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회광반조
“조금 전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작성했다. 거기에도 네 이름은 넣지 않았다. 서운하지는 않으냐?”
“서운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서운함은커녕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드러나지 않는다.
“괜히 거기 이름을 올려 보았자 번거롭기만 할 뿐이지. 가서 금고를 열어 보거라. 비밀번호는 982324871298.”
노인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열두 자리에 달하는 번호를 단숨에 불렀다.
류 비서는 침실 한쪽에 걸려 있는 유화를 내려놓았다. 노인이 좋아하던 고갱의 그림 뒤에는 제법 커다란 금고 문이 숨겨져 있다.
꽤 오래된 물건인지, 최근의 전자식이 아닌 다이얼 식의 묵직한 금고였다.
류 비서는 다이얼에 손을 대고 묵묵히 방금 들은 숫자대로 좌우로 돌렸다.
금고의 문이 열리자 그곳에서 제법 묵직한 서류 뭉치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 파란 서류철을 가져오면 된다.”
회장의 말이 떨어지자, 류 비서가 서류 뭉치 속에서 유일하게 파란색 표지로 덮여 있던 서류철을 찾아 꺼내 들고 회장의 곁으로 돌아갔다.
“거기 다섯 장 중에 하나를 고르거라.”
류 비서는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서류들이 회장의 숨겨진 재산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회장의 공식적인 아들은 막내인 근석을 포함해 넷이다.
한데 다섯 장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부친이 전부터 그를 다른 자식들과 동일한 반열에 두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류 비서는 그런 것으로 감동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회장이 얼마나 너구리 같은 인간인지는 그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내는 것 따위는 그의 평생에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일일 터이다.
이런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늘 준비해 왔다고 해도 그리 놀라울 것은 없다.
류 비서는 침착하게 서류 하나를 골랐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것밖에는 줄 수 없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이것도 분에 넘칩니다.”
류 비서가 고른 서류의 가장 위에는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권에 있는 기업체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안쪽에는 그걸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쓰여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가져다 놓아 두거라.”
회장은 아까 변호사가 작성해 놓고 간 유언장과 파란 서류철을 함께 집어 들며 말했다.
류 비서는 조용히 회장 손에 있던 서류들을 들고 다시 금고로 가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려 잠기도록 했다.
“거기 있는 서류들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야.”
노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기에, 듣고 있던 두 사람은 그가 과연 정말로 유해진 것이었는지 잘 파악이 되질 않았다.
“정치하겠다 나와 있는 사람 가운데, 내가 주는 용돈 한 번 받아 보지 않은 이가 없지. 법복을 입은 사람들도 말이야.”
노인은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게 말을 이어 갔다.
“당근을 내밀었으면, 채찍도 손에 쥐고 있어야지. 거기 붉은색 서류철이 리스트고, 나머지가 내역이야. 그것만 있다면 지금 자기 이름 걸어 놓고 행세하는 누구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게다.”
재계의 거물이라면 마지막 수단으로 지니고 있기 마련인 정치인과 법조인들에 대한 헌납 자료가 그곳에 있었다.
물론 이걸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은 돈을 건네준 사람 또한 진흙탕으로 빠질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양은 이미 진흙탕이 아니라 불구덩이에 휩싸여 있었다.
이걸 사용할 기회가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회장은 유언장을 통해 여론을 회유하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협박해서라도 위기에 놓인 식솔들의 활로를 찾을 생각인 모양이다.
“오 비서가 있었다면 그자에게 맡겼겠는데, 지금에 와서는 네가 역할을 맡아 주어야겠구나.”
“알겠습니다.”
“마지막까지 힘든 일을 맡겨 미안하구나. 네 형들의 꼴이 영 아니니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 같군요.”
평생 형이라 불러 보기는커녕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 와야 했던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맡았지만, 류 비서는 조금도 억울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저녁이나 먹자꾸나. 그러고 보니 너와 함께 밥을 먹어 본 것도 너무 오래되었구나.”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네. 너무 오래되었군요. 사실 잘 기억 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류 비서는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오랜 기억을 되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두 부자는 오랜 앙금을 잊고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저녁 회장은 정말로 기운을 차렸다는 듯, 식당에서 아들과 함께 차려놓은 식사를 즐겁게 비웠다.
식사가 끝나고 회장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고, 류 비서는 그러고 나서도 언제나처럼 거실에서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홉 시가 지날 무렵 침실 문이 열리고, 네글리제 차림의 회장 부인이 나왔다.
“회장님은 괜찮으신가요?”
“그래. 잠이 드셨어. 뭐가 그리 후련하신지 편한 얼굴을 하고 계시네.”
“다행이군요.”
“대단한 사람이었네. 당신.”
회장 부인이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류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체 그런 비밀을 어떻게 숨기고 있던 거야? 아니, 대체 우리 사이에 그렇게까지 숨기고 있을 이유가 있었어?”
류 비서의 건너편에 앉으며 부인이 물었다.
“부인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있어, 어디? 근데 이젠 어쩌지? 회장님께서 대양 그룹 지분을 전부 회사에 출연하신다는데?”
“그러시군요.”
“그러시군요가 아니야. 1조가 넘어. 그게 어디 한두 푼이야?”
“하지만 회장님의 결심이 그러하신데 어쩔 도리가 있나요.”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여인은 다리를 꼬며 고혹한 미소를 지었다.
류 비서의 명령으로 이미 집안의 고용인들은 전부 퇴근하거나 지하의 고용인 실에 두엇이 남아있을 뿐이라 거실에는 두 사람뿐이다.
류 비서는 지긋한 눈으로 부친의 젊은 부인을 한눈에 넣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이태원동의 자택으로 엠뷸런스가 다시 와 노인을 싣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의 이송에 관여한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킬 것을 강요받았고, 회장이 계열사인 병원 깊숙한 곳의 병실로 옮겨진 사실은 외부에는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
* * *
“그래서 우리 아버지한테도 한몫이 돌아간다는 말이군요.”
성규가 물었다.
언제나처럼 강남의 프라이빗 클럽 특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성규는 뜻하지 않은 삼촌의 방문을 맞이했고, 그 호적에 오르지 못한 삼촌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 정확히 네 개의 서류가 있더군.”
손을 잡은 사이라 해도, 모든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카는 조카대로 비밀을 갖고 있고, 삼촌은 삼촌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지금까지 수사에서 밝혀진 해외 법인 말고도 비밀리에 운영 중인 것들이 틀림없이 있겠지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것부터 챙겼다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재산이겠어요.”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출원이라니. 어이가 없네. 그 많은 돈을 그냥 포기하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대양 그룹은 해체되고, 해외 재산도 적지 않게 적발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닌 것은 많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부분을 내놓겠다는데,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노인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속을 썩이네. 나 참…….”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잠이 들었던 대양 그룹의 회장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게 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실을 발표하는 것을 지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그 유언장, 찢어 버려야겠군요.”
당연한 생각이다. 이 자리에 있는 성규도, 류 비서도 유언장대로 집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 따위 하나도 없다.
처벌을 받는 사람은 그들이 탐탁지 않아 하는 형제와 큰아버지, 그리고 부친이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영감이 다시 암호를 바꿔 버렸어. 그 여자도 암호를 몰라 금고를 열 수 없고. 누군가 새로운 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지. 그 여자도 모르는 모양이야. 금고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리더군.”
류 비서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말했다. 회장은 자신의 부인도 모르게 금고의 비밀번호를 바꾸어 버린 모양이다.
회장은 자신의 숨겨진 아들도, 그리고 아내조차도 완전하게 믿지는 않았다.
“당장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외부에 알리는 것은 막아 놓았어. 일단 시간을 벌어 두었으니 금고를 열고 유언장을 꺼내 소각해 버릴 생각뿐이더군.”
“대체 누가 그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것 같아요?”
성규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알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네?”
류 비서는 묘한 웃음을 띠고 되물었다.
“설마 집안에서 쫓겨난 나한테 그런 중요한 걸 알려줬겠어요?”
“그러려나?”
“아무래도 세 형제 중에 있겠죠. 그 여자도 모른다는 걸 보면 막내는 아니고요.”
성규의 말에 류 비서는 지금까지 몇 번 마주쳐 본 게 전부인 세 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이미 1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남은 것은 둘 중 하나이다.
아직도 감옥에 있는 대양자동차 사장 류근호 아니면 입국하면 구속될 것이 두려워 유럽을 떠돌고 있는 성규의 부친 류근수.
“둘 다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그렇죠. 그 둘이 금고를 열면 유언장은 물론이고 그 서류도 빼앗기겠네요.”
유언장을 공개해 회장의 지분을 빼앗기는 것만큼이나 그 서류에 감춰져 있는 회장의 해외 재산 또한 놓치기에는 아까운 것들이다.
“금고 따는 사람은 불렀고요?”
“물론이지. 하지만 실패였어. 보통 복잡한 게 아니라네.”
“뚜껑을 따야지요?”
“그것도 곤란해. 그 여자 말로는 억지로 금고문을 따면 안에서 화학 약품이 나와 서류를 망가트린다는군.”
“곤란하네…….”
서류가 망가지면 유언장뿐 아니라 해외에 숨겨진 재산에 대한 자료 또한 날아가 버린다.
유언장에 언급된 지분과 해외의 재산 중 어느 쪽이 더 큰지는 오직 회장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무려 열두 자리에 달하는 금고 비밀번호는 하나씩 시도해 보는 방법으로도 무리이다.
회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들 전부가 한몫이라도 챙기기를 원했다.
절대 한두 사람이 전부 챙기지는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가 죽기 전 잠시 정신을 차리고 한 마지막 행사였다.
“아무래도 내가 알아봐야겠군요.”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요. 얼마가 걸린 일인데요. 대신 삼등분입니다.”
성규가 비릿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셋이 공평하게 나누기로 하지.”
류 비서나 회장의 미망인 또한 비밀번호를 모르고서는 제 몫을 챙길 수 없다.
이미 두 사람은 금고를 열고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물론 그때 가서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아무리 마땅치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협력이 필요하다면 웃는 얼굴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은 모르는 대양 그룹 창업주의 사망을 전후해서 그렇게 또 다른 음모가 생겨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