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폴라로이드
“그렇게 매섭게 노려보지 말라고. 난 딱히 당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야.”
성규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사진을 보낸 이유가 뭐예요?”
여자는 손에 들고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이제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좋은 모습이로군. 외할머니가 아이를 굉장히 아끼는 모양이지.”
“그게 지금 할 소리예요? 당신 아이예요.”
“그래. 아쉽네. 그때 한 번 보고 아직 제대로 보질 못했어.”
“대체 어떤 인간이 자기 아이를 가지고 협박을 할 수 있죠?”
“협박? 대체 누가?”
“협박이 아니라면 이런 사진을 보낸 이유가 뭔가요?”
여자, 한채아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성규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이에게도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어? 아빠가 엄마를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 아이가 자라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생각해 보았나?”
“아빠든 누구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한채아가 매몰차게 말했다.
“죄라…… 그래.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난 당신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판사들 역시 이번에도 똑같은 판결을 내리겠지요.”
여인이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틀림없이 우리 서로가 원해서 가진 관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신은 조금 더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했었고.”
“그건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에요. 난 당신에게 억지로 당한 이후로 맥없이 끌려다니기만 했을 뿐이에요.”
“녹음기 같은 거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 당신은 늘 우리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지?”
이번엔 성규가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녹음 같은 거 안 해요. 어차피 들어올 때 전부 검사했잖아요? 전화기도 빼앗았고.”
두 남녀는 한때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였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일말의 믿음도 없다.
서로를 의심하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상대에 대한 적의를 깔고 있었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 어째서 그런 거지? 그 상황에서 날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고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뭐였던 거야?”
“살아남는 거죠. 난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는 방해가 될 뿐인 날 가만두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서글프네. 그래도 당신한테는 마음을 열어 왔었는데. 그렇게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었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도 여기가 욱신거리고 있어요.”
한채아는 표독하게 성규를 바라보며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말했다.
벌써 1년도 훨씬 전에 습격당해 칼을 맞고 죽다 살아난 그녀였다.
병원에서 무려 석 달이나 누워 있어야 했고, 지금도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오해야. 강유진이 그 자식의 열렬한 팬이 한 거잖아?”
“그 정도 조작은 당신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음을 열어 보일 수도 없고 말이지.”
“헛소리 그만하고 부른 용건이나 말해요.”
한채아가 날카로운 것은 물론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사주가 분명하다.
“참 귀엽게 잘 자라나고 있네.”
성규는 느물거리며 여자가 들고 있는 사진에 눈길을 준다.
그녀가 숨긴 모친과 아이를 찾아내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설마 해외로 보내 놓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일본으로 가서 다시 필리핀 등 몇 나라를 경유해 뉴질랜드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성규는 솔직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원하는 게 뭐죠?”
한채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제 서로 간에 상처를 주는 일은 그만하지. 당신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나도 그렇고 말이야. 아이에게는 아빠가 필요하고.”
“설마 이제 와 합치자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어차피 나도 당신도 홀몸인데.”
성규가 성폭행 혐의로 구속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정도 없이 결혼했던 아내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았다.
이혼 과정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기에 금세 끝나버렸다.
“대체 내가 당신을 어디를 믿고 함께할 수 있다는 건가요?”
한채아의 물음은 상대에 대한 미련이 남았기 때문은 아니다.
아이와 모친이 그의 감시 아래 있으니, 어떠한 요구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처음 이 자리에 나온 순간부터 이미 승패는 나 있었다.
“여생을 함께할 사람을 믿지 못하면 어쩌겠어?”
“당신이랑 그럴 생각 추호도 없어요.”
“난 꼭 그래야겠는데?”
“후우…….”
한채아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재판 때문인 거죠? 어차피 그게 아니라면 이럴 이유도 없잖아요?”
성규에 대한 재판은 1심에서는 유죄로 판결이 났고, 지금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최근의 한국 상황에서 성규가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보였다.
“합의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게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와 합의를 보아 형기를 줄이는 것뿐이다.
한채아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합의 정돈 얼마든지 해 줄 생각이다.
“대신 나와 아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말아요.”
“그걸로는 곤란해. 완전히 복권이 되야 하거든.”
“그렇다면 탄원서라도 써 줄게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게 필요해.”
“제대로 된 거라니, 뭘 말하는 거죠?”
“우리 사이가 괜찮은 동안에도 당신은 그걸 전부 녹음하고 녹화한 모양이더군.”
성규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네?”
한채아가 흠칫 놀란다. 성규를 재판장에 세운 것도 그녀가 녹음한 것 때문이고, 그들이 몰락한 것도 신혼 방에 설치해 놓은 카메라 때문이다.
“있을 거 아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
성규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듯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여인은 이 남자가 사실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없어요. 그런 거.”
하지만 한채아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 그럼 가 봐. 우리 더는 볼 일이 없겠네.”
성규가 얼굴을 풀며 말했다.
“당신…….”
한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저 남자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대로 자리를 뜬다면 다음번에는 이런 폴라로이드 사진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끔찍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아이…… 건드리지 말아요. 절대!”
“자꾸 날 이상한 놈으로 만들지 마. 당신 말대로 내 아이인데, 내가 왜 아이를 괴롭힌다는 거야?”
“찾아볼게요.”
한채아는 기어코 손을 들고야 말았다. 저 남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재판…… 당신이 원하는 대로 끝나면 다시는 우릴 찾지 말아요. 그것만 약속해 주면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건 곤란한데?”
성규가 다시 느물거리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난 내 이미지를 회복시켜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너무 놀란 나머지 날 무고했다는 증거가 필요해.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당신을 용서하고, 아이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지을 거야.”
“이 비열한…….”
“대체 누가 비열하다는 거지? 당신을 사랑하던 남자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려 하고, 당신 아이의 아빠를 감옥에 보내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승기를 잡은 성규는 이제 비아냥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신, 꼭 지옥에 갈 거야.”
한채아가 저주처럼 성규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찬가지이지. 우리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야. 하하.”
성규는 즐겁다는 듯 술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 * *
“대양그룹 회장이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쓰러졌다고 합니다.”
사설 정보 수집 기관인 아메리카 비즈니스 센터를 맡고 있는 존 브레넌이 새로운 소식을 알려 왔을 때, 유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미디어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것이야 당연한 일일 터이고, 그런 은밀한 소식까지 알아내는 존 브래넌 또한 이제는 그다지 크게 감탄할 일도 아니다.
존 브래넌이 한국에 구축해 놓은 정보망은 정치인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증거와 함께 제출하고는 해서, 유진을 진심으로 경탄시키고는 한다.
“아무래도 사망한 듯합니다. 병원에 돌아간 뒤에 사망한 것인지, 자택에서 사망한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망한 것만은 거의 90% 이상 확실합니다.”
“흠. 아쉽네…….”
유진은 정신을 잃었다던 그 노인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직접 보고 느끼기를 원했다.
이렇게 잠깐이 아니라 충분히 오래 살아서 자신의 제국이 완전히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바랬다.
“그래.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을 더 신경 쓸 생각은 없다. 어차피 하루라도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는 일을 목격했다면, 절반은 이룬 셈이다.
“류 비서라고 했었나요?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
존 브레넌의 한국 지사에서는 심지어 회장 자택에 근무 중인 젊은 비서가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보고해 왔었다.
“네. 지금도 여전히 회장 자택으로 출근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회장이 정신을 차리고 왔던 날에는 회장과 회장 부인까지 세 사람이 나란히 식당에서 식사를 즐겼다고 하더군요.”
그 집안에 근무하는 직원 중에 존 브레넌이 심어 놓은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 가능했다.
“흠. 아무래도 뭔가 벌어질 것 같네요. 그쪽 정보를 좀 더 면밀하게 확인하도록 하죠.”
대그룹의 창업자이며 수십 년을 독재자처럼 군림해 온 사내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유족 간에 무언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사실 유진이 이번 삶에서 겪은 고통을 헤아리면 대양 그룹이 해체되고, 자동차 사장이 구속된 것만으로도 지난 묵은 감정을 풀 정도는 된다.
하지만 그는 그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지난 삶에서 대양과 엮여 그와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지금 대양 그룹 식솔들이 누리고 있을 호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감옥에 들어가 있다 해도 일반 수감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우를 받을 터이고, 해외에서 떠돈다고 해도 귀국만 하지 못할 뿐이지 마음껏 호사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류성규는 항소심을 이어가면서도 강남의 고급 클럽을 차지하고 마음 편히 지내는 모양이다.
유진의 징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시작도 했다 볼 수 없다. 그들 구성원 모두가 진짜 절망을 느껴봐야만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분간 한국 쪽 자원은 대양 그룹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지금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 주면 돼요.”
존 브레넌이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단순히 유진의 사적 복수를 위해서는 아니다.
유진이 관여하는 많은 기업의 투자와 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지금도 기관이 모은 수많은 정보는 요안나와 윌리엄의 투자기관에 제공되어 그들의 투자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유진은 사적인 감정과 사업에 필요한 자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이성은 지닌 사람이다.