 알았다면 좀 잘해 주었을 터인데요.”
여인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류 비서를 들어오게 해 주게.”
“네. 회장님.”
여인은 머릿속이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회장의 지시를 따라 밖에서 대기하던 류 비서를 침실로 불렀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회장은 밑도 끝도 없이 아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별로 한 건 없습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그 혈연을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지난번에 네게 했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구나.”
노인의 말에 아들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대양이 무너졌으니, 네가 굳이 이 집안에 들어올 이유도 없고 말이다.”
여전히 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